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모제가 끝난 뒤, 김주숙(65·부산시)씨는 동생인 김의기 열사 묘지 위에 최근 출간된 <김의기 평전>을 올려놓은 채 한참을 통곡했다.
김 열사는 1980년 5월30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5·18 진상규명을 외치고 유인물(‘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며 투신했다.
김씨는 “40주년인 올해는 작고하신 어머니(권채봉씨)가 더욱 생각난다. 동생이 우리나라 민주화에 작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의 암울한 상황을 타개해 나가고자 분연히 일어났던 용기 있는 한국인들이여! 그대들이 피를 흘리면서 성토하던 그 안개정국은 이제 완전히 마각을 드러내어 뻔뻔스럽게도 그 음모와 책략을 표면화했습니다. 소위 국가보위비상대책위가 군 장성들로 구성되었으며, 행정부의 전 기능을 장악하고 그 우두머리에 전두환 중장이 상임위원장이란 감투를 쓰고 올라앉았습니다. 허수아비 같은 최규하 대통령을 뒤에서 조종하며 숱한 민중의 지도자들을 법의 이름으로 잡아들이고 있습니다. 숱한 학생들을 포고령의 이름으로 발가벗기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땅엔 또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지울 수 없는 역사적 과오 5.16쿠데타, 그 후 19년간 장기독재, 아! 한국의 앞날이 먹구름으로 덮이고 있습니다. 박 정권 20년간의 좋은 시절을 좀처럼 청산할 수 없다는 듯이 독재 밑에서 부정부패로 치부해 오던 유신체제 잔당들이 지금 이 나라를, 이 국민들을 손아귀에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유언비어가 되고 유언비어가 진실이 되어 버리는 이 어지러운 시국은 국민들에게 입을 막고 귀도 막을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체, 귀가 있어도 못 들은 체, 눈이 있어도 못 본 체해야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요컨대 국민들이 수군거려선 안 되는 무서운 음모, 계략들로 가득 찬 정권야욕에 불타는 무리들, 민주가 어떻고 민족이 어떤지 안중에도 없는 무리들이 지금 이 땅에서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악이 선보다 강한 세상, 정의가 불의한테 눌리는 세상, 이런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분노해야 하고 고쳐 나가야 할 세상입니다.
법과 질서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조직적인 폭력, 몽둥이와 포승줄 아래 우리들의 모든 자유는 빼앗기고 눌린 채 한국의 밤은 깊어지고 있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다수의 국민들은 저마다 모두 불신을 품고 앉아 점점 무기력해 가고 있습니다. 용기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무관심해지고 있습니다. 몽둥이와 포승줄 아래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과연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입니까? 하루 삼시 세 끼 끼니만 이어가면 사는 것입니까? 도대체 한 나라 안에서 자기 나라 군인들한테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 명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며 죽어가고 있는데 나만,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지금 유신잔당들은 광주 시민·학생들의 의거를 지역감정으로 몰아붙이며 ‘전라도 것들’이라는 식의 민심 교란작전을 펴고 있습니다. 국민의 의사를 몽둥이로 진압하려다 실패하자 칼과 총으로 진압하고서 그 책임을 순전히 불순세력의 유언비어 운운하며 국민들을 기만하고 우롱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계엄철폐를 주장하면 계엄을 더 확대시키고 과도기간 단축을 요구하면 더욱 늘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 학생들에게는 자제와 대화를 호소한다니 정말 정부에서 말하는 대화의 자세란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안보를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계엄령 확대와 시민의 감시 등을 하기 위해서 전방의 병력을 빼돌려 서울로 집결시키는 조치는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사리사욕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를 새삼 느꼈으며, 권력이 그렇게도 잡고 싶은 것인 줄 새삼 느꼈습니다. 한 마디로 한국 국민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저력을 우습게 보고 있는 저들에게 따끔한 경고를 해주고 싶습니다. 독재자 박정희의 말로가 어떻게 끝났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싶습니다.
내 작은 몸뚱이를 불살라 국민 몇 사람이라도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몸을 던지겠습니다. 내 작은 몸뚱이를 불 질러 광주 시민·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 대가 없이 이 민족을 위하여 몸을 던진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습니다. 너무 과분한, 너무 거룩한 말이기에 가까이할 수도 없지만, 도저히 이 의분을 진정할 길이 없어 몸을 던집니다.
(1980년 5월 30일 김의기)

아침 8시 울 다섯식구 광주 망월동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큰아들이 운전을 하니 편하네요. 처남 김의기 유서를 묵상해 봅니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에 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장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년 동안 살벌한 총검아래 갖은 압제와 만행을 자행하던 유신정권은 그 수괴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으나, 그 잔당들에 의해 더욱 가혹한 탄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동안 허위적 통계숫자의 사이비 경제 이론으로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넣는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일부 돈 가진 자와 권력자를 제외한 온 민중이 받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유신 잔당 들은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또 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똑똑한 조상이 될 것인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모든 싸움은 역사의 정 방향에 서있다.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 유신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동포여! 내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 바쳐 싸우자, 동포여!
1980년 5월 30일 김 의 기
김의기 열사 연보
1959년 4월21일 경북 영주군 부석면 용암리 4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1970년 2월 영주 중부국민학교 졸업
1976년 2월 배명고등학교 졸업
1976년 3월 서강대학교 경상대 무역학과 입학. KUSA가입
1977년 서강대 KUSA 하계 농촌활동대장 역임
감청 농촌 선교위원장
한국기독청년협의의회(EYC) 농촌 선교 분과위원장
1980년 5월30일 오후 5시경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종로 5가기독교 회관 6층 (607호)에서 투신 순국
1980년 6월 2일 경기도 금촌기독교 공원묘지에 묻힘
1990년 서강대학교 명예졸업장 수여
1991년 5월18일 광주민중항쟁 유가족회로부터 5월 시민상 수상
2000년 정부로부터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로 인정받음.
2000년 5월 광주 5.18묘역(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