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다
상태바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다
  • 백창욱
  • 승인 2020.06.22 16: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일설교문(20. 6. 21) 성령강림 후 세 번째 주일

 마태 10:24-39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다”

설교본문을 정하면 우선 삼년 전 설교문을 봅니다. 교회력이 삼년주기로 오므로. 참고할게 있나 해서. 그런데 거의 참고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대로지만, 삼년이라는 세월동안 상황이 크게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제 설교문을 보면, 큰 특징이  있습니다. 성서본문 자체를 주해하는 데 할애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아내한테 왜 설교를 성경공부처럼 하느냐고 핀잔받기도 했습니다. 성서주해에 열을 내는 만큼 오늘 우리 상황에는 늘 상대적으로 소홀했습니다. 제 자신 그런 문제점을 느껴서 요즘은 성서주해 자체 보다는 본문의 핵심 주제만 잡아서 오늘 우리와 연관짓는 방향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서를 대면하는 데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처음 예수사건입니다. 기원후 30년경 팔레스타인 땅을 거닐던 예수가 행한 행동과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서의 기원이자 첫 단계입니다. 

둘째는 복음서를 기록하는 단계입니다. 마태의 경우, 80년대에 처음 예수사건을 기록했습니다. 시간상 오십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복음서를 처음 예수사건만 곧이곧대로 쓸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억도 전승도 완벽하게 보존하기 어렵고, 또 여기에는 필시 자기들 상황이 끼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서는 두 번째 단계에서 기록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사건을 가지고 말하지만, 자세히 보면, 내용은 거의 다 자기들 상황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독자가 복음서를 읽는 단계입니다. 오늘 우리 경우입니다. 우리는 일 단계와 이 단계를 다 의식하면서 오늘 우리 상황에서 복음서를 대면합니다. 사실 이 세 번째 단계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세기 상황도 일 단계와 이 단계가 다르고, 또 오늘 우리 상황도 그때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담겨 있는 일 단계와 이 단계를 소화해서 오늘 우리에게 적용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가 열쇠입니다. 

오늘 본문도 일 단계와 이 단계가 섞여 있습니다. 처음 예수 사건과 복음서를 기록하는 시대상황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박해상황을 말합니다. 이 박해상황은 언제 사건인가요? 이 단계 사건입니다. 처음 예수사건 때가 아니고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 일어나는 일을 말한다. 내용을 보면 구체적입니  다. 이런 구체적인 서술은 자신들의 경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볼 때 복음서를 기록하는 목적 중 하나는 지금 우리가 겪는 환난을 복음으로 극복하기 위한 고백과 결단도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닥친 환난을 견디자는 뜻입니다.

예수의 후예들이 당하는 박해상황은 전통과 문화를 송두리째 부정할 정도로 극심합니다. 예를 들면, 바알세불의 식구라는 불명예를 당합니다.(25절, 바알은 야웨와 늘 대적관계에 있는 신이다.) 목숨을 잃습니다.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라”(28절) 십자가 밟기 같은 시험을 당합니다.(엔도 슈샤꾸의 소설 “침묵”) 대중 앞에서 예수에 대해 믿을지 안 믿을지를 선언하라고 강요당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를 부인하면”(32, 33절) 예수를 따르는 일은 기존질서와 극심한 갈등과 대립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예수는 말씀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평화 대신 칼이라니! 이런 극단적인 말씀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요? 이 단계 사람들의 믿음이 유대교 전통, 가치, 문화와 대립 쪼개짐 분열을 가져다주었기에 나온 은유입니다. 예수의 입을 빌어 말하지만 실제 그들 경험의 소산입니다.

이 극단적인 갈등과 대립의 절정은 가족 안에서 일어납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36절)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라 시어머니와 극한 대립을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싶지만 가족끼리도 얼마든지 원수가 됩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돈 때문에 가족끼리 원수 되는 건 흔하듯이, 일세기 사람들도 식구가 전통과 충돌하면 오히려 식구이기 때문에 원수 되기가 더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일은 예수가 자기 십자가를 졌듯이, 나도 내 십자가를 져야 하고, 예수를 따름은 목숨 잃을 각오를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상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복음을 대면하는 우리 삼 단계 사정은 어떤가요? 이 단계 시대상황에 공감하나요? 우리도 예수 믿는 일로 목숨을 거나요?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하나요? 사람들 앞에서 너 예수 믿어 안 믿어 하고 공개적으로 양심고백을 강제 당하나요? 집안 식구끼리 원수가 되나요? 타종교 문화권에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이런 일을 겪는다는 소식을 종종 듣습니다. 우리도 과거 기독교가 소수고 비주류였을 때는 집안마다 이런 일이 흔하게 있었습니다. 정말 자기 일생을 걸고 결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이 일이 지금 여기 우리 상황은 아닙니다. 

헌법은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합니다.(그러나 권력에 따라 양심(사상)의 자유는 보장하지 않는다.) 권력의 불의에 저항할 경우, 권력의 탄압을 받지만, 형식상 종교 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주일에 교회 안 가도 잡혀가지 않습니다. 교인들도 목숨 걸고 교회 오는 건 아닙니다. 지금은 다른 일이 없어야 교회 옵니다. 정말이지 유대교 안식일 같으면 진즉에 돌 맞아 죽었습니다. 미국 개척시대 청교도 문화에서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 옛날이야기입니다. 더더욱 코로나는 우리의 예배관념을 새롭게 했습니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신앙문화도 대폭 바뀌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본문 같은 박해상황은 우리와 별로 무관하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떤 위기도, 박해도 끝난 호시절을 사는가요? 
요즘 작은 모임을 하는데, 스퐁 감독의 『영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라는 책을 읽고 소감을 나눕니다. 지난 주 공부한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큰 제목은 11장 ‘유치한 짓 그만두기: 종교의 죽음’ 입니다. 내용은 갈릴레오와 뉴톤, 다윈의 과학이 종교(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쭉 서술한 후, 이렇게 요약합니다. “갈릴레오가 하나님을 노숙자로 만들었다면, 뉴턴은 하나님을 실업자로 만들었다. 우리가 한때는 초자연적 하나님과 하나님의 권능에 돌렸던 일들을 뉴턴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없어도 설명해내었다. 그리고 나서 다윈은 종교에 세 번째 과학적 대타격을 가했다. 다윈 이전에는 인간의 자기이해는 천사보다 약간 못한 존재였다. 그러나 다윈의 등장이후 우리는 인간이 원숭이보다 조금 나은 존재라는 이해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 문제와 질문은 분명하다. 그럼 우리는 여기에서 여기로 가야 하나? 어떤 사람들은 근본주의자가 됐다. 다른 한편, 근본주의자들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은 간단히 종교를 떠난다. 소위 ‘교회졸업 동창생들’이 생기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들도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그리워하지만, 점점 그 상실감이 쇠퇴하고 종교 없는 세상에서 종교 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 이제 우리는 종교탐구의 새로운 시발점을 찾아야만 한다. 나는 종교를 떠나 하나님을 찾고자 한다.” 저자의 서술을 압축, 소개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혼자만 알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적어도 이런 내용이 교회 밖 담론이라는 것, 우리는 교회 밖 담론이 신앙을 위협한다고 해서 외면하고 안주할 게 아니라는 것, 괴롭고 불편하더라도 이런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하고, 답이 안 보인다고 해서 신앙을 버리거나 좌절하거나 주저앉거나 할 게 아니고 새로운 길을 찾는 노력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일세기처럼 목숨과 존재가 위협당하는 박해는 아니더라도 오늘날도 역시 똑같은 비중으로 신앙은 무신과 불신이라는 위기와 도전에 직면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마지막 의지처는 무엇인가요?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 우리의 스승 예수는 어떤 분인가요? 예수는 일생을 반대에 직면한 사람입니다. 스승 예수도 박해 박고 십자가에서 죽임 당했으나 부활하시어, 민중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박해자인 지상권력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하신 분입니다. 평범한 사람의 아들이었으나 치열한 탐구 끝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길을 먼저 겪으신 분이 내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보고 따르면 됩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