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배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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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배설물
  • 김기원
  • 승인 2020.07.13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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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서일과>

이사야 1:11-17, 마태오복음 10:34-11:1 (시편 50:7-15)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11: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분부하시고 나서 그 근방 여러 마을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그곳을 떠나셨다. (마태 10:34-11:1)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39절)

나뿐인 사람은 악마의 배설물을 핥는 사람이고, 나누고 주는 삶은 생명을 껴안는 삶이다. '나뿐'은 '나쁜'이고 '좋은'은 '주는'이다.

곳곳에서 물난리 소식이 들립니다.

큰 비, 센 바람, 산사태처럼

인간 능력의 한계를 뼈저리게 깨닫게 하는 자연의 위력 앞에서

우리는 겸손을 회복하곤 합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겸손의 극치를 이루지요.

허무가 아니라 진실을 대하는 가난을 경험합니다.

하여

죽음 앞에서 인간은 비로소 참된 삶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합니다.

덧없는 것들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닫는 통찰,

모든 인연들에게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피워내는 가난한 마음의 회복.

내 모든 것이 비워지는 죽음 앞에서 비로소 이것들이 확연하게 발생한다는 거지요.

오늘 주님은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물신숭배에 젖어있는 오늘의 세상을 향해 해석한다면

움켜쥐려하고 더 많이 취하려 하면 한없는 갈증과 쓸데없는 걱정에 허덕이게 되고,

비우고 내려놓아 내 것이라, 혹은 내 것이 될 것으로 착각하였던 것들을 하늘마음으로 보게 될 때면

삶의 아름다움에 비로소 눈 뜨게 된다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무절제한 탐욕을 ‘악마의 배설물’이라 칭하며 강도 높게 비판하고

“인간의 얼굴을 가진 경제모델”을 세우라고 촉구하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지금 사회의 시스템이 그 ‘악마의 배설물’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면

우리 모두 정녕 죽음 앞에 선 이의 심정으로 변혁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루시는 평화의 길은 칼질이요 불질입니다.

만만히 대하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그 배설물의 하수인이 되고 맙니다.

‘나쁜’의 우리말 어원은 ‘나뿐’이고

‘좋은’의 우리말 어원은 ‘주는’이라지요.

나뿐인 사람은 악마의 배설물을 핥는 사람입니다.

나누고 주는 삶은 생명을 껴안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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