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목회자의 아픔을 묵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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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목회자의 아픔을 묵상함
  • 박철
  • 승인 2020.06.19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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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하나님은 보통 사람에게는 관대하지만 제사장들이나 지도층, 권력자들에게는 아주 가혹하리만큼 엄격했다고 할 수 있다. 야훼는 에스겔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너 사람아, 나에게 반항하는 역적의 무리, 이스라엘 겨레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그들은 조상 때부터 오늘까지 나를 거역하기만 하였다. 그 낯가죽이 두꺼운 자들, 고집이 센 자들, 그런 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본래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이라 듣지도 않겠지만, 듣든 안 듣든 내 말을 전하는 자가 저희 가운데 있다는 것은 알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하나님께서 다그치고 있는 것을 에스겔 23-5절에 말씀하고 있다.

박철 /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 샘터교회 원로목사
박철 /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 샘터교회 원로목사

에스겔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부름을 바빌론에 사로잡혀간 지 30년 되던 해 45일 그발강가에서 들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양을 이리에게로 보내는 것 같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예언자로 불러내어 하나님의 일을 맡기는 경우는 더욱 으스스하다.

하나님의 눈에 비친 이스라엘 민족은 조상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거역하기만 하고, 낯가죽이 두꺼운 자들이었고, 고집이 세고 본래부터 반항할 줄밖에 모르는 족속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족속에게 에스겔을 보내면서 그들이 듣건 말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목회자의 고달픔을 읽을 수 있다. 세상에는 화려한 목회자가 없지는 않다. 중세기 교회의 교황이나 추기경쯤이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권위나 높은 지위가 부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성직자의 길은 가시밭길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도 종교개혁 이후 고르지 못한 정치 제도에 반항하는 농민들을 탄압했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존 캘빈은 훌륭한 목회를 했음에도 너무 엄격했다는 이유로 제네바에서 쫓겨났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다니던 예수는 자기 겨레의 모함과 중상과 고발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사도 바울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동족에게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기 싫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산 채로 깊은 우물 속에 던져 버렸고,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요나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명에 짓눌리어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였다. 에스겔도 몇 번씩이나 예언자의 직분을 벗어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느 경우에도 그 무거운 짐을 벗겨 주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고, 바울은 로마의 동굴 감옥에서 최후를 보냈으며, 예언자들은 쓸쓸히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야훼께서는 에스겔에게 "그들은 너를 반대하고 배척할 것이다. 그리고 너를 가시방석에 앉힐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 한 마디로 반항할 줄밖에 모르는 족속, 낯가죽이 두껍고 고집에 센 족속에게 보내고 있다. 바로 목숨을 건 전투인 것이다.

이것과 비교하면 현대의 목회는 훨씬 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목회의 현장에 뛰어들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 목회자의 공통된 의견일 것이다. 어느 교회에 가나 반드시 한두 사람의 반항자, 낯가죽이 두껍고 고집이 센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반드시 그와 같은 일이 표면에 나타나고, 그 때문에 좋아하고 사랑하는 교우들을 남겨놓고 떠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것이 목회자의 슬픔이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것을 우리 목회자들은 항상 마음에 두어야 한다. 성서가 말하는 거짓 사도, 거짓 예언자의 경우가 그것이다. 영리하고 약삭빠른 목회자들은 이와 같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내고 능란한 솜씨로 가시밭을 헤쳐 나간다.

에스겔서는 고집에 세고 낯가죽이 쇠가죽으로 바뀐 동족에게 가기 싫어하는 에스겔에게 "보아라. 네 얼굴도 그들의 얼굴처럼 두껍게 만들어 주리라. 그리하면 네 얼굴도 쇠가죽을 쓴 그들의 얼굴처럼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아도 되리라. 네 이마를 바윗돌보다 단단한 부싯돌처럼 만들어 주리라. 그것들은 본래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이다. 그런 자들을 무서워하지 말아라" 하고 격려하고 있다. 무서운 말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은 야훼의 말씀을 따르는 국한된 한 부분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통치자를 비롯한 벼슬아치들, 군인과 상인들, 고리대금업자와 점쟁이들, 우상숭배자들과 하나님과 나라보다 자기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는 이스라엘 국가의 구성원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나님께서 자기가 택하고 계약까지 맺을 겨레를 이처럼 무섭게 매도하고, 또 그 겨레에게 보내는 에스겔에게 이와 같은 말씀으로 격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세상에는 쇠가죽을 쓴 얼굴과 바윗돌보다 더 단단한 이마를 가진 지도자와 겨레도 퍽 많다. 바울은 이런 인간들을 마음에 불도장이 찍힌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이 세상에는 너무 뻔뻔스럽고 사나운 짐승 같은 사람도 상당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그들에게 보내면서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바울의 말 가운데는 네가 복음을 전한 다음 너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말이 있다. 깨끗하고 좋은 목회를 한 사람들은 은퇴를 한 다음에도 떳떳하고 늠름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말년이 더욱 쓸쓸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에스겔은 한때 예언자의 무거운 멍에를 벗어놓고 침묵 속에 들어가고 있다. 그것을 에스겔 315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가 너를 사람들 있는 데로 나오지 못하도록 포승으로 묶어 놓으리라. 이 족속은 본래 반역하는 일밖에 모른 것들이라. 네 혀를 입천장에 붙여 말을 못하게 하여 그들을 꾸짖지 못하게 하리라."

우리는 무난한 목회 생활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듣기 좋은 것으로 골라 주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축소 해석하는 경우도 퍽 많다. 만일 예언자의 말 그대로를 전하다면, 우리의 생에도 예언자의 생애와 똑같이 고난에 가득 찬 생애가 되고 말 것이다.

예수에게서 어떤 사람이 찾아와 "저도 선생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예언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목회자의 생애도 그와 같다는 것을 예언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목회자의 슬픔을 목회자만이 알 수 있다. 겉으로는 화려한 것 같은 목회자도 그 안에 들어가 보면 마음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목회자는 주간마다 공식적 예배 설교를 세 번 해야 하고, 새벽 기도까지 하면 아홉 번을 해야 한다. 성경 본문이 있긴 하지만 예배 시간마다 새로운 설교를 열 번 가까이 한다는 것은 설교를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전혀 알 수 없다. 거기에다 심방을 해야 하고, 결혼식, 장례식, 추도 예배, 심지어는 어린아이 돌잔치 등등 설교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마태복음 959절의, 예수께서 어느 한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버지의 장례를 핑계로 예수를 떠나갔다든지, 또 한 사람은 집에 가서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핑계로 예수를 떠나 버린 일들은, 이 모두가 예수의 제자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말씀으로 이 대목을 끝내고 있다. 예수의 제자의 길은 고독한 길이며 험난한 길이다. 언제 죽음이 닥쳐올지 알 수 없는 길이다. 그러나 한번 쟁기를 잡았으면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도 포기할 수 없는 길이다. 쟁기를 잡고 불의에 굽실거리고 권력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서는 아니 되는 길이다. 말년이 쓸쓸해도 끝까지 좋은 목자로 가야 하는 길이다. 아모스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듣기 싫은 예언을 하지 말고 빵이나 얻어먹으려면 너의 고장으로 가라고 했다. 예언자는 밥이나 얻어먹기 위해서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의 사명이 있다는 것을 좋은 목회자는 우리 모두에게 보여야 한다.

바울은 전도하면서 거듭,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란 참으로 묘하다. 사실은 정직을 바라면서도 꾸며대는 말과 속임수에 박수를 보내며 즐거워한다. 거짓 부흥사들이 판을 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구약에 나오는 모든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진실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향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그것이 예수의 마음이며 목회자의 고독이다. 모든 양들이 착한 목자의 소리, 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목의 핏줄을 세우지 않아도 좋은 목자를 알아보고 따라 주기만 한다면, 교회란 말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며 이름 그대로 사랑의 공동체일 것이다.

이 세상에는 진실하고 정직한 목회자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목회자도 더러 있다. 그것을 알고 보는 사람들의 눈물은 하나님의 눈물이며, 그것을 아파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모두의 마음이어야 한다.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교가 지배하던 신라와 고려의 불교 전성시대, 유교가 지배하던 이씨 왕조의 유교 전성시대, 중세기 교회가 유럽을 지배하던 교회의 황금시대를 잊지 말아야 한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부패한 짜르 정부와 결탁했던 러시아 정교의 타락이 그 원인이었고, 바빌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도 타락한 종교와 정치 때문이었다.

우리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목회자의 눈물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목회자의 고독을 깨달을 수 있다. 예레미야의 눈에서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듯이 목회자의 눈물도 마를 사이가 없다.

박철 /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 샘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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