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내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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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내어주다
  • 백창욱
  • 승인 2020.05.24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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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20. 5. 24)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요한 17:1-11)

어제는 노무현대통령 서거 11주년 된 날입니다. 감회가 어떠신지요? 사람마다 저마다의 추억을 회상합니다. 어제 한겨레신문에서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인 김경수 지사 인터뷰에서 권향숙여사가 최근에 한 말이 실렸습니다. “당신은 거기 누워서 당신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있네”라고. 노무현 대통령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고 또 그와 정치생명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지금 현실정치를 책임지고 있는 현실을 볼 때, 또 당대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레 실망과 분열을 일으켰지만, 그가 이루고자 했던 일들이 현실에서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때, ‘노무현의 죽음은 헛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죽어서 산다’는 말처럼, 그가 갑자기 죽음으로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부채감을 안겼습니다. 부채감은 그가 살아생전에 했던 말, 정치노선을 마음에 간직하고,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를 조금씩이라도 진보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그가 탄핵당해 정치생명이 끝날 뻔 했을 때, 그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되살린 것처럼, (내 기억에 광화문에 촛불이 대거 등장한 첫 집회는 노무현 탄핵 규탄집회다.) 실제 죽어서도 그의 뜻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져서, 비록 몸은 죽었지만 정신은 계속 살아 있는 생생한 사례가 됐습니다. 물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정말 노무현 정신을 실천하고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죽음과 생은 연결돼 있습니다. 노무현대통령도 유서에서 말하기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라고 했듯이. 이 말은 삶과 죽음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단, 죽음을 생명으로 승화시키는 정도와 여부에 따라 죽음의 값어치가 달라지는 건 분명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죽음을 죽음으로 그대로 둘 수 없어서 부활이라는 신비로 예수를 다시 살렸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그대로 두지 않고 부활로 승화시킨 이유는 그의 삶이 너무도 값지기 때문입니다. 역사 예수는 아버지와 온전히 일치했습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본문에서 제일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인가요? 아버지입니다. 그만큼 예수는 아버지와 친밀합니다. 그 예수의 삶이 너무나 고결하므로 그의 삶을 더욱 기리기 위해 죽음을 부활로 승화시켰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도 죽음과 관련한 말씀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가 14-16장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고별담화를 마치고 17장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요한복음의 서술형태를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의 언어는 공관복음의 언어와 많이 다릅니다. 단어의 뜻도 다르고 서술구조도 다릅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의 뜻이 크게 다릅니다. 공관복음에서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겟세마네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사투를 벌입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합니다.(막 14:36) 마태는 이 기도를 그대로 옮겼습니다.(마 26:39) 누가는 겟세마네 기도를 더욱 실감나게 표현합니다. 땀이 핏방울같이 돼서 땅에 떨어졌다(눅 22:44)고 말할 정도로 공관복음의 겟세마네 기도는 인간적이고 간절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겟세마네 기도를 모두 생략했습니다. 왜 생략했나요? 이미 사람들이 수난의 뜻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요한의 이해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십자가를 앞둔 예수의 모습을 다르게 말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대목을 요한은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요 12:27,28)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넉넉히 수용하는 예수의 의연함을 드러냅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피하고 싶은 수난이지만 요한에서 십자가는 예수가 계시되는 영광의 보좌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영광의 보좌로 말하는 서술은 요한복음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본문은 1절부터 십자가 죽음을 예수의 높아지심으로 연결한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이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처형의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가 계시한대로, 예수가 땅에서 높이 올려져 앉게 될 보좌입니다. 그래서 죽었다고 말하는 대신에 영광스럽게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당신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며 또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요 17장은 그렇게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가 대제사장의 위치에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첫째는 당신 자신을 위하는 기도, 둘째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 셋째는 앞으로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까지입니다.

예수가 죽음을 앞두고 바치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요? 그 기도의 중요성은 너무너무 큽니다. 두 번째 기도와 세 번째 기도를 같이 보겠습니다. 세 번째 기도 내용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21절) 두 번째 기도내용은 11절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두 번째와 세 번째 기도내용이 같습니다. 예수의 마지막 기도는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우리와 하나 되게 해 달라 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마지막 기도내용이 무엇인가만 기억해도 우리는 지금보다 더욱 성숙한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가 될까요?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었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 아버지와 하나가 됐습니다. 당신을 내어줌으로, 당신이 영광을 얻었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는 자의식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역설처럼 보이는 진리입니다. 먼저 비워야 합니다. 

요즘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톨스토이가 인생에서 가장 보람으로 삼는 책입니다. 딱 한 권만 남긴다면 이 책이라고 했습니다. 묵상 내용에서 어떤 공통점을 느끼나요? 그날그날 주제가 다르지만 지향하는 바는 비슷합니다. 자기를 비우고 영혼의 신성을 의식하라는 말입니다. 저는 요즘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한 대목씩 읽으면서 내가 너무 세속적이라는 반성을 합니다.
몇 가지 경구를 보겠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하지 말라. 특히 남과 비교하는 것은 좋지 않다. 비교할 거면 오직 완전한 신과 비교하라.”(5월 9일)
“완전한 기쁨은 부당한 비난을 참고 거기에서 오는 육체적 고통을 견뎌내며, 그 비난과 고통을 가져다 준 자에게 적의를 품지 않는 데에 있다.”(5월 17일) 이런 말씀에 나 자신을 비추니 내 자신이 너무 아득합니다. 그래서 요새는 걸을 때, “키리에 엘레이손(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챈트만 계속 듣습니다.

톨스토이의 경구들은 신성을 향한 좋은 지향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내 영혼이 신성하도록 돕습니다. 예수의 기도를 좌표로 삼으십시오. 자기를 비워서 하나됨을 구하십시오. 너와 내가 아버지와 예수 안에 머무는 일을 내 존재의 사명으로 삼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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