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이름)이란 저녁(夕)에 어머니가 저 멀리 개울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부르는(口) 소리다. “개똥아 ~ 밥먹어라~.” 열 댓 가구 사는 마을에 내 아이를 부르는 이름은 개똥이면 족하다. 여자아이에게는 “순이”면 족하였다. 그러던 것이 사회가 점점 확대되고 조직화 되면서 이름이 필요하였다. 특히 병역에 동원하고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필요하였다.

병역의 의무가 없고 세금의 의무에서 벗어난 여인들은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옛날 대부분의 민중들은 “姓”이 없었다. “姓”은 공을 세운 이들에게 임금이 하사하는 것이었기에 성이 있다함은 귀족계급에 속했다.
사회가 좀 더 확대되고 복잡화 되면서 이제 이름만 가지고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번호를 부여하게 되었는데 1968년 11월 21일 부터 획일적으로 전 국민에게 부여하였다. 획일적이라는 면에 대해서 “인권침해 요소가 있다”, “개인 정보 유출의 위험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도 있지만 행정적인 효율성 면에서는 매우 유용했다. 주민번호와 주민증 발급의 직접적인 계기는 1968년 1월에 있었던 무장공비 침투사건이었지만 꼭 그것이 아니라도 어떤 형태로든 만들어 져야 될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주민번호가 없으면 은행거래, 부동산소유, 자동차소유를 할 수 없다. 학교에도 갈 수 없고 혼인신고도 할 수 없으며 자녀의 출생신고도 할 수 없다. 또한 참정권도 없다. 비행기도 탈 수 없고 배도 탈 수 없다.
나의 외할머니는 주민증과 주민번호가 없었다. 외할머니의 삶은 많은 여인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살아오셨다. 어려서 나이 많은 중년늙은이(나의 외할아버지)에게 첩으로 팔려갔다. 4남매를 생산 하였으나 외할머니는 첩이었기에 호적에 오를 수가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소천 하시자 어린 자녀를 둔 할머니는 생계를 위하여 아내가 있는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거기에서 또 3남매를 낳았다. 그러나 역시 호적에 오를 수 없었다. 외할머니의 호적은 여전히 처녀였다. 그나마 전쟁의 와중에서 처녀 호적도 없어지고 다시 만드는 과정에서 할머니의 호적은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할머니는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 호적이 없었기에 주민번호도 부여받지 못하였다.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오셨다. 그리고 당신의 필요에서가 아니라 자녀들의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의료보험의 필요에 의해서 주민번호와 주민증을 부여 받으셨다. 할머니께서는 주민증을 받아들고는 매우 감격해 하셨다. 그것이 무슨 보물이나 되는 냥 비단에 싸서 함에 넣어 두셨었다. 2006년 98세로 소천 하셨을 때 사망신고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