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십자가
상태바
믿음의 십자가
  • 김홍한
  • 승인 2020.03.04 10: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라는 기분 나쁜 질문, 조금의 의심이라도 있으면 그 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못할 것처럼 윽박지른다.

“나는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구원 받은 것일까? 구원은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판단하시고 주님께서 하실 일이다.

어찌 보면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은 뻔뻔한 짓이다. 강요된 구원의 확신은 모래성과 같다. 제 스스로 깊은 영혼의 밑바닥에서 늘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구원에 대한 긴장과 불안 속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깨어있는 신앙일 것이다. 순간순간 자신의 신앙을 반성하면서 산제사 드리는 것이다.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다. 그러면 믿음이 무엇일까? 믿음은 “밑힘”이다. “믿음”이라는 말은 “밑힘”이라는 말에서 왔다.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다르다. 어떤 이는 재물을 “밑힘”으로 삼는다. 어떤 이는 권력을, 어떤 이는 지혜를, 어떤 이는 인간관계를, 어떤 이는 젊음을 어떤 이는 연약한 자기 주먹을 …

예수를 밑힘으로 하고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나의 가치관으로 삼는 것이 기독교신앙이다. 생각과 삶은 온통 세속적인 가치관에 따르면서 “구원의 확신” 운운 하는 것은 엉뚱한 짓이다.

나의 밑힘이 되시는 예수를 어떻게 표현할까? 老子의 통나무(樸)를 빌려와야겠다. 그냥 통나무다. 다듬지 않은 소박함이다. 교리로 다듬어진 예수가 아니다. 필요에 의해 꾸며진 예수가 아니다. 우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예수가 아니다. 나라와 민족을 구분하는 예수가 아니다. 이단과 정통을 구분하는 예수가 아니다. 맨 처음 모습 그대로의 통나무 같은 예수, 통나무 같은 예수님을 밑힘으로 나의 십자가를 세우리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