바다 위로 걸어오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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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로 걸어오시다
  • 백창욱
  • 승인 2020.08.10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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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열 번째 주일 설교문(20. 8. 9)

주일설교문(20. 8. 9) 성령강림 후 열 번째 주일
마태 14:22-33 “바다 위로 걸어오시다”


요즘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슈퍼맨이 되는 것입니다. 슈퍼맨이든 베트맨이든 킹콩이든 하여간 초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소성리 사드불법기지 앞에서 제 나라 시민들을 습관적으로 짓밟는 경찰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지 안에 있는 사드도 번쩍 들어서 태평양에 던져버리고 싶습니다. 말로는 임시배치니 환경영향평가 중이니 하지만 사드배치는 고정화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능개량이나 이동배치, 추가배치같은 다양한 옵션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모두 미국 미사일방어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입니다. 사드철거투쟁을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천불이 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사드기지 차량이 드나들 때마다 몸으로 막고 있지만, 정권은 경찰들을 풀어서 우리를 봉쇄하고는 지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8월 4일 화요일에도 정권은 경찰을 풀어서 각종 차량을 집어넣었습니다. 이번이 열 번째입니다. 재미 들렸습니다. 경찰에 고착된 채 차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통합니다. 무력감과 분노,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칩니다. 고착된 장소에 갇혀서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경찰 벽을 뚫고, 울타리를 넘어서 진밭교 창고 앞까지 갔습니다. 움직일 때마다 경찰들이 떼거지로 따라다니면서 길을 막습니다. 탁자 위에 올라가서 외쳤습니다. 

구한말에 나라를 구한다고 의병이 일어났는데 그 의병을 진압한 세력이 누구인가요? 관병입니다. 일제의 조종을 받는 왕실의 지시를 받은 관병이 의병을 진압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나요? 나라가 망했습니다. 그런데 백이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은 양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제의 꼭두각시 정권의 지시를 받은 경찰이 제 나라 시민을 짓밟고 미제 밑 닦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행위가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에 대해 전혀 성찰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내일모레가 815 분단 75년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분단을 극복하고 자주와 독립으로 가는 징조가 많아야 하는데 되레 더더욱 미제에 예속되고 분단 극복은 멀어지고 있습니다. 남북관계 개선이 절실한 마당인데, 북한이 그토록 싫어하는 한미군사전쟁연습을 하려고 합니다. 장마와 폭우만 걱정이 아니고 나라 현실도 통탄할 일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복음서를 쓸 때 제일 우선적인 동기는 예수의 역사나 예수의 전기를 쓰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들을 변화시킨 실제 경험을 고백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들은 언어로는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경험들입니다. 그래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독자들에게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과장해서 서술했습니다. 그런고로 복음서 기자들은 자기들의 말이 문자 그대로 읽혀지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들이 합리적으로 믿을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세기 독자들도 문자 그대로 읽지 않고 저자의 의도를 잘 이해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저자나 독자가 같은 삶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도 문자 그대로 읽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독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의 자리가 어떠했나를 살피는 게 중요합니다. 존재가 의의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읽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서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방금 말씀한 것처럼, 저자들이 복음서를 쓴 고백 차원을 따라 적용해 보겠습니다. 예수는 물 위를 걸었나요? 문자 그대로 보면 물 위를 걸었지만, 언어의 한계 때문에 과장한 서술이라면 물 위를 걸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역사 예수 역시 시공간의 물리적 제약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복음저자는 예수가 물 위를 걸었다고 서술하는 건가요?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가 이런 증언을 하게 된 그들의 삶의 자리를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갈릴리에서 나서 자란 제자들에게 갈릴리바다는 인간의 무력감을 뼈저리게 안겨주는 실체입니다. 바다는 많은 것을 선물로 안겨줍니다. 그러나 한편 바다는 그들에게 절망입니다. 거센 바람, 풍랑에 오도 가도 못하고 배가 뒤집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경험은 얼마나 무력하고 뼈저린가요. 
춘천 의암호에서 일어난 선박전복사고는 물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물살이 평소보다 열 배나 빠른 곳에 작은 배를 타고 수초섬을 정박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데 그 일을 하다가 배가 뒤집혀서 7명 중 1명만 구조되고 1명은 죽고 5명은 실종됐습니다. 그 일을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 채 생사람만 잡았습니다. 제가 늘 말하듯이 권력자 놈들은 어둠의 장막 뒤에 숨어서 부당한 지시만 내릴 뿐, 현장에 대해서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 현장에서 어떤 비인간적인, 반인권적이고 반민주적인 일이 일어나도 개의치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바다는 절망의 존재였습니다. 그것이 실제 바다일 수도 있고,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는 어떤 세력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바다를 제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다를 제어하는 것은 바다 위를 걷는 것입니다. 자연인과법칙을 거슬러서라도 바다를 걷는다면, 절망을 벗어나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소박한 바람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절망을 극복하려는 간절함을 예수를 통해 구현했습니다. 제가 서두에 슈퍼맨이 돼서 우리를 짓밟는 경찰들을 쓸어버리고 싶다고 말한 그 심정처럼, 제자들은 바다를 제어하고 싶은 열망을 바다를 걸으시는 예수를 고백함으로 실현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 속에 담긴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첫째,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나요? 예수가 뭍에서 제자들을 건너편으로 보내려고 헤쳐 보낸 데 있습니다. 원인자는 예수입니다. 예수가 헤쳐 보낸 까닭에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우리에게 시련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암시하나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시련을 만났을 때, 그 일도 주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나를 덮친 일에 대해 그 너머에 계신 주님을 의식하십시오. 그럼, 우리는 좀 더 시련에 당당히 맞서 견딜 수 있습니다. 

둘째, 이들이 풍랑에 시달린 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날이 저물었을 때에, 제자들은 배를 타서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 즈음에 이미 풍랑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그친 시간은 이른 새벽이 좀 지나서입니다.(25절, 32절) 날이 저물 즈음에 풍랑이 시작해서 이른 새벽이 좀 지나서 상황이 끝났습니다. 밤 7-8시경에 날이 저물었고 이른 새벽은 새벽 4-5시경이므로 최소 8-9시간을 풍랑에 시달렸습니다. 꽤 긴 시간입니다. 밤을 꼬박 풍랑 속에 견딘 것입니다. 제자들이 한계에 달할 즈음에 시련이 끝났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나요?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그 시련이 금방 끝나기를 바라지만, 실제로는 금방 끝나지 않습니다. 겪을 것 다 겪고 이리 채이고 저리 채여서 인간의 밑바닥까지 다 드러난 후에야 끝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좀 일찍 등장하지,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나나? 쓴 맛, 단 맛, 신 맛, 짠 맛을 다 봐야 일의 교훈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성숙해집니다. 주어진 상황을 담담히 맞이하기를 빕니다.  

저는 소성리에서 기지를 바라볼 때마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합니다. 과연 우리가 사드를 철거시킬 수 있을까? 저 거대한 군사집단을 돌려 세울 수 있을까? 우리는 맨 손이고 숫자도 적고, 저쪽은 법도 무기도 권력도 다 가지고 있고, 우리가 저항하면 불법이고 공무집행방해라고 하고 모든 게 열세인데... 
우리가 늘 쓰는 구호가 있습니다. “질긴 놈이 이긴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가 승리한다.” 우리에게는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분이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습니다. 우리의 투쟁도 그분과 함께 하는 한, 승리합니다. 
여러분을 덮치는 시련에 굴하지 마십시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 말씀 의지해서 견디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두려울 것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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