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은 바로 성소에서부터 시작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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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은 바로 성소에서부터 시작될 것
  • 김경호
  • 승인 2020.07.02 11: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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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강남향린 성서학당, 포로기 예언 7강. 성전파괴의 예언

간추린 내용 : 예레미야는 심판이 바로 성소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외친다. 그는 유다의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성전이 오히려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을 감지한다.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도리들은 하나님의 영역 밖으로 몰아내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들이 드리는 제의와 종교의식을 들어앉힌다. 그리고는 그 성전이 자기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안위한다.

예레미야는 당시 지배자들이 민중을 전쟁으로 몰아넣는 행위에 대해서 비판한다. 그는 개개인의 생명과 복지에 더 우선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민중을 전쟁터로 몰아내는 거짓으로 사람을 몰아치는 것은 예레미야에게 통하지 않았다. 유일한 도덕적 가치는 생명을 중시하는 데서 나온다. 생명이 핵심의 자리를 차지할 때라야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이 빛을 발한다. 예레미야에게 민중의 생명을 지켜나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신실한 신앙의 내용이었다.

예레미야는 정치권력인 왕들과 충돌했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종교권력인 성전 권위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는 심판이 바로 성소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외친다. 그는 유다의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성전이 오히려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을 감지한다. 그는 성전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키시고, 전쟁에서도 자기들의 안위와 방어를 보장할 것이라는 신념은 대중을 기만하는 것으로 봤다. 잘못된 신념은 유다의 뿌리 깊은 전통의 이름으로 암세포처럼 번져갔다.

사람들은 종교제의가 신께 드리는 기꺼운 예물이 되리라고 믿는다. 그들은 종교나 제의를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앉히고 자기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도리들은 하나님의 영역 밖으로 몰아내버린다. 그들은 재빨리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비용과 종교적 제의를 수행하는 비용을 계산하여 움직인다. 이런 영악한 계산은 종교 지도자들의 이해관계와 교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이 둘의 욕심이 합치게 되면 엉뚱한 우상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것은 결국 자신들의 계산적 이기심을 부추기고 확신하게 만든다. 이것은 이미 종교도, 신도 아니다.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이끌어온 가장 큰 적(敵)은 성전이며,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가장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전파하는 원흉도 성전이다. 마침내 예레미야는 성전 앞에 나아가 성전 파괴를 외친다.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곳에서 죄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 . 그런데도 너희는 지금 전혀 무익한 거짓말을 의지하고 있다. 너희는 모두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고,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긴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부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하고 말한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 내가 실로에서 한 것과 똑같이, 내 이름으로 불리며 너희가 의지하는 이 성전, 곧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에게 준 이 장소에, 내가 똑같이 하겠다... 너희도 내 앞에서 멀리 쫒아 버리겠다(7:4-15).

예레미야는 이런 백성들을 위하여 가장 단순하고 초보적인 활동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도 하지 말아야 한다(7:16). 잘못된 기도는 마치 하나님과 연결된 듯이 느끼게 하지만 사실은 백성들 스스로 자기 잘못을 외면하게 만든다. 종교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게 하는 가장 야만스럽고 뻔뻔한 장애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값비싼 제의들과 하나님께 드린 선물들이 하나님의 호의와 보호를 확실하게 보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런 물질적인 선물들이 아니라, 정의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사람들에게 덫을 놓아 넘어지게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떠벌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외치신다.

내가 너희에게 받고 싶은 것은 제사가 아니다. … 내가 허락할 터이니, 번제든 무슨 제사든 고기는 다 너희들이나 먹어라. 내가 너희 조상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왔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번제물이나 다른 어떤 희생제물을 바치라고 했더냐? 바치라고 명령이라도 했더냐? 오직 내가 명한 것은 나에게 순종하라는 것, 그러면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 (7:21-23).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아,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둘러보고 찾아보아라.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을
샅샅이 뒤져 보아라.
너희가 그 곳에서,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는다면,
내가 이 도성을 용서하겠다(예레미야 5:1).

예레미야의 내면적 고통

예레미야의 내면적 고통은 ‘예레미야의 고백’이라고 부르는 걸출한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흔히 예레미야를 ‘눈물의 예언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 고백들이 통렬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고백이라기보다는 호소, 불평에 가깝다(11:18-12:6, 15:10-11, 15-21, 17:14-18, 18:19-23, 20:7-18). 하나님 앞에 진실한 신앙을 찾아 고뇌하는 그의 모습은 처절하다. 모두가 잘못된 길을 가면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혹 친척이라고 하여 입에 달콤한 말을 할지라도 그들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된다.

주님, 내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 주께서 그들을, 나무를 심듯이 심으셨으므로, 뿌리를 내리고 자라며, 열매도 맺으나, 말로만 주님과 가까울 뿐, 속으로는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께서는 나를 아십니다. 주님은 나의 속을 들여다보시고, 나의 마음이 주님과 함께 있음을 감찰하여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바로 네 친척, 네 집안 식구가 너를 배신하고, 바로 그들이 네 뒤에서 소리를 질러 너를 욕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와도, 너는 그들을 믿지 말아라."(예레미야 12:1-6 중에서)

만군의 주 하나님, 저는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저에게 말씀을 주셨을 때에, 저는 그 말씀을 받아먹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저에게 기쁨이 되었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웃으며 떠들어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주께서 채우신 분노를 가득 안은 채로, 주의 손에 붙들려 외롭게 앉아 있습니다.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주께서는,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예레미야 15:16-18)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수많은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합니다. 저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 합니다.(에레미야 20:8-10)

예레미야의 고뇌의 질문에 하나님은 나무람으로 대답하신다.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해도 피곤하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네가 조용한 땅에서만 안전하게 살 수 있다면,
요단강의 창일한 물속에서는 어찌하겠느냐?(예레미야 12:5)

하나님은 비록 지금 고통스럽지만 보다 확실한 믿음의 토대에 설 것을 말한다. 진리에 대한 신념이 결국 이긴다는 것이다. 참된 힘은 겉으로 보이는 세력이나, 제왕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예언자 자신의 말이다. 그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된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예레미야 1:10).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나라를 지켜 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군대 조직이 아주 약한 나라가, 비록 많은 고통이 있었겠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반대로 아주 강한 군대와 재력을 가지고도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예도 많이 있다. 그러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한 나라가 지킬 만한 값어치를 가진 나라인가? 과연 지도자들은 백성 모두가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돌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온 국민이 마음으로 하나 될 수 있는 나라인가? 그 때 그 때 세상의 흐름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흔들림 없는 신념을 가진 나라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다.

시대 분위기를 거스르는 예레미야의 선포는 40년간 그를 외롭고 고독하고 버림받는 예언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옳은 것은 옳다는 신념과 야훼를 향한 강한 믿음은 그를 에워싸고 있는 죽음의 분위기를 삼켜버렸다.

예레미야는 여러 가지 상징행위로 유다가 결국은 회복할 것이라는 신념을 표현했다. 그는 힌놈 골짜기에 가서 오지병을 깨뜨리기도 하며, 장례식이나 결혼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앞으로는 죽은 자들을 위한 예식이 더는 불가능해지고 결혼식 잔치에서 누리는 기쁨의 기회도 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징 행동은 그의 신념을 강화시키며 ‘확실하게 보이는 언어’로 선포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친척이 잃어버릴 위기에 놓여있는 아나돗의 땅을 사들여 그 땅문서를 항아리에 밀봉해 묻어 놓는다(32장). 당시 바벨론 군사가 거기에 주둔해 있었고 땅을 사봤자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행위를 통해서 예레미야는 언젠가 그 땅이 다시 회복되는 날 묻힌 항아리가 다시 빛을 보게 될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친척의 잃어버린 땅을 되사주는 것은 이스라엘 평등사회의 친척 의무를 상징하는 법이다. 그가 초기 평등사회의 법을 항아리에 묻는 것은 그날이 오면 초기 평등사회의 법과 신앙이 다시 회복되고 야훼를 아는 지식이 넘치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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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철 2020-07-04 00:12:36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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