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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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 백창욱
  • 승인 2020.07.1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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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20. 7. 12) 성령강림 후 여섯 번째 주일(창 25:19-34)

지난주 9일 밤,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습니다. 박원순 시장의 사망소식입니다.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의 명복을 빕니다. 알려진 바로는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게 결정적인 원인으로 보입니다. 박시장은 문제해결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습니다. 인생이 허망하다는 격언을 다시 새깁니다. 그는 인권변호사로, 시민사회 활동가로 한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였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서울시장 삼선까지 했습니다. 시장이 돼서도 권력 맛에 취하지 않고 약자보호와 삶의 질 향상을 뒷받침하는 행정을 펴서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런 공적에 힘입어 유력한 대권주자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끝이 비극적인 죽음이라니 말문이 막힙니다. 그리고 죽음의 사달이 성추행이라고 하니 더더욱 기가 막힙니다. 안희정, 오거돈 사례가 이미 반면교사가 됐고, 서울시에 젠더특별보좌관을 두기까지 했는데 본인이 그런 일에 가해자가 되다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박시장의 장례에 대해 sns에서는 시민들끼리 격론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일로 가장 큰 충격에 빠진 사람은 누굴까요? 가족임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족 못지않게 충격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고소한 피해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쁜 사람들은 피해자 신상추적, 이차가해를 서슴치 않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 사람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박시장 애도가 지나쳐서 엉뚱한 희생양을 찾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두 가지 교훈을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자살에 대해서입니다. 자살은 옳지 않습니다. 자살은 하나님이 바라는 방식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문제해결의 최종방식도 아닙니다. 
옛날에 어느 모임에서 겪은 일입니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노부부가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전에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며, 그 노부부의 행동을 극찬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 일이 박수 받을 일인지... 그 자식들, 지인들도 똑같이 생각하는지... 지금도 의아합니다. 자살이 만연한 현실입니다. 심지어 자살을 미화합니다. 그러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타인의 목숨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도 해당합니다. 부모가 자살할 때 어린 자식과 함께 죽은 것도 살인입니다. 부모도 자식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자신도 자기 목숨을 인위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자의로 태어나는 사람 없듯이, 자의로 죽는 것도 순리가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견뎌야 합니다. 인생은 단 맛만 있지 않습니다. 쓴 맛도 있습니다. 오히려 쓴 맛이 열 배 쯤 많습니다. 당장은 괴롭지만 세월이 약입니다. 세월이 약이 될 때까지 견디는 게 최선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 모욕과 수모를 겪을지라도 견디는 게 상책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사람이 인위적으로 목숨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 목숨은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을 만큼 고귀합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또 하나는 ‘인생 총량 법칙’입니다. 이 말을 들은 건 여러 군데입니다. 그만큼 경험칙의 교훈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사고치고, 대책이 없는 자식이 있어서 전전긍긍하는 부모가 있는데, 비슷한 일을 겪은 친구 왈, 지랄도 총량이 있다. 그 총량이 다 차면 좋아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 위로 받았다고 합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부모 속 썩이는 자식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세상에 출현해서 죽을 때까지 인생을 살아가는 자기 총량이 있습니다. 물론 부모의 총량에는 자식이 저지른 후과를 감당하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선하든 악하든 예외 없이 사람은 자신의 총량대로 살다 갑니다. 
그런데 그 총량의 끝은 아무도 모릅니다. 총량의 끝은 하나님만이 압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계획하는 것도 맹세하는 것도 지혜가 아닙니다. 전도유망한 박시장이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크게 볼 때는 자신의 총량이 여기까지 인 겁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하나님이 생명과 인생의 최종주관자이심을 기억하고 그 앞에 설 때를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읽다가 계속 머물게 한 대목이 있습니다. 19절이다. “다음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 이렇게 초간단하게 서술해도 되나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기까지 또 그 후에도 파란만장, 우여곡절이 얼마나 많나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그 모든 서사는 다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다는 말만 남깁니다. 아브라함이 이 대목을 봤으면 섭섭했을 게 틀림없습니다. 공적을 자랑하고픈 사람에게는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서술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삭이야기에서는 확연히 대조됩니다. 이삭과 관련해서는 시시콜콜 여러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무슨 뜻인가요? 이제 아브라함의 시대는 끝났고 이삭의 시대가 열렸다는 암시입니다. 아브라함은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이삭이 무대의 중심이 됩니다. 성서서술에도 이처럼 세상의 이치, 섭리가 냉정하고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이삭의 생애는 무난하고 평탄해 보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삭 역시 곡절이 많습니다. 마흔 살 때에 리브가와 혼인합니다. 고대 시대에 마흔 살이 되도록 혼인을 못했으면, 사람구실을 거의 못하고 살았다고 봐야 합니다. 또 임신을 하지 못하던 리브가가 쌍둥이를 낳을 때 이삭의 나이는 예순 살입니다. 이십년 동안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것 역시 이삭에게는 절망입니다. 후손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종말을 뜻합니다. 그러니 이삭은 결혼하고 아이를 얻은 게 모두 인간적 소망이 거의 끊어졌다가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입은 사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망상황이라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줍니다. 

또 하나는 맏아들 권리를 향한 야곱의 쟁탈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무언가를 부단히 시도합니다. 엄마 배속에서 나올 때부터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올 정도로 먼저 나오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합니다. 팥죽사건도 야곱의 지치지 않는 욕망의 일화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에서와 야곱의 갈등, 즉 모친 리브가 태중에서 두 아이가 서로 싸우는 것, 형과 아우가 된 게 아주 간발의 차이라는 것,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는 것, 야곱이 에서에게 맏아들 권리를 팥죽으로 산 것 등은 모두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문학 소재입니다. 창세기 작가는 실제 역사상 이스라엘과 에돔의 적대 관계를 경험하면서, 이스라엘 입장에서 그 기원을 설명합니다. 한 형제인 에서와 이삭이 어떻게 갈라지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차남 야곱이 장남의 입지에 서게 된 과정을 증거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 중, 에서가 야곱에게 맏아들의 권위를 빼앗긴 경위가 팥죽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맏아들의 권리를 판다고 맹세한 그의 섣부른 과오에 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언합니다. 에서의 후손들이 할 말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권리가 있습니다. 천부적인 권리가 있고 투쟁 끝에 쟁취한 민주주의 권리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권리는 거의 다 앞선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지난하게 투쟁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잃은 권리는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안락을 누리려고 에서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권리를 후퇴시키면 안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권리를 잃는 것은 간단하지만 다시 찾으려면 죽도록 싸워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짧은 안락을 누리려고 권리투쟁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권리 투쟁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일입니다. 자기 의로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기운으로 하십시오. 은총 안에 머무를 때, 권리도 지키고 사람도 온전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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