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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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조짐
  • 최성진
  • 승인 2020.03.2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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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조짐(시 139:1-10)

혁명의 시대는 혁명적인 인식과 혁명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교의 뿌리는 대부분 바벨론 유배 이후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북이스라엘에 이어 남유다까지 무너지면서 받은 충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남유다의 왕족 귀족들에게 무엇보다 문제가 됐던 것은 야훼가 거하신다고 믿었던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그 핵심은 야훼가 예루살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진출처 : 최성진님 페이스북
사진출처 : 최성진님 페이스북

오늘 본문인 시편에는 그런 깨달음이 반영되어 있다. 야훼는 예루살렘에만 계신다고 믿었던 그들이 하늘에 올라가더라도 그곳에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거기에 계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의 반영이 예수에게로 이어지면서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선포로 이어졌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새로운 것도 낡아지는 법인 것처럼 혁명적인 시대의 모든 새로움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퇴색해버리게 된다.

하나님 말씀이 율법에 갇힌 것처럼 복음은 교리로 전락하고 하나님나라는 천당으로 축소되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입으로만 고백하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짓 희망에 사로잡혔다. 중세의 가톨릭이 그런 존재로 전락했을 때 흑사병이 300년 가까이 유럽을 휩쓸었다. 교권은 추락했고 종교개혁을 비롯해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뉴턴 등의 발견으로 세계관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세상은 변해야 했고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낡은 세계관을 붙들고 늘어진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들이 근본주의의 뿌리이다.

종교개혁500주년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혁명적 변화를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해를 상징하는 가장 큰 사건은 세계최대장로교회라는 명성교회의 세습이었을 뿐이었다. 500년 전 면죄부보다 더 사악한 범죄인 성직 매매와 교회 매매, 세습이 빈번하게 자행되고 있던 추악한 현실의 결정판이었다. 교회는 사회의 신뢰를 잃었고 사회를 걱정하는 주체가 아니라 사회의 걱정을 받는 객체로 전락했다. 그리고 작년말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코로나가 중국과 한국을 넘어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소산일 수 있겠지만 신앙의 눈이란 모름지기 자연의 설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몰지각한 사이비 목사들처럼 자신들의 적대자를 벌하기 위해 일어나는 일로서가 아니라 우리 전체 아니 인류 전체를 겨냥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어려움조차도 감사하게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와 함께 간절한 마음을 담은 기도문들이 전달된다. 그 중 어느 목회자의 기도가 찡하게 마음에 닿았다. 

"....주님, 모이는 교회를 막으시는 것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전혀 감당하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모이는 일에만 힘쓴 것에 대한 벌처럼 느껴집니다. 우리의 믿음의 현장이 교회가 아닌 세상임을 알려 주시는 주님의 교훈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교회보다 교회 밖에서 더 빛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우리가 모두 다시 노력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와 같이 거룩한 공교회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텅 빈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동안의 나의 잘못을 참회합니다....."

이런 기도문을 포함해 이러저런 평론들을 읽으면서 흑사병이 가톨릭의 교권을 약화시키고 종교개혁의 토대를 마련해줬듯이 이번 코로나사태도 스스로 변하지 못하는 개신교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달 이상 회중예배(오프라인 에배)를 드리지 못하고 가정예배(온라인예배)로 드리는 사태 자체가 이미 혁명적 변화이다. 이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한국기독교 역사상 미증유의 사태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1918년 인류 최대의 재앙인 스페인독감이 창궐했을 때 서양교회는 예배당에서 모이는 일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 세계 5억 명을 감염시켜 5000만~1억명 가량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나자 미국에서 학교·운동장·도서관·의회를 폐쇄하고 교회들은 회중예배를 중단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발점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어려움은 역사상 초유의 사태는 아니다. 흑사병 때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성당으로 몰려들었던 가톨릭교도들이 집단 감염된 반면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 은 죽음을 무릅쓰고 남아있는 환자들을 돌보기도 하였지만 성도들이 예배당을 떠나 피신하는 것까지 금하지는 않았다. 

한국예배가 오프라인 예배의 잠정적 중단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가장 보수적이라는 예장고신의 총회신학위원장이 요청해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가 작성한 <국가적 비상상황과 공예배에 대한 신학적·목회적 성찰>이라는 보고서는 “공예배가 지극히 중요하지만 우리 신앙고백서가 가르치고 있듯이 공예배를 절대화시키는 위험에 빠져서도 안 된다”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교회가 추가 감염을 예방하고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성도들을 일정기간 격리시키는 것은 성경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레위기 11-15장의 정결법은 부정하게 된 사람이 성막과 공동체를 더럽히지 못하도록 진영 밖으로 격리시키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이후 병자를 죄인 취급하는 잘못된 관행으로 굳어져 문제가 됐지만 본래는 획기적인 보건정책의 시발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레위기와 민수기(레 15:31; 민 5:2-3; 19:20)에 제시된 정결법이 공동체를 전염병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처럼 그 제정의 목적은 시대와 상관없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안식일처럼 말이다.

코로나19 감염이 시작됐을 때 신천지가 방역당국 권고에 따라 감염 행적을 밝히고 집회를 멈췄더라면, 또는 신천지를 통해 집단 감염이 창궐할 때 가장 보수적이라는 고신의 보고서까지도 간곡히 호소했던 것처럼 모든 교회가 경각심을 가지고 회중(오프라인) 예배를 잠시 중단했다면 분명히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 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회중(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한 일부 교회들에서 확진자가 대거 발생해 교회가 신천지 못지않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일어나고 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고 미리 준비하지 못한 가운데 맞은 회중(오프라인) 예배의 중단은 여러모로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한두 주 정도로 끝날 줄 알았는데 두 배의 시간이 흐르고 얼마나 오래 이 사태가 지속될지 알 수 없어 불안한 가운데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고 부활절을 앞두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동안 형식적으로 지낸 사순절과 고난주간의 의미를 떠밀리다시피 절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있는 것 같다.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이 초유의 사태에 감춰진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지난 3월 7일 경향신문에는 “더 강한 전염병이 몰려올 것… 이대로는 또 당한다”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데이비드 콰먼이 쓴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의 번역자 강병철 씨는 인터뷰에서 “생태계 파괴 행위를 근절하지 않는 이상 전염병은 또 나타날 것”이라면서 “문제는 코로나-19가 아니다. 더 센 전염병이 올 것이다. 지금 상태로는 또 당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혼란을 겪고, 우리는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 “삶의 모든 우선순위를 바꾸어야 한다. 성장·발전·효율·속도에 중독된 상태에서 깨어나 유한하고 아름다운 이 행성에서 뭇 생명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코로나사태보다 더 심각하고 중대한 위험은 기후변화이며 그로 인한 피해는 지구 전체에 치명적일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기아문제도 이전보다 많이 호전됐지만 여전히 인류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전세계에서 매일 기아로 사망하는 사람의 수는 3만 5천명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학교와 교회와 공공건물을 열지 못하고 자영업자들이 몰락하는 어려움에 처했지만 이미 우리 주변에는 이전부터 환경변화와 기아 등의 문제로 고통당하는 이웃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교회를 비롯해 순천의 여러 교회들과 순천NCC 등 각지의 기독교단체들이 후원했던 대구경북기독인연대에서 다음과 같은 자원봉사자의 글을 보내왔다. “이 시기 가장 힘든 이들이 복지 사각 지역입니다..... 곳곳의 무료 급식 또한 전부 없어졌습니다. 방치되는 거죠. 저희가 현장에서 파악한 결과 노숙인, 쪽방 사람들, 독거노인, 장애인, 이주 노동자 등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힘들어질 거예요. 시민들 몇몇 분들이 나섰고, 이제 대구 기독교인들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또한 할 수 있는 게 크지 않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할 계획입니다.”

* 우리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가운데 회중 예배의 재개 여부를 고민할 때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의 일부는 여전히 생존과 생계를 고민하며 분투 중이다. 그런 이웃들의 어려움을 생각할 때 앞에서 인용한 한 목회자의 기도문처럼 이번 코로나 사태를 우리 스스로 변하지 않을 때 자연의 재해를 통해서라도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IT강국답게 중대형 교회들은 온라인예배를 진행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예배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예배형식보다 예배를 통한 삶의 변화일 것이다.

일부 몰지각한 목사들이 이번 코로나사태를 중국이나 신천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한 데 이어 "마스크 5부제는 666의 가장 낮은 단계"라는 설교까지 회자되고 있어 사람들의 조소를 받고 있다. 이런 심판론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무맹랑한 주장이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코로나사태를 우리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 변화를 독려하는 강제적 메시지로 받아들일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변화될 수 있다면 이조차도 감사한 일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 교훈도 주지 못하는 무의미한 희생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코로나사태 이후 많은 일들이 변하고 있다. 그 변화의 조짐을 올바르게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일상의 변화 중 하나가 마스크를 챙겨 쓰는 일과 이전보다 자주 손을 비누로 씻는 일일 것이다. 사순절 기간 동안 타인에게 해로운 바이러스와 세균의 전파를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지내면서 바이러스보다 더 빠르게 퍼져나가고 더 치명적인 부정적인 언사를 자제하는 훈련을 하기 바란다. 타인으로부터 감염된 바이러스와 세균을 씻어내기 위해 자주 비누칠을 하면서 손만이 아니라 우리의 오염된 마음도 씻어내는 훈련을 하기 바란다. 그것이 변화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듯 회중(오프라인) 예배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가정/온라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 뜻을 알려고 노력하면 우리는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오늘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하늘씨앗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함께 하시리라 믿는다. 더불어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세계에서 코로나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이 빠른 시간 안에 종결되길 바란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따라 살아가는 세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최성진님 글 순천 하늘씨앗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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