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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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볼 수 있었다
  • 백창욱
  • 승인 2020.06.2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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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20. 6. 28) 성령강림 후 네 번째 주일(창 22:1-14)

사람은 인생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좋은 일, 기쁜 일, 슬픈 일, 괴로운 일의 연속입니다. 공교로운 것은 같은 사람이 또는 같은 사건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기쁨과 고통을 번갈아 안겨준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동지였는데, 시간이 지나서는 차라리 안 만났으면 하는 관계로 돌변하는 일도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기쁜 일이 뒤에 가서는 고통스런 일로 뒤바뀌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슬픈 일이었는데 그 덕에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새옹지마라는 유명한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덮치는 시련이나 곤경의 특징이 있습니다. 존재의 핵심이 위기로 다가온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가장 자신하는 것이라거나, 든든하거나 자랑거리이거나 자신을 늘 기쁘게 하거나, 한마디로 ‘그거 없으면 시체다’ 라고 할 만한 것이 어느 날 자신을 비통에 빠뜨립니다. 인생에서 가장 심오한 역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숫양의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13절)는 대목을 보자니 대번 압살롬이 떠올랐습니다. 압살롬도 숫양과 똑같은 양상이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어쩌다가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쳤다.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있었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의 울창한 가지 밑으로 달려갈 때에, 그의 머리채가 상수리나무에 휘감기는 바람에, 그는 공중에 매달리고, 그가 타고 가던 노새는 빠져나갔다.”(삼하 18:9) 압살롬의 머리숱은 온 나라에 화제일 만큼 명예의 상징이지만 결국 그 머리숱 때문에 목숨을 잃습니다. 이런 사례는 무궁무진합니다. 인생 자체가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릅니다. 우리가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바로 성서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창 12장부터 아브라함이 무대에 등장해서 22장까지 진행합니다. 23장부터는 무대 주인공이 이삭으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무대 마지막에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런 역설을 만나게 합니다. 한없는 복을 주신 분이 이제는 한없는 고통을 안겨줍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을 때만 해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 사라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여야 했습니다.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사래는 대신 하갈을 아내로 주어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의 투기 때문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야 했습니다. 보다시피 대를 이을 자식으로 이삭을 얻기까지 많은 풍파를 겪었습니다. 이삭은 최종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삭이 시험대에 오른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에서 ‘이런 일’은 앞에서 일어난 아브라함의 인생여정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청천벽력같은 말씀을 내립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할 일을 에둘러 말씀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지시합니다. 이 대목은 성서에서 하나님이 그의 자녀에게 내리는 지시 중 가장 무지막지하고 인정사정없는 명령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지시가 왔다면, 우리는 어떡할까요? 질문조차 의미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급이 안 됩니다. 
이 순간부터 아브라함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사람이 됐습니다.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닥쳤을까... 이삭은 아브라함 생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러나 그 이삭도 하나님 아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 교훈을 극적인 드라마로 서술합니다. 

본문은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침묵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그 부름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하나님이 나타나서 계시한 것인가 아니면 아브라함 안에서 들여오는 소리인가. 아니면 꿈에 나타난 것인가. 그것이 악마의 유혹이나 착각이나 정신착란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러나 성서는 이런 중요한 궁금증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성서 본문에서 침묵을 깨고 등장하는 대사는 오직 번제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또 침묵과 관련하여 이런 관점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아브라함 중심이어서 다른 사람의 심경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현장에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삭입니다. 이삭은 어땠을까요? 이 때 이삭은 어린애가 아닙니다. 6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웠다.” 이 장면을 보면, 이삭은 등짐을 지고 먼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나이입니다. 화가 렘브람트가 창 22장에 대해 여러 그림을 그렸는데, 거기에서 이삭은 청소년 정도 됩니다. 즉 알 거 다 아는 나이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번제물로 바치려 한 일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한 주석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만족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정도 받았고, 앞으로 올 위대한 나라에 대한 재확인도 받았고, 결국은 아들을 희생시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잘 끝나고 집안에서는 많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삭은 그 충격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그는 일어서면 비틀거리고 아비를 보기만 해도 욕지기가 나곤 하였다. 그는 한평생 영혼에 상처를 입었다.” 또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사라는 어땠을까요. 사라는 기절했다가 한참 뒤에 깨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 일로 남편을 타박했을 게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그게 식구들에게도 다 좋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성서는 열려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독자의 문화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긴 침묵 끝에 아브라함의 심경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4절입니다.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이 사흘은 죽음의 사흘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명령을 들었을 때의 경악, 길을 가며 느낀 비통, 걸음을 되돌리고 싶은 유혹, 아이의 공포 등이 침묵 속에 숨어 있습니다.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은 어둠입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고개를 들었다’는 말은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해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것처럼, 아브라함도 죽음의 사흘을 보내고 다시 일어났다는 암시를 줍니다. 아브라함은 사흘 동안 숱한 번민 속에 살아온 길을 반추했습니다. 지나온 날들 중에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섭리하셨나에 대해 되새겼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온전히 따르기로 했습니다. 4절은 하나님의 지시에 순명하기로 결정한 아브라함의 정서를 보여줍니다.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사흘 동안 두려움에 사로잡혀 차마 바라볼 수 없는 산이었지만, 이제는 똑바로 바라봅니다. 결심이 섰다는 뜻입니다. 

우리 역시 인생에서 결정적으로 또는 수없이 반복하여 시련과 위기를 만납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하면 좋은가요. 아브라함의 처신이 한 교훈이 됩니다. 그의 태도에서 주목할 게 있습니다. 2절과 3절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는 2절과 아브라함의 행동을 말하는 3절 사이에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단지 아브라함은 침묵 속에 하나님의 명령을 즉각 실행합니다. 구물거리거나 앓아눕지 않습니다. 안장을 얹는 일, 장작을 쪼개는 일 모두 종이 할 일이지만, 자신이 직접 합니다. 머리가 괴로울 때는 몸을 쓰는 게 좋습니다. 

매우 하기 힘든 일을 마주할 때, 그 무게의 짐에 못 이겨서 주저앉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 몰라라 잠수 타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알아서 하겠지 하고 떠미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자신을 포함하여 사회에서 교회에서 인생에서 그런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20대 일이 생각납니다. 의식이 깨치고 얼마 안 됐을 때, 관악구 봉천동 철거민 사정을 알게 됐습니다. 친구와 함께 한 단체를 찾아갔습니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으로 기억합니다. 그곳에서 만난 실무자는 앞으로 닥칠 일들, 우리가 할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생전 처음 듣는 어마어마한 이야기였습니다. 점점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철거민의 딱한 사정 때문에 덤볐다가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만 궁리했습니다. 그 뒤 실무자와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나가지 않았습니다. 도망친 것입니다. 사람마다 감당할만한 급이 있습니다. 지나서나서 보니까 그 때 들은 말들은 제가 나중에 분쟁현장에서 겪은 일들이었습니다. 

최선은 무엇인가요? 침묵 속에 견디는 것입니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도 참극을 견디는 사람들로 인해 오늘까지 왔습니다. 극한상황에서도 야훼이레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극한상황에서 야훼이레를 전혀 모르고 자기 일을 했습니다. 침묵의 순명 덕에 남들은 범접 못하는 신앙의 경지를 맛보았습니다.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과 역경은 또 다른 성숙의 기회입니다. 잘 견뎌서 주님의 실재와 더 가까워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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