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중심’과 ‘생명중심’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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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중심’과 ‘생명중심’ 사이에서
  • 유미호
  • 승인 2020.07.18 11: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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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판도라의 약속>을 보고

‘찬핵’을 이해하려면···

​<판도라의 약속>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유튜브에서 무료로, (영상 앞과 중간에 붙은 광고들도 없어) 편하게 관람할 수 있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서 판권을 사들였다고도 하고, 2013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영돼 큰 인기를 모았다고도 한다. 내가 직접 확인한 건 아니지만 그저 맹랑한 풍문만은 아닐 것이다.

​<판도라의 약속>은 찬핵/친핵(pro-nuclear)을 주장하는 영화다. 어머나, 깜짝이야, “모두가 골고루 풍성한 삶을 살기까지”를 표어로 삼고 있는 여기 살림 브런치에 웬···!?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이라는 의미에서 찬핵론자들의 논리를 침착하게 따라가며 이해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판도라의 약속>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 위험한 핵발전소를 옹호할까? 이렇게 간단히 무시하거나 우스워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찬핵론자들의 논리가 어디에서 비롯되어 어디까지 이르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즉 그들을 '알게' 된다. 그들의 논리가 (적어도 내세우는 것만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구조적 짜임새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그 논리의 어느 대목이 ‘대중선전’에서 어느 만큼의 힘을 발휘하는지를 살펴볼 수도 있다.

​둘째, 환경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동기(진심)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판도라의 약속>은 과거 진보적 정치이슈에 앞장서던 감독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 데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지난날 환경 이슈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어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그 분야에서 나름 인지도가 높았던 활동가들이라고 한다. 영화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반핵·탈핵운동을 뉘우친다(?). “옛날엔 뭘 몰라서 그랬다”고 술회한다. 그런 그들을 보고, 파이낸셜 뉴스(2014년 12월 15일) 기사는 “변절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그들이 과연 변절자인지, 꼼꼼히 검토해볼 여지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뉴스> 그들은 왜 기꺼이 원전을 껴안았나..反원전주의자들의 변신 2014.12.12/뉴스1

​찬핵은 광범위한 과학적·의학적 통계수치를 근거로 삼는다

<판도라의 약속>은 과학적·의학적 통계수치를 대량으로 열거하며 친핵의 필요성과 찬핵의 긴급성을 강조한다. 통계수치가 매우 효과적으로 제시된 사례로는, 전 세계적으로 핵발전소가 많기로 유명한 프랑스가, 탈핵을 앞장서서 선언하고 재생에너지 개발에 힘을 쏟는 독일보다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적은 것을 비교하는 것이다. 이 통계는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줄이는 데 핵발전소가 기여하고 있다는 논리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석탄에너지와 핵에너지를 기후위기의 면에서 비교할 수 있도록 이끈다. 그렇다. <판도라의 약속>은 찬핵주장의 주된 근거로 ‘기후위기’를 내세운다. 기후위기를 가속화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에너지를 성공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데, 왜 핵발전을 반대하는가, 질문한다.

​<판도라의 약속>은 인류가 전력사용 축소, 전력남용 방지에 대해 (국가 단위로 권위있게) 결의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빈곤한 지역일수록 전력이 절실히 더 필요하니 더 많이 공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구증가를 따라 전력생산이 늘어나는 게 옳으며, 그러려면 핵발전소의 활용 및 증축은 필수적이라는 논리전개!

​한편 <판도라의 약속>은 반핵·탈핵활동가들을, 감정적 반대를 일삼는 비논리적 인물들로 묘사한다. 마치 사회운동은 감정(감성)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감상(sentimentality)과 공감(empathy/ sympathy)을 혼동하게 한다.

​반대로 찬핵론을 들고 나온 전직 환경운동가들의 음성은 차분하며, 표정은 침착하다. 합리적 판단에 기반하여 구체적으로 지지를 표명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조명도 은은하니 멋지게 쏘아준다. 소위 악마의 편집 같지만, 막상 관람하고 있을 때는 영상편집의 의도를 거의 감지하지 못한다.

찬핵론자들을 변절자로 규정하기가 까다롭다

<판도라의 약속>은 세계보건기구와 유엔이 팩트체크해 출간한 보고서 내용에 근거해있다. 공식보고서들에서는 방사능 피폭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통계수치가 매우 적게 기록되어있다. 그래서 “요건 몰랐지?”라는 식으로 <판도라의 약속>은 그 숫자들에 빨간 밑줄까지 그어 중요하게 인용한다. 역학관계가 증명되지 않았고, 피해자들이 스스로 그걸 입증하기 어려우며, 또 여러 이유로 역학관계에 대한 공식적 인정과 배상이 인색하다는 문제가 있다는 부연설명은 없다.

​그리고, <판도라의 약속> 제작진은 현재 운영중인 핵발전소의 핵폐기장 시설 안에서 측정한 방사능 수치와, 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측정한 방사능 수치를 비교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한다. 거기서 인공방사능이 자연방사능보다 “성공적으로 관리한다면” 무려(!) 덜(!) 위험하다는 주장을 뽑아낸다. 또, 러시아의 핵폐기물(핵탄두)을 사들여 재활용해 전기를 생산하고, 기술개발을 통해 절대안전(!?)을 추구하고자 노력하는 과학자들의 작업현장을 여러 번 보여준다. 내로라 하는 석학들이 땀흘려 일하며, 곧 뭔가 성취해낼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음으로 찬핵론을 주장하는 전직 환경운동가들은 자신이 여전히 환경을 염려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환경문제 중 특별히 기후위기에 염려가 크다. 그들은 먼저 1980년대 미국 롱아일랜드 주에서 탈핵/반핵운동을 부추겼던 신문광고의 광고주가 ‘공기오염과 기후위기의 주범’인 석탄발전소였음을 지적한다.

​위 사실들을 참작하면, 적어도 등장인물들은 변절한 게 아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열정을 쏟아부어 '성취(!)'해내고자 했던 ‘지점(이슈)’이 바뀌었을 뿐이다.

​<판도라의 약속>은 기후위기를 한탄한다. 그러면서 기후위기를 막을 대안으로 ‘석탄연료 사용억제’를 제안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석탄사용을 중단하면 생산된 전력의 절대량이 줄어드니 그리 되지 않도록 핵전력으로 대체하자! 이것이 찬핵론자들의 논리다. 차분차분 들여다보면, 기후위기가 핵심이 아니다. “전력생산이 줄어들지 않도록”이 핵심이다.

 

​​​활동가가 ‘성취중심’과 ‘생명중심’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면···

이제 <판도라의 약속>은 핵발전에 주력할 때 나타나는 문제점, 부작용은 기술개발로 극복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드러내어 보인다. 투자를 제대로 하면 기술개발에 성취할 것이고, 그러면 핵발전에서 파생되는 부수적 문제점들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래서 그들은 1980년대 미국에서 ‘최상급으로 안전한’ 최신형원자로 개발프로젝트(IFR)가 무산된 게 매우 아쉽다. (자연의 힘을 활용하는 재생에너지 개발에 투자하자는 이야기는 '1'도 하지 않는다.)

​요컨대, <판도라의 약속>은 인간의 힘, 인공의 위력을 믿는다. 전력생산을 유지하며 환경보전도 도모할 수 있는 길이 있고, 그 길이 핵발전이며, 그것을 인간이 성취할 수 있다는 것.

​‘성취중심’의 인생관을 지니고 있으면, ‘성취중심’의 인생관에 동의하면 <판도라의 약속>은 반갑고 귀하다. 설득력이 있다. 그런 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시종일관 기후위기와 환경보호와 청정 에너지를 이야기하지만, <판도라의 약속>은 사실은 인간의 성취를 칭송하고 설득하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현실에는, 특정 이슈에서 같이 마음을 모으고 연대를 실천하지만, 그 안에는 성취를 추구하는 경향의 활동가와 생명을 추구하는 성향의 활동가가 뒤섞여있다. 자기도 자기가 어떤 활동가인지 정확히 모를 수 있다는 게 함정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면 활동가들 중 어떤 사람들이 ‘성취중심’과 ‘생명중심’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길을 잃은 활동가들은 ‘성취중심’으로 빨려들어갈 수 있다. 당면 이슈에서 성취를 맛보지 않으면 기운이 빠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약속>은 그러한 현상을 겪은 이들의 경험담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해 조금 깊이 생각하노라면, 오싹한 혹은 서글픈 느낌까지 올라온다.)

​아닌 게 아니라, <판도라의 약속>은 ‘아이들의 미래’는 언급하지만 ‘지구의 미래’는 언급하지 않는다. 또, ‘생활수준’은 환기하나 ‘생명’은 환기하지 않는다. ‘성취중심’의, 인간중심의 인생관을 이야기하려면 ‘생명중심’의 인생관을 제외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달하는 메시지의 층위를 차근차근 살피는 눈과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영화가 ‘성취중심’에 기울어져있음을 간파해낼 수 있으리라. 아니 간파해내야 하리라.

* 이인미 (살림 지도위원, 여성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를 공부한 신학박사. 시민모임 <핵없는세상> 공동대표, 월간 새가정 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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