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는 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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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가는 척하다
  • 백창욱
  • 승인 2020.04.27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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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20. 4. 26) 부활절 세 번째 주일

부활은 기독교만의 개념이 아닙니다. 일세기 고대근동 문화에서는 익숙한 개념입니다. 예를 들면, 한겨레신문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김헌의 그리스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해 소개합니다. 어제는 ‘저승으로 가는 길, 엘레우시스’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압축해서 옮깁니다. 

엘레우시스는 그리스의 한 지명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엘레우시스를 저승으로 통하는 길로 믿고 있습니다. 대지의 어머니 데메테르 여신에게 페르세포네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승의 신 하데스가 땅 위로 놀러 나왔다가 페르세포네를 보고 한 눈에 반해서 그녀를 납치해서 땅 속으로 내려갔습니다. 데메테르는 하던 일을 멈추고 미친 듯이 딸을 찾아 헤맵니다. 대지의 여신이 일을 멈추니 땅은 황폐해지고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식량을 얻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할 수 없이 제우스가 사태해결에 나섰습니다. 제우스는 중재안을 냈습니다. 페르세포네가 일 년의 반은 저승세계에서 하데스와 머물고, 나머지 반은 데메테르와 지상에서 보내는 것입나다. 둘의 합의에 따라 페르세포네가 저승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곳이 바로 엘레우시스의 동굴입니다. 데메테르는 이곳에서 오매불망 기다리던 딸을 만나면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이 땅에 떨어지면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나며 봄이 시작됩니다. 모녀가 행복하게 대지를 누비는 동안, 온갖 식물은 찬란하게 피어나 무르익고, 풍요로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게 일 년의 반이 지나가면 이별의 시간이 옵니다. 페르세포네는 다시 저승으로 가야 합니다. 헤어짐은 데메테르의 마음에 찢어지는 슬픔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녀가 흘린 이별의 눈물은 땅의 대지를 온통 얼어붙게 만듭니다. 풀은 시들고, 나뭇잎은 빛을 잃어 바랜 낙엽으로 떨어지고, 겨울은 찬바람 부는 황량한 대지가 됩니다. 이런 신화를 가지고 있는 엘레우시스 신전에서는 매년 페르세포네를 보내고 맞이하는 제의가 성대하게 열립니다. 아테네가 엘레우시스를 합병한 후에 축제의 주도권을 가져가지만, 엘레우시스의 밀교의식만은 그곳 왕족 출신 사제들이 전담합니다. 이것이 엘레우시스 미스터리(밀교의식, 미스테리아)에 담겨 있는 그리스식 생명과 부활 이야기입니다. 

이집트의 종교문화에서도 죽음과 부활은 매우 보편적인 믿음형태입니다. 오시리스 신앙이 대표사례입니다. 백성의 사랑을 받는 군주 오시리스는 질투심 강한 사악한 동생 세트의 계략에 걸려 목숨을 잃습니다. 세트는 오시리스의 몸을 열네 쪽으로 갈라서 이집트 온 땅으로 분산시킵니다. 오시리스의 부인 이시스는 전 국토에 흩어진 남편의 몸조각을 다 수집해서 재조립합니다. 바로 이렇게 오시리스의 재조립된 몸이 이집트 역사에 최초로 등장한 미이라입니다. 이 때 오시리스의 성기만 나일강 잉어가 삼켜버려서 나무로 깍아 끼워 맞췄습니다. 그리고 이 미이라와 관계해서 낳은 아기가 호러스입니다. 호러스는 아버지를 죽인 삼촌 세트와 대결해서 최종 승리하여 이집트를 지상의 밝은 나라로 만들었고 세트는 사막으로 쫓겨나 혼돈과 악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시리스는 죽은 자의 지배자가 되었고, 모든 지하 생명력을 대변합니다. 봄이 돼서 피어나는 새싹은 모두 오시리스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오시리스는 하얀 몸으로 상징하는데 이에 따라 미이라의 몸도 하얗게 치장합니다. 도올 김용옥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이들에게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또 하나의 오시리스의 변형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저자들은 고대근동 주변나라의 부활신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경 편집자가 바벨론, 아시리아 창조신화를 이용해서 히브리만의 창조신화를 만들었듯이, 복음저자는 그들 부활신화를 이용하면서 예수만의 독창적인 부활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에도 예수 부활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요? 그리스나 이집트의 부활이야기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신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데스, 데메테르, 제우스 등 등장인물이 다 신입니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왕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예수부활은 평범한 사람이야기입니다. 부활예수는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걷고 이야기를 하고 음식을 나눕니다. 그리스의 엘레시우스가 신들만의 통로라면, 엠마오는 누구나 지나는 길입니다. 부활예수는 저 멀리 떨어져서 인간을 지배하는 신이 아닙니다. 사람과 가까이에서 소통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그동안 아리송했던 대목이 있었습니다. 28절입니다. 어째서 예수는 더 멀리 가는 척 했을까요? 왜 이런 페이크 동작을 취했나요? 무슨 깊은 뜻이 있나요? 그러다가 오늘 설교준비를 위해 그리스와 이집트의 부활이야기를 보면서, 오늘 본문의 예수동작을 이해했습니다. 예수의 인지활동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임을 보여주려는 복음저자의 설정으로 봅니다. 예수가 더 멀리 가는 척한 이유는 제자들이 만류해 주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제자들의 인간애는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제자들은 진심으로 권유하고 예수는 그들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대화가 깊어지고 드디어 제자들 눈이 열렸습니다. 부활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할렐루야! 

신앙은 인간애가 충만해야 합니다. 친절하고 따뜻하고 허물없이 밥 같이 먹고 차별하지 않고... 부활신앙이라고 해서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무슨 비상식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부활신앙도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인간애를 통해 더 풍성해집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를 보면서 인간애가 풍성한 신앙인이 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본 글은 주일설교문(20. 4. 26) 부활절 세 번째 주일으로  누가 24:13-35 “멀리 가는 척하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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