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산과의 첫 만남과 민들레교회 이야기
상태바
북산과의 첫 만남과 민들레교회 이야기
  • 박철
  • 승인 2020.06.12 17: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글은 북산 최완택 목사 1주기 추모문집 에 올린 글입니다.

1980대 중반 우여곡절 끝에 신학교를 졸업했는데 막상 오라는 데가 없어 1년 동안 구들장 신세를 졌다. 그때가 신혼이었다. 한번은 충청도 어디서 오라는 데가 있었다. 그런데 내게는 마음 변하지 말라고 해놓고 며칠 지나서 갑자기 오지 말라는 것이다. 그 교회 장로 중, 한 사람이 여당의 지구당 위원장으로 내가 선을 보러가서 시국설교를 했다며, 운동권 전도사에게 교회를 맡길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이사 가는 날짜까지 잡아놓았는데 참으로 황당했다. 하는 수 없이 아내와 소꿉장난 하듯이 1년을 하릴없이 지내다가 친구가 다리를 놓아주어 강원도 정선 덕송교회로 가게 되었다. 6개월 동안 담임자가 없던 교회였다.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무조건 가고 보자였다. 교인들은 할머니 7-8분, 노총각 1명, 어린애들을 포함해서 중ㆍ고등학생들이 20명쯤 되었다. 동네라야 24가구가 전부였다.

1993년 봄 북산과 수원 광교산을 오르다
1993년 봄 북산과 수원 광교산을 오르다

참으로 척박한 동네였다. 물을 댈 수 없어서 묵혀 놓은 논다랑이가 서너 마지기가 있을 뿐 모두 밭들인데 그것도 헤어진 옷을 깁듯이 여기저기 거의 비탈 밭이었다. 밭농사라야 감자, 고추, 메밀, 사료용 옥수수 등이 전부였다. 교회당은 15평 남짓했고, 담임자 사택은 방이 두 칸에 가운데 부엌이 있는 일자집이었다. 지붕은 달랑 슬레이트만 얹고 반자를 안 해서 여름이면 찜통이었고, 겨울이면 윗목에 놔둔 물이 얼 정도로 추었다. 방이 얼마나 작던지 아내가 시집올 때 갖고 온 장롱을 들여놓았더니 다리를 쭉 펴고 누울 수가 없었다.

6개월 동안 비워둔 집이어서 사람대신 쥐새끼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한밤중 쥐새끼들이 찍찍거리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이 들 만하면 쥐새끼들이 연애를 하는지 사각사각거리다가 별안간 우당탕하고 뛰어다니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자다가 약이 올라 베개를 냅다 천정을 향해 집어던지면 잠시 조용해진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4년 6개월 동안 쥐새끼들과 같이 살았다. 교회마당 앞에 나가서 ‘아무개야!’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면 다 들릴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인정이 많고 선량했다. 전화도 없었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여름이면 매미가 쩌렁쩌렁 요란하게 울어댄다. 겨울이면 산이 깊어서 밤이 일찍 찾아오고 한없이 고즈넉했다.

나는 그때 강단에서 뭐라고 설교를 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설교랍시고 했을 텐데 지금 생각은 그 시절 전국적으로 데모 열기가 한창이었을 무렵, 나는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그것도 민중의 언어랍시고 그들의 삶과는 전연 무관한 얘기를 토해냈을 것이 뻔하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나의 삶은 거대한 자본주의의 모순과 군사독재정권의 권력남용에 대한 저항으로 일관했기에 어찌 보면 그 시절, 그럴 수밖에 없던 측면도 있었다.

그때 유일하게 내 숨통을 트이게 해준 것이 바로 북산이 육필로 써서 보내준 ‘민들레교회 이야기’였다. ‘민들레교회 이야기’는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어 준 창문 같았다. 우체부 아저씨가 우편물을 가지고 오면 제일 먼저 ‘민들레교회 이야기’부터 찾았다. 첫 장부터 꼼꼼히 연필로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내가 다 읽고 나면 그 다음 아내가 읽는다. 두 사람이 다 읽고 나면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철끈으로 묶어 몇 달치를 벽에 걸어둔다. 낮잠을 자고 나서 읽을 때도 있고, 심심해도 읽고, 잠이 안 와도 읽었다.

농목(감리교농촌선교목회자회)에 속해있는 친구들은 거의 ‘민들레교회 이야기’를 구독했다. 가끔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얘깃거리가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민들레교회 이야기’에 실렸던 이야기가 등장했다. 왜 그토록 ‘민들레교회 이야기’에 집착했을까? ‘민들레’가 품고 있는 시대적 정신과 정서가 그 당시의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어서였을까? 그 시절 가장 많이 쓴 말이 ‘민중’이라는 단어였다. ‘민들레교회 이야기’는 언제나 따뜻했다. 다 읽고 나면 군불을 지핀 방이 따뜻하게 덥혀지는 것과 흡사한 느낌이 밀려 왔다. 북산이 지향하는 민들레는 격렬하거나 공격적이지 않고 맑고 순수했다. 조용한 산방(山房)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점점 더 ‘민들레교회 이야기’에 매료되어 갔다. 가끔 ‘민들레교회 이야기’ 제호를 붓으로 써서 보내기도 했고, 시 나부랭이를 적어서 보내기도 했다. 북산이 그걸 실어주면 되게 기분이 좋았다.

1992년 5월 북산과 지리산을 오르다.
1992년 5월 북산과 지리산을 오르다.

속상해 아무도 작은이의 소리에 관심도 없고

귀도 기울이지 않아 아침이슬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청초한 새날을 꿈꾸려니 쉽게 넘나들 수 없는 자유를 위해

속 알맹이 터뜨려 한 마리 나비의 비상을 노래하려니

마음이 아프잖아 언제부터 작은 것은 모조리 성가신

것으로 생각할 줄이야 방긋한 미소 생명의 기운 물씬한

대지의 정직함도 소용없는 일로 간주하다니

너무 속상해 언제 노고지리의 노랫소리가

온갖 풀벌레의 사랑의 화음이 모든 이의

가슴으로 스며들지는 몰라몰라 몰라 난 몰라

아무런 고민도 없이 망설임도 없이 거대한 불신의 벽

철조망같이 서슬 퍼런 냉기를 뛰어넘어

한 마리의 비상하는 나비가 되어 모든 이의 가슴에

따스한 온기로 남아 뿌리를 내릴 수 만 있다면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누가 내 아픔을 이해해 주고

함께 사랑의 노랠 부를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정말 좋겠는데.

(박철 詩. 민들레 마음)

최완택 목사 생전의 모습
최완택 목사 생전의 모습

그러나 ‘민들레교회 이야기’는 열심히 읽었지만 북산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한 번 뵙고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작정을 하고 전화를 드렸다. 그랬더니 다음 월요일 감신대에서 축제를 하는데 형제교회 김영주 목사와 함께 만나자고 하신다. 북산을 처음으로 뵙고 인사를 드리기로 했는데 빈손으로 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을 선물로 드리면 좋을까 생각하다 ‘말린 메뚜기’를 드리기로 했다. 내가 살던 덕송리 마을에는 묵은 논이 서너 마지기 있었는데 메뚜기가 많았다. 아내와 나는 아침부터 어린애들처럼 뛰어다니며 메뚜기를 잡았다. 그렇게 서너 시간 잡으면 1.8리터짜리 플라스틱 병 하나를 채울 정도로 잡혔다. 메뚜기를 잡아서 뚜껑을 연채로 놔두면 메뚜기들이 기진맥진해서 똥을 싼다. 그걸 잘 씻어 찜통에 넣고 살짝 쪄낸다. 그 다음 거적에 메뚜기를 붓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이틀정도 말린다. 메뚜기가 바짝 마르면 양은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먹을 때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붓고 살짝 튀긴 다음 소금을 살짝 뿌리고 먹으면 된다. 간식거리로도 그만이고 맥주안주로도 최고급이다. 며칠 잡은 메뚜기를 잘 말려 두 되박을 박스에 담아 포장을 했다. ‘이걸 북산이 받으면 뭐라고 하실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선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타고 올라와 북산과 약속한 감신대 웰치기념관으로 향했다. 정확하게 약속시간에 도착했다. 그런데 하필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그때 이정배 교수가 바젤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기념강연회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북산을 처음으로 만났다. 김영주 목사도 나왔다. 전에 누군가로부터 북산의 모습이 꼭 소장수 같다는 얘기를 들은바 있었지만 실물로 대하니 그동안 글에서 받은 느낌과 사뭇 달랐다. 악수를 하는데 강한 악력(握力)이 느껴졌다. 완전 솥뚜껑 같았다. 북산과 김영주 목사는 잘 아는 사이로 보였다. 이정배 교수의 기념강연회가 끝나자 감신대를 빠져나와 근처 다방으로 들어갔다. 북산도 이정배 교수를 수년 만에 처음 만나는 것 같았고 얘깃거리가 풍성했다. 주로 북산이 화제를 끌고 갔다. 그런데 북산이 나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꿔다놓은 보리자루 마냥 우두커니 앉아 있었을 뿐 한마디도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그때 이정배 교수가 입은 양복이 가운데 양쪽이 갈라진 것이 아니라 그냥 통짜라는 것을 알았다. 다방에서 한 시간쯤 앉아 있었을까? 다시 일행은 감신대로 가겠다고 한다. 나는 잠시 카메라 셔터 속도처럼 빠르게 생각했다. 이 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른 볼 일이 있어 가봐야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발길을 돌렸다. 아마 세 분은 당구장에 갔을 것이다. 감신대 앞에서 잠실 어머니 집으로 버스를 타고 오면서 속이 더부룩했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강원도 정선에서 왔는데 눈길 한 번 안 주다니….'

한참 버스를 타고 가면서 갑자기 내 손에 들린 가방을 보았다.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메뚜기가 생각났다. 아뿔싸! 말린 메뚜기를 그대로 갖고 온 것이었다. 이럴 수가! 북산에게 말린 메뚜기를 전달하기 위해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그렇고, 이래저래 속이 편치 않았다. 지금부터 33년 전 이야기이다. 그 시절 30대 초반이었던 내가 어느새 이순(耳順)을 지나 예순 중반의 나이가 되었으니 세월이 참 빠르지 않은가.

1990년 겨울 북산과 대덕선을 오르다
1990년 겨울 북산과 대덕산을 오르다

‘민들레교회 이야기’에 대한 나의 잊지 못한 추억이 있다. 1990년 대 중반, 내가 경기도 화성군 남양에서 목회하던 시절이었다. 매주 화요일마다 민들레 교회에서 북산이 인도하는 성서연구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공부를 하고 북산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헤어진 후 서울 신도림에서 수원 가는 마지막 지하철을 탔는데, 막 졸음이 오는 것이었다. 수원까지 가려면, 한참을 가야 하니 잠시 눈을 부쳐야겠다고 생각하고 눈을 감았는데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에 잠이 깨어 이제 수원 종점에 다 왔나보다 해서 눈을 떠 보았더니, 수원역이 아니라 청량리역이었다. 수원 가는 열차를 탄 것이 아니라 청량리 행 열차를 탔던 것이다. 시간을 보니 밤 11시가 넘었고 몸은 고단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5천원짜리 지폐가 한 장 있었다. 물론 택시를 잡아타고 잠실 처갓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아침 집으로 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늦은 밤, 배가 출출해서 청량리 간이식당에서 우동을 한 그릇 사먹고 청량리 역 광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때가 6월 초여름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걱정도 되고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자 긴장도 풀리고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밤하늘을 쳐다보니 거의 보름달에 가까울 정도로 둥근 달이 떠올랐다. 공연히 가슴이 뭉클해지고 나도 모르게 내 속으로부터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나는 한참동안 보름달을 쳐다보며 울었다. 청량리역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몸을 파는 아가씨들이 남자들을 유혹하는 모습, 술 취한 취객들의 노랫소리, 열대여섯 명 쯤 되는 노숙자들이 잠이 안 오는지 서성거리는 모습, 나도 그 속에 내 몸을 맡기기로 하고 더 이상 졸음을 견딜 수 없어 콘크리트 바닥에 누웠다. 6월의 한밤중 조금 추운 듯 했다. 아무 것도 덮을게 없었다. 그때 내 주머니에 ‘민들레교회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걸 한 장 한 장 다 펴서 덮고, 얼굴을 가리고 잠을 잤다. 한 없이 평온한 자유가 밀려왔다.

북산 최완택 목사님은 나에게 자유한 삶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셨다. 내가 지금까지 어줍잖은 목회랍시고 어디에도 기웃거리지 않고, 이만큼 나를 지켜내고, 민들레 마음을 품고 살아온 모든 것은 다 최완택 목사님 덕분이다. 그동안 수백 통의 ‘민들레교회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 내 몸 안에 ‘자유혼’(自由魂)이 배어 있다. 그것이 내 인생에 보이지 않는 가장 큰 흔적이다.

권정생 선생의 유언
권정생 선생의 유언

아주 오래 전, 친구 차흥도 목사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북산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북산은 우리에겐 큰 산(山)과 같은 존재였다. 그때 차 목사가 한 말이 생각난다. “박철, 우리가 완택이 형을 좋아하지만, 완택이 형을 넘어서야 하지 않겠어.” 차 목사는 이야기는 우리가 북산의 나이가 되면 그의 삶이나 사유, 그의 실존을 극복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북산 앞에 주눅이 들어있었다. 그를 극복하기는커녕 그를 흉내 내는 일마저도 내겐 벅찬 일이었다. 나는 감히 북산에 대해서 “그는 민들레정신으로 생과의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 시대 진정한 자유인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작년에 북산을 떠나보내고 그를 따르던 후배들이 그의 무덤 앞에 작은 비석 하나를 세웠다. 비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영원한 자유인 북산 최완택 이곳에 잠들다” 나는 북산에게 자유인으로 사는 길을 배웠다. 햇봄, 오늘도 나는 산책을 하면서 수많은 민들레로부터 인사를 받았다. 북산 최완택 목사님이 뿌려놓은 민들레 홀씨가 가는데 마다 뿌리를 내려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자유의 의미를 전해 주고 있다.

글쓴이 박철님은 목사로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로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