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기 예언 4강 위기를 뚫는 역동적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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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기 예언 4강 위기를 뚫는 역동적 신학
  • 김경호
  • 승인 2020.06.20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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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강남향린 성서학당

신명기 역사가의 신학적 통찰

간추린 내용 : 신명기부터 연속적으로 나오는 여덟 권의 책(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은 '신명기 역사서'라고 불렀다. 야기서 다루는 역사는 출애굽부터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전체 역사를 다루지만  어느 시대를 다루건 그 안에는 포로기의 위기 상황이 스며있다. 나라가 사라질 위기가 아니면 성서 집필도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신명기역사의 특징과 사가의 심오한 역사관 그가 위기의 민족에게 제시한 위대한 신학을 살펴본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에 하나님 앞에 봉헌기도를 올리는 감동적인 기도문이 열왕기상 8장 22절부터 53절까지 나온다. 상당히 긴 기도문인데 다윗이 이루지 못한 성전 건축의 꿈을 아들이 이루고 마침내 하나님께 봉헌하는 기도이니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기도문에 상당히 어색한 내용들이 나온다.

“이 백성이 주님께 죄를 지어서, 주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들을 원수에게 넘겨주시게 될 때에, 멀든지 가깝든지, 백성들이 원수의 땅으로 사로잡혀 가더라도 … 그들을 사로잡아 간 사람들 앞에서도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하셔서, 사로잡아 간 사람들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여 주십시오(46-50절).”

경사스런 민족 축제에서, 성전을 봉헌하는 감격스러운 예배에서 무슨 어울리지 않는 기도란 말인가? 이는 마치 결혼식에서 주례자가 “오늘 결혼하는 이들이 만약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아들은 엄마가, 딸은 아빠가 나누어 돌보게 하시고 재산은 반씩 공정하게 나누게 하시고......”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

이런 어울리지 않는 본문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마르틴 노트(M. North)는 신명기부터 연속적으로 나오는 여덟 권의 책(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이 모두 단일한 역사의 기록이라고 하며 이를 '신명기 역사서'라고 불렀다.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고 포로 신세가 됐을 때, 신명기의 신학과 정신에 따라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반성적으로 회고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역사에 토대가 되는 것은 포로기의 위기 상황이며 그에 대한 절박함이 반영된다. 심지어는 매우 감격스러운 경축의식인 솔로몬의 성전봉헌식에까지도 집필자들 자신이 처한 포로기의 위기 상황이 반영된다.

앞서서 이스라엘의  모든 문서에는 그 시대의 위기가 배어있고 깊이 착색되어 있다고 했는데, 심지어 성전을 봉헌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늘 우리가 대하는 모든 전승에서 식민지 시대의 위기감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마르틴 노트는 그의 저서 『신명기적 역사』(Martin Noth, The Deuteronomic History, Sheffield, 1981)에서 솔로몬의 봉헌기도를 분석하면서, 여기에 언급한 성전 역할에 대해 주목한다. 여기서는 성전이 “기도를 들어주고”, “야훼의 이름을 두는 곳”(열왕기상 8:28-30), “땅 위의 모든 백성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주님을 경외하고 …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곳”(8:43)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래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 봉헌기도에서는 희생제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왜 그럴까? 이것은 이미 이 기도문을 쓸 때 예루살렘 성전은 폐허가 되었고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성기에 제사를 드리고 떠들썩하던 성전의 모습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성전은 단지 “그 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곳”, 또는 “야훼의 이름을 두는 곳”이라고만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신명기 역사서는 비극으로 끝나는 역사이다. 모세로부터 유다의 멸망까지를 다루는 대 역사의 기록이라면 그래도 무언가 그 민족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해피엔딩이거나, 워낙 멸망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기에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희망을 제시해야 하는데, 예루살렘의 멸망과 파괴, 유다백성이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것, 그리고 바벨론의 총독이 부임하는 것 등 아주 절망적인 결말로 민족의 대 서사시를 마감하고 있다.

끝에 여호야긴의 석방 이야기가 약간 언급됨으로 해서 앞으로 이스라엘의 운명이 회복될 것을 암시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바꾸지는 못한다. 역사를 움직일만한 어떤 희망과 관련될 만한 일이 아니고 단지 포로지에서 옛 왕이었던 한 인물이 억류상태에서 풀려나게 되었다는 에피소드성 기사에 불과하다. 신명기 역사가는 왜 이렇게 비극으로 역사를 마감하였는가?

신명기 역사가는 무너진 성전이 오히려 더 강하게 야훼 하나님의 위대함을 증거한다고 보았다. 이제까지 모든 신은 자기 민족을 무조건 감싸는 민족신에 불과하다. 민족마다 자기 신의 이름을 앞세워서 전쟁을 수행한다. 각 민족들 사이의 전쟁은 그들이 섬기는 수호신들의 전쟁이기도 하다. 민족신들은 암탉이 자기 병아리를 감싸듯이 무조건 자기 백성을 감싸고돌았다. 그러나 사정이 바뀌었다. 바벨론이 세계를 정복하면서 이제 세계는 국제화 시대가 되었다. 각 나라에서 잡혀온 백성들은 여러 민족들이 가졌던 신들도 서로 비교하였다. 무조건 자기 민족을 감싸고도는 민족신은 변화된 국제사회에서 식상한 개념이며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신명기 역사가는 야훼 하나님의 개념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야훼 하나님은 자기 민족이라고 무조건적으로 감싸는 신이 아니고 법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자기 민족, 자기 자식까지도 정의에서 벗어났을 때는 가차 없이 심판하고 법대로 판단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민족은 무너진 성전을 보고 법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이신 야훼의 우수성을 알게 된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은 처참한 모습은 오히려 수호신을 뛰어넘는 야훼 하나님의 높은 섭리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비극으로 끝나는 역사, 무너진 성전과 포로로 잡혀간 백성, 폐허가 된 예루살렘이야말로 더없이 야훼의 참 하나님다움을 증거하는 표징이다. 이러한 역설은 신명기 역사가가 그 시대에 던지는 감동적인 신학적 구상이다.

코흐는 신명기의 제의 중앙화는 일상생활의 세속화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신명기가 성전을 “하나님의 이름을 두는 곳”이라고 하는 것은 거룩한 영역을 세속화한 것이라고 본다. 신명기는 지방 성소를 폐지하고 중앙성소로 단일화했을 뿐만 아니라, 야훼께서 고르신 그 한 곳 조차도 더 이상 야훼의 거룩함으로 가득 찬 장소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단지 야훼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간주되었다(신명기 12:21).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말씀과 언어를 통해서만 그곳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의 참된 실존은 하늘에 속한 것이어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으며 특정한 장소에 묶어두지 않는다. 또한 당시 희생 제물로 이해되던 짐승을 죽이는 행위 역시, 이제 정함과 부정의 영역에서 벗어나 특정한 곳이 아니고 성읍 어디서나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다(신명기 12:15). 정해진 장소에서 드려야 했던 십일조도 삼 년째 되는 해에는 마을과 부락 단위로 그것이 필요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신명기 14:22-29; 클라우스 코흐『예언자들 2-바벨론과 페르시아 시대』강성열 역, 크리스쳔 다이제스트, 1999, 16쪽).

신명기 역사가에 의해 본래 희생제사를 드리던 성전은 법을 모시는 곳, 법궤가 안치되어 있는 곳으로 그 역할이 변화하였다. 법궤 안의 내용물에서 신명기 이외의 자료는 만나, 아론의 싹이 돋은 지팡이, 그리고 율법이 새겨진 돌판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가는 오직 율법이 새겨진 돌판 만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희생제사를 드리던 성전 기능의 중심을 오직 법을 지키는 곳, 하나님의 말씀을 두는 곳으로 새롭게 강조하는 것이다.

폐허 위에 아무런 희망도 갖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명기 역사가는 길고 큰 호흡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였다. 그들은 시온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기에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거룩한 성 예루살렘과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았다. 이런 절망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백성들에게 신명기 역사가는 위대한 희망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보다 힘이 없어 무너져 내리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법을 중시하고 정의를 강물 같이 흐르게 하시는 야훼의 우수성을 드러내었다. 이제는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계는 지나갔다. 정의와 원칙, 법을 위반하면 자기 백성이라도 예외 없이 내치시는 야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이제까지 힘과 군대로 세계를 지배하던 질서를 대신한다. 바야흐로 야훼로 인하여 도의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새로운 세계관, 역사관이며 동시에 새로운 종교를 보는 계시이다. 신명기 역사가의 새로운 신학은 당시 세계와 종교를 싸고 있는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고 새로운 질적 변화를 향해 도약하게 하는 종교와 역사의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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