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광로 한반도와 선교사의 지적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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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광로 한반도와 선교사의 지적수준
  • 김홍한
  • 승인 2020.06.2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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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의 이야기 둘

이야기 하나, 용광로 한반도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간다. 4월 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유격대에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5월 7일에는 독일이 항복했다. 태평양전쟁에서는 일본의 패배가 가시화되고 있었건만 일제에 의하여 혹독한 시련을 당하고 있는 우리는 감히 일본의 패배를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전쟁의 막바지까지도 일본은 우리에 대한 고삐를 늦추기는 고사하고 더욱 강하게 조여왔다.

8월 6일,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더니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함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게다가 8월 8일에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한 상태였다.

8.15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우리에게는 해방이 왔다. 해방 이후 정부 수립까지 만 3년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해방공간”이라고 한다. 해방이 도둑같이 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던 이들이 있었으니 여운형중심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였다.
건준은 빠르고 광범위하게 조직을 확대하였고 질서를 회복하여나갔다. 그러나 미국은 건준을 인정할 수 없었다. 건준 뿐만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도 인정할 수 없었다.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군들도 인정할 수 없었다. 미국은 해방자로 온 것이 아니라 점령자로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군은 친일 행위가 명백한 한국인 관리와 경찰을 그대로 등용함은 물론 일본관리 까지도 상당기간 그대로 근무케 했다. 친일 경찰들은 오히려 승진하여 일본 경찰간부들이 물러간 자리를 채웠다.

건준이 탄압받고 있는 상황에서 9월 16일 조병옥과 김성수, 송진우 등은 우익을 통합하여 한민당(대표/ 송진우)을 결성했다. 한민당에는 친일파가 많았고 부르주아와 지주세력을 대표하였다. 한민당은 미군의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경찰의 핵심을 장악했다. 경무국장에 조병옥, 수도경찰청장에 장택상이 임명되었다.

1945년 연말 기가막힌 역사왜곡 사건이 발생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한 왜곡보도다. 신탁통치에 대하여는 미국이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동아일보는 조선의 신탁통치에 대하여 소련이 주장하고 있다는 주장과 보도를 했다. 국내 여론은 급속히 반탁운동에 들어갔고 소련과 좌익의 입지는 많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공산당은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한다고 하면서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좌익은 매국노요 민족반역자로 취급되었으며 오히려 친일파들은 애국자로 둔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유야 어쨌든 공산당이 신탁통치에 찬성으로 돌아선 것은 민족의 열망과 정서에 어긋나는 처사였으며 공산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적지 않았다.

해방공간에서의 민중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미 군정은 일본인 소유의 토지와 적산을 공정히 분배하지 않고 일부 친미적 자본가들에게 전부 넘겨 버렸다. 소작율도 인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다. 곳곳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 군정은 식량의 자유매매와 자유곡가제를 실시하였다. 그러자 쌀값이 폭등하였다. 당황한 미군정은 46년 2월에 ‘미곡 수집령”으로 배급제을 실시하고 미곡 불법 운반과 자유 매매를 금지하였다. 배급이 제대로 안 되는 상태에서 불법으로나마 유통되던 쌀도 사라지자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그것이 이1946년 10월 대구에서 민중항쟁으로 터졌다. 참고로 항쟁의 중심 역할을 했던 경상북도 인민위원회의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이재복목사와 최문식목사였다.

해방공간은 용광로였다. 대구에서의 기민항쟁, 제주에서의 4.3항쟁, 여수와 순천에서의 군인봉기, 좌우의 극심한 대립, 그 혼란 중에 거침없는 정적 암살과 테러 등이 끊임이 없었다.

이야기 둘, 선교사의 지적수준은 어땠을까

中華(중화)의 나라 중국, 참으로 오만한 나라다. 중국은 자신들만 문명의 나라이고 주변의 나라들을 모두 오랑캐로 멸시했다. 비록 힘으로는 오랑캐들에게 밀려 그들의 지배를 받는다 하더라도 문화만큼은 그들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 중국이 심각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서양인들의 과학기술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1629년 6월 21일 중국에 일식이 있었다. 명나라 조정의 역관들은 10시30분 시작하여 2시간 동안 일식이 있을 것을 예측했지만 예수회 신부들은 11시 30분 시작하여 2분 동안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런데 예수회 신부들의 예측이 맞았다. 명나라 조정을 비롯하여 명나라의 지식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오랑캐라 무시했던 이들이 천문을 정확히 읽은 것이다. 다른 자질구레한 학문이 아닌 하늘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천문학에서 중국이 서양에 뒤졌다는 것은 교황이 중국의 천자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의 능력을 인정한 명 조정은 예수회 신부들에게 역서의 개정 작업을 맡겼다. 

  "여기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서양선교사들이 일식을 정확히 예측해 냈다는 것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은 선교사일 뿐 아니라 매우 탁월한 학자들이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마태오 리치는 중국의 고위인사들에게 천문학과 지리학과 수학을 가르쳤다.

<천주실의>를 저작하였고 <곤여만국전도>라는 세계지도를 만들었다. 그 지도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은 이세계의 일부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중국인들에게는 그것도 충격이었다. 마태오 리치의 뒤를 이가 독일 출신 선교사 아담 샬이다. 훗날 청나라에 볼모로 붙잡혀있던 소현세자가 만난 것으로 우리에게 알려져있는 사람이다. 그는 천문학에 뛰어났다. 아마도 위에서 말한 일식예측의 장본인일 것이다.

예수회에서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중국선교사로 보낸 것이다. 중국을 그만큼 높은 문화의 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훗날 우리나라에 온 천주교신부들도 훌륭한 사람들이었겠지만 마태오 리치나 아담 샬에 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개신교의 경우는 어떠할까?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경우 미국에서 신학교를 갓 졸업한 20대 초반의 어린나이에 우리 땅을 밟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자연과학이나 인문학적 소양이 적었다. 신학적 깊이도 일천한 미국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근본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지적 수준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지적 수준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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