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5.18과 울 처남 김의기 열사 투신 40주기를 맞는다. 추도식 때 사용할 영정사진이 넘 오래되고 낡아 전문업체에 맡겨 사진을 손보았더니 22살 청년 김의기가 다시 살아난 듯하다.
보정한 사진을 보고 아내는 동생이 이렇게 젊었냐고 묻는다. 가뭇없이 40년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그때 25살이었던 아내는 올해 65살이 되었다.

-아래 글은 서해성 작가의 글이다.
김의기, 5월30일
-오월걸상을 위하여
스물두 살 청년 김의기는 종로 기독교회관 6층에서 아래로 몸을 날렸다.
동포여, 일어나자!
이 대지의 가장 먼 곳까지 뜻을 전하고자 했지만 그의 몸뚱어리가 떨어진 곳은 고작 계엄군 장갑차 위였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맨 먼저 받아 읽은 것도 총칼을 든 계엄군이었다.
김의기가 처음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공포의 어둠, 침묵의 어둠을 찢고 일어섰다. 그는 80년대라는 진실의 척후였다. 양심과 시대의 첫 마디였다. 광주에서 학살이 끝난 뒤 누구나가 지독한 암전의 일부였을 때, 비겁의 형제였을 때 그가 몸을 던져 맨 처음 학살을 알렸다.
광주는 오월에 끝난 게 아니었다. 오월은 광주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김의기가 있어 오월 광주는 6월로 내달려갈 수 있었다. 김의기의 5월 30일을 딛고 오월은 일곱 해를 달려 6월시민항쟁으로 타올랐다. 독재와 싸운 거대한 단일 시간인 ‘장기 오월’을 연 이름, 옳을 ‘의’ 기운 ‘기’ 김의기義氣. 이름 자체가 정의감에서 우러나오는 기개라는 뜻이었다.
그날 스물두 살 김의기의 몸이 떨어져내리고, 옥상에서 그가 뿌린 동포에게 드리는 글은 허공에서 펄럭거리면서 오후 5시 5월 하늘을 천천히 내려왔다. 먼저 땅에 닿은 것은 육신이요, 허공에 머문 건 의기였다.
그는 타자로 친 한 장 짜리 글을 마무리하면서 왼쪽에 한 번 ‘1980’이라고 쳐넣었다가 다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1980년 5월 30일 김의기 드림’이라고 써넣었다.
아무 것도 빚진 게 없는 청년은 한없이 빚진 듯이 썼다.
내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몸 바쳐 싸우자, 동포여! 내일 정오가 언제인가. 오늘인가, 내일인가. 그가 몸을 던진 날로 꼽자면 5월 31일 오늘이다. 기억하는 자에게는 날마다가 5월 31일이다.
* 그 청년의 몸이 땅에 닿은 자리에 해가 가기 전에 작은 걸상 하나를 놓고자 한다. ‘오월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