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요 12:7)
지난 7월 29일 수요일 성서일과는 마리아와 마르타를 기억하는 날로 요한복음 12장 첫부분이었습니다.
전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8절 말씀을 붙들고 씨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는데, 글을 쓰느라 블로그를 뒤지니 그때도 결론은 "오늘 주님의 말씀이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당신의 죽음을 깊이 이해해주길 바라는 하소연이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http://blog.daum.net/ask2me/13662381 「항상 함께 있는 가난한 자」)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수난을 예고하는데도 십자가의 길을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절대고독을 공감한 제자는 막달라 마리아 뿐이었다고 성서일과가 전해줍니다.
지금 소성리의 사드 철회 투쟁은 기지로 통하는 길목을 24시간 봉쇄하는데 온 힘을 다 쏟고 있습니다. 임시배치라던 사드기지를 미군과 국방부가 완성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길목을 막는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저들이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길을 뚫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저 짓밟히고 들려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몇 시간 길을 늦출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런 저항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는 투쟁입니다.
게다가 경찰병력을 동원하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무료하게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투쟁입니다. (이제 저들도 웬만하면 주민들과의 충돌을 피하려 하면서, 미군이 강력하게 요구하거나 자신들의 필요가 그만큼 절실하지 않으면 경찰병력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불편을 감수하고 육로를 포기하고 헬기로 다니기 때문에, 기지로 통하는 도로를 차량으로 통행하는 경우는 사전양해된 몇 가지 경우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길목을 지키는 일을 멈출 수는 없으니, 한 사람이라도 그 길위에 늘 깨어 지켜야 하지요.
의경들만 교대하며 지켜보는 길위에서 밤새워 10시간씩 홀로 지켜내는 일은 절대 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독을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사랑은 절대고독을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이라는 걸 진작에 알고 가르쳤었습니다. '희생과 양보의 원리'라는 제목으로 진정한 사랑에 대해 가르치면서, 희생자는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지 말라고 다만 네 사랑을 알게하라고 가르쳤지요. (http://blog.daum.net/ask2me/11527370 희생자가 보여주어야 할 태도 ③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지 말 것))
하지만 말로 떠들긴 쉬워도 실제 이를 실천하긴 어려운 일입니다. 고독을 견디지 못해서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십자가의 길을 걷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기나긴 투쟁의 시간, 그 고독한 시간들을 이겨나가는 힘은 첫번째 수난예고에서 십자가의 길을 막아섰던 베드로가 아니라 장례를 준비하여 향유를 깨뜨린 막달라 마리아 같은 이들에게서 얻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이 성서일과를 묵상하기 전날 밤새워 길목을 지키는 일을 대신 감당해 주신 부부 활동가가 있었습니다. 그 두분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