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전부를 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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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전부를 거는 일
  • 양재성
  • 승인 2020.03.29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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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29. 가재울녹색교회 하늘의 소리

▪ 코로나 19와 기독교 신앙

  코로나 19는 이탈리아를 넘어 영국과 미국을 강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나라의 문을 걸어 잠갔고 집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봉쇄조치를 내렸습니다. 심지어 군대까지 동원하여 야외 활동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강력한 이동제한조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각 나라들은 방대한 자금을 지원금으로 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미국은 예산의 절반인 2500조원을 긴급지원금으로 결정하였고 우리나라도 전주시, 경기도, 서울시에 이어 경상남도가 기본자금지원을 결정하였습니다. 파격적인 정책들이 진행되고 있어 정치권도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벌써 5주째 교회당 문을 닫고 예배를 가정 예배로 전환하였고 고난주일이나 부활주일에 예배당 예배 재계도 아직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정부는 전염병 차단을 위해 집회와 종교행사 자제를 강도 높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교회의 심기는 불편합니다. 예배가 허가 받아야 할 사안이냐며 정부 조치에 항의하며 경고까지 하고 있지만 녹록치 않습니다. 교회의 자존심을 짓밟았다는 표현까지 써 가며 사과를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물러서지 않고 더 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정부의 조치가 교회의 심기를 건드리려고 한 것은 아닐 겁니다. 전염병은 제 시간에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무특정 다수가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것이니 부탁하고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당 예배가 진행되자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 조치입니다. 다수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예배당 예배를 고집하는 것도 신앙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미 구약시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우애가 사라지고 정의가 땅에 떨어졌을 때 하나님은 제사를 거부하며 인애를 요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는 이미 율법이 서민대중을 억압할 때 모세 종교를 버렸고 성전이 특권층을 위한 권력이 되었을 때 성전 중심의 예배를 거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눈길일 머무는 곳, 고난의 현장, 아픔이 있는 곳이 바로 예배의 처소입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머무는 곳이 성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할 때일수록 오히려 교회는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합니다. 아니 정부의 조치가 있기 전에 먼저 예배당 예배를 중단하고 가정예배로 전환하고 새로운 신앙의식을 고민했어야 합니다. 그렇게 했다면 비기독교인들도 교회를 신뢰하고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는 집단 감염소가 되었고 사회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각성해야할 때입니다. 자존심만 내세워 성심을 다하는 정부와 국민들을 대적할 게 아닙니다. 

  물론 정부도 종교를 함부로 대해선 안 됩니다. 충분히 이해를 구하고 협조를 요청해야 합니다. 강제로 성전을 폐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끝까지 대화하고 정중히 협조를 구해야합니다. 

  교회는 코로나 정국을 지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신앙을 새롭게 고민해야합니다. 코로나는 자연이 보내는 경고이며 하나님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삶의 철학과 사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 보다 더 위험한 전염병이 창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생각하고 창조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방식을 배워야합니다. 

  이제 교회는 창조신앙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생태신학과 창조신앙이야말로 이 시대 하나님이 요구하는 신앙입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모든 생명이 존중받고 창조의 섭리에 순응하고 제 안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에 경청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면 인류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새로운 길, 문명사적 전환을 이루는 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사진 제공 : 한현실님
사진 제공 : 한현실님

▪ 예수와 마르다

  오늘 성서일과는 요한 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11장의 말씀입니다. 예수 일행은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성전이 더 이상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음에 분노하시며 성전 숙청작업에 착수했고 이어 세상 권력에 대해 경고하고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 주인이 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합니다. 이는 성전 중심주의적 신앙을 과감히 탈피하여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전중심주의자들은 자신의 부를 늘리고 투기장이 된 성전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전주의자들은 예수 일행과 늘 전선을 이루고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일꾼 나사로의 죽음은 예수 운동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예수는 일정을 조정하여 예루살렘에서 오리 쯤 떨어진 베다니란 곳으로 가셨습니다. 베다니엔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핵심 리더인 마르다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의 집은 그리스도인들의 핵심 거점으로 예수도 자주 이용한 곳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이들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나사로가 사망합니다. 그로인한 두 자매의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장례식장에 참여하여 마르다 자매를 위로하였습니다. 문상객이 많은 것은 이들이 얼마나 섬김의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겐 오라버니지만 아버지와 진배없는 오라버니였습니다. 슬픔에 빠져 있던 마르다는 예수 일행이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는 기별을 받고 대문으로 달려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라버니가 죽었습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아쉬움과 원망이 섞인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네 오라버니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응답은 엉뚱합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은 내가 믿지만 지금 살아나리라는 건 믿을 수 없습니다. 마르다는 슬픔이 너무 커서 예수님의 방문이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마리아가 나옵니다. 그도 마르다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탄식하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 눈물의 의미

  우리 몸 어느 한 부분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심지어 손톱, 귓밥, 때, 비듬까지도 그 쓰임새를 알고 나면 하나도 타박할 것이 없는 소중한 것들입니다. 손톱이 없으면 가려운 곳을 어찌 긁으며 귓밥이 없으면 우리 몸 중 가장 연약하고 미세한 귀청이 보호받지 못한다니 고마운 일이고, 때는 내 몸을 건강하게 유지 시켜주던 세포가 수명을 다한 것이니 그 장렬한 전사를 외면할 수 없고, 그 징그러운 비듬도 내 몸 안에서 흐르는 이상 호르몬의 자연스러운 분출이라니 놀랍지 않습니까? 

  다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피와 눈물과 땀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소진하면서 까지 열정적으로 어떤 일을 해 보았습니까? 눈물은 마음입니다. 눈물을 흘릴 만큼 마음을 다 쏟아 부어 본 적이 있습니까? 땀은 노동으로 얻을 수 있는 진주입니다. 노동을 통해서만 땀이 흐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 안에 세 가지 진주를 감추어 놓고도 그걸 꺼내려 하지 않는단 말씀입니다. 얼마든지 꺼내어 써도 되는 내 것인데 말입니다.

▪ 예수의 눈물

  예수는 평생 세 번의 눈물을 흘리십니다. 첫 번째 눈물이 오늘 마르다 자매의 집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얼마나 마르다와 마리아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슬픔에 함께 하고자 하는 눈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눈물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해도 이를 믿지 못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 없음으로 인하여 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란 사실 아니 믿는 자는 죽이 않고 영원히 살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우셨습니다. 예수께서 한탄하신 것은 의로운 자들의 죽음이 아니라 의로운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할 예루살렘 성전이 오히려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언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심지어는 죽였습니다. 예언자들을 죽이는 그들의 포악성 때문에 우신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믿음 없음을 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최고의 지성소요 성스럽게 여긴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것은 거짓 예언자와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잘 못을 개탄하신 것입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우신 것은 마지막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중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며 우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청하셨지만 하나님은 싸늘하셨습니다. 마땅히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이 또한 십자가를 져야하는 억울함 때문에 우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하려는 종교 지도자들과 여전히 잠들어 있는 당신의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인하여 우셨습니다. 
 
▪ 믿음, 전부를 걸고 가는 길


  우주의 역사도 이 세상도 믿음이 없이는 알 수도 없고 이해도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으니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 재산목록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모든 것을 다 앗아간다고 해도 믿음은 앗아갈 수 없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인간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요소도 믿음입니다. 믿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도 가시는 곳곳마다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네가 믿음이 있느냐? 네 믿음대로 되어라. 내가 다시 올 때도 믿음을 보겠다고 하십니다. 이렇듯 믿음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열심히 살면서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것에 따라 여러분의 인생이 결정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믿음으로 설계하십시오. 믿음은 인생의 설계도와 같습니다. 어떤 건물을 지을 때도 설계도가 중요합니다. 설계도가 잘 못되면 집이 잘 못 지어집니다. 집은 잘 못 지어지면 다시 설계도를 그려 지으면 되지만 인생은 다시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신중하게 설계를 해야 합니다. 나를 설계하신 분,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 내 인생의 설계도도 잘 그립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밝히 보여주는 역할, 계시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고 창조세계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증명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진정성을 입증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보아야 바로 보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은 그분의 소유입니다. 물론 나도 내 아내도 내 자식도 내 집도 다 그분의 것입니다. 창조를 믿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입니다. 이 토대위에 예수님의 신심을 세워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제 욕망대로 살아갔기에 소망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어 구원의 길이 되어주심으로 희망의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만 살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살면 망하고 죽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기 몸을 우리를 위해 기꺼이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으로 삽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이 보이는 세상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보이는 세상은 유한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상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말미암아 생겨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보이는 세상보다는 보이지 않는 세상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보이는 세상을 따라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믿음으로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냉수 한 컵을 대접하여도 결코 상급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은 지금도 유효한 진리입니다. 
 
▪ 코로나 19와 예배

  예배를 지극한 정성으로 드려도 믿음으로 드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물을 드려도 믿음으로 드리지 않으면 손해입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봉사하지 않으면 이 또한 헛수고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헛된 일입니다. 

  가인도 아벨처럼 예배를 드렸지만 그의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장소가 문제가 아니고 예배에 믿음의 유무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기에 죽음을 보지 않고 영생하였습니다. 이제 믿음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그가 자신을 찾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과 때를 따라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임을 믿으면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좋아했지만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안에 죽어도 죽지 않는 부활의 힘이 있음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가 자신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살릴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길을 전적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나사로를 부활시킵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죽음으로 인해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사건은 후에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걸고 가는 길이 믿음의 길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 길에서만 경험됩니다.  

  이 믿음은 가만히 있으면 거저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때만 생깁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실현된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그 뜻을 위해 살기 시작하면서 생깁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을 모신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할 거룩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향해 개방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풍성함이 우리 안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놀라운 인생을 시작하십시다. 아멘.

본 글은 2020. 3. 29. 가재울녹색교회 하늘의 소리(주일설교문) '믿음, 전부를 거는 길' 요한복음 11장 17-27절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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