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꿈꾸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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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꿈꾸는 교회
  • 김경호
  • 승인 2020.06.29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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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7:1-10, 고전 6:19, 고후 6:16

주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의 성전 문에 서서, 주를 경배하려고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유다 사람에게 주의 말씀을 큰소리로 일러주라고 하셨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의 모든 생활과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이 곳에서 너희와 함께 머물러 살겠다. '이것이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 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내가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 하도록 준 이 땅, 바로 이 곳에서 너희가 머물러 살도록 하겠다. 그런데도 너희는 지금 전혀 무익한 거짓말을 의지하고 있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 하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예레미야 7:1-10)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여러분 안에 모시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9)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고린도후서 6:16)

오늘은 좀 특별한 설교를 하겠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벌써 여러주간 여러분들을 뵙지 못했습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 33년간 목회를 하면서 주일 예배를 멈추어본 일이 없고, 더군다나 이렇게 긴 기간 동안 가정예배로 대신할 줄은 몰랐습니다. 창립기념일 즈음에 다시 모여 헌당예배를 계기로 힘을 모아가려고 했는데 또 다시 코로나 19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당회에서는 코로나 19가 웬만한 수준에서 통제되고 있으며, 거의 일상화되어 완전 종식되기는 힘들어 보이니 7월부터는 방역 수칙을 철저하게 지켜서 다시 예배를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설레임을 가지고 목회서신을 대신하는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지난 2007년도 11월 마지막 주일을 기억하십니까? 들꽃향린교회가 창립 3주년을 맞아 교우들 모두가 강남향린교회로 와서 연합예배를 드렸습니다. 분가 3년 만에 들꽃향린교회가 완전히 자립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분가 선교의 성취를 감사드리는 연합예배를 모교회인 강남향린교회당에 와서 감사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간 두 교회 모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예배 시작 전에 1, 2층을 가득 메웠고 마음은 벅차올랐습니다. 이미 예배 시작 전에 여기저기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흐느끼는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벅찬 감격으로 온 교우들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예배야 말로 참으로 진정한 예배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런 감동의 예배를 몇 차례 드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신앙생활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 예배를 통해 양 교회 모두가 그동안의 불안감과 위축되었던 마음을 일소하고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했습니다. 두 교회 모두 합하면 분가(분립개척) 당시보다 예산도 두 배요, 교인 숫자로도 분가이전 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모였습니다. 이로써 분가가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두 교회에 여러 가지 부침(浮沈)이 있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같은 생각입니다. 만약 분가를 하지 않고 강남향린교회만 존재했더라면 그동안 두 교회가 이루어낸 것보다 더 큰 역할을 감당했으리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제가 강남향린교회를 다시 온 것은 강남향린이 처한 어려움을 돌파하는데 힘이 되려는 생각에서 입니다. 강남향린, 들꽃향린은 제 삶이고 인생의 전부입니다. 제가 강남향린에 다시 온지도 벌써 2년이 되어갑니다. 이런 저런 외부적 방해들로 인해 이제 겨우 예배 처소를 마련한 셈입니다. 제가 그냥 목표 없이 강남향린에 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남은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하기도 합니다. 저는 강남향린교회가 처음 꿈꾸던 목회와 선교를 이어가고 교회의 규모도 회복해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2004년에 분가선교를 할 때, 많은 분들이 우려하였습니다. 몇몇 가정은 분가선교 이전에 교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작은 교회가 그나마 분가하면 두 교회가 다 망하는 것 아니냐는 염려, 목사 장로임기제에 대한 염려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강남향린과 들꽃향린 두 교회가 모두 창립 이래 가장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기우가 승리하느냐 우리가 세웠던 거룩한 뜻들이 승리하느냐는 역시 오늘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선택입니다.

강남향린과 우리가 분가한 들꽃향린이 거두는 열매는 단지 물리적인 숫자로 셈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향린에서 강남향린이 분가한 것이나, 강남향린에서 들꽃향린이 분가한 것은 교회 성장주의를 거스르는 일대 사건이었기에 교회에 큰 변화의 모델이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를 변화시킬 싹이었습니다. 단지 교회의 물리적 변화를 넘어서서 질적으로 변할 수 있는 조그마한 그루터기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 성전 설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랜 순례행진 끝에 마침내 성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감격에 넘쳐서 땅에 입 맞추며 “이것이 하나님의 성전이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찬물을 끼얹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예레미야 7:4)

예레미야는 순례의 마지막 지점인 성전에 다다라 감격하는 사람들에게 “속이는 말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며, “참다운 성전은 무엇인가?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 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로의 성전이 무너진 것처럼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져 내리리라”고 경고합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신학은 무엇입니까? 우리 시대가 당하고 있는 아픔을 해석하고 올바른 방향의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아픔을 느끼지 않으면 신학은 소설이 되고, 설교는 독백이 됩니다. 세상이 겪는 아픔과 무관한 신학과 설교는 그들이 아무리 학문적이고 아름다운 말들을 나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르시시즘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그 시대에 대해서,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아니오”를 말해야 합니다. 교회는 자체로서의 완성품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설명하신 하나님 나라 그 자체일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종말에 이를 때까지 중간시대를 살아가는 전략으로 선택된 곳입니다. 마치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대신한 것처럼 자기 자신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자기 완결적 구조에 머물러 교회 자체를 위한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동안 서구사회를 온통 지배했던 서구 교회는 현재 텅텅 비어 있습니다. 웅장하게 지은 교회당들은 관광객들이 구경거리로 삼는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2년에 한 번, 일주일씩 계속하는 ‘교회의 날’이라는 큰 행사를 합니다. 이 때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운집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젊은이들이 종교를 버린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득권에 안주하며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기성교회를 거부하거나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교회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공격적으로 전도해도 한국 교회의 절대 기독교 인구는 이미 줄고 있습니다. 더욱이 젊은 세대들이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역사 속에서 자기의 몫을 감당한다면, 어느 날 광화문에 수십만의 인파가 촛불을 켜들고 모여든 것처럼 떠나갔던 젊은이들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순수하게 역사의 제물이 될 각오로 십자가를 지고 순교하고자 한다면 그때라야 비로소 부활의 기쁨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교회를 이루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고린도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여러분 안에 모시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9)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고린도후서 6:16)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할 때 무조건 기뻐하기에는 두렵고 떨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며(임마누엘의 신앙),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오랫동안 꿈꿔온 신앙의 이상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분께서 우리들 가운데 함께 계신 것을 넘어서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이라고 합니다.

‘안됩니다. 하나님,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당신 거하시는 전이됩니까? 당치 않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몇 번씩이나 나 자신을 대면해 봅니다. 요나와 같이 도망가고 싶고, 피하고 싶습니다. 도망가서 대면하지 않으면 이런 저런 일에 마음 쓸 일 없이 오히려 편하게 지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레던 마음은 무엇입니까? 한 때 꿈꾸던 이상적인 신앙인에 대한 꿈은 무엇이고, 우리가 세우고 싶던 교회에 대한 꿈은 무엇입니까? 그 모든 꿈들을 책갈피 속에 묻어둔 채 우리는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그 때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면 나는 온전합니까? 하나님이 내게 안보이면 그곳이 파라다이스가 됩니까? 그것은 단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분에게서 도망가서 편하게 지날 수 없다면 적당히 하지 맙시다. 최선을 다합시다. 다시 마음을 모아 봅시다. 나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중심에 모십시다. 나를 세우기 위해 모이고 수근수근 할 것이라,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해 눈물로 기도해 봅시다. 우리가 죽고 우리 안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전이고, 이곳은 우리가 지켜야할 하나님의 전이 될 것입니다. ‘보기에 번지르르 한 성전’이 아니고 먼저 자기 욕심을 관철하려는 아우성들이 하나님 앞에 무너져 내리고 우리들 중심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만을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앙인의 진실은 오직 그것 하나면 됩니다. 우리가 한치 앞의 일을 예견할 수는 없지만, 오직 하나님 앞에 진실할 수 있다면 그 진실함이 모든 것을 이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내드려 그 분께서 거하실 수 있다면 우리 앞에 어떤 일이든지 직면하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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