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낮을 피하여 도망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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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낮을 피하여 도망가지만
  • 김경호
  • 승인 2020.02.2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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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교회단장후 첫 입당예배 말씀나누기

1주께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2"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3  그러나 요나는 주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길을 떠나 욥바로 내려갔다. 마침 다시스로 떠나는 배를 만나 뱃삯을 내고, 사람들과 함께 그 배를 탔다. 주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갈 셈이었다.4(그러나)주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 바다에 태풍이 일어나서,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요나 1:1-4)

지난 주 겨울 수련회 각 신도회별로 나누어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지금 우리교회에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일까? 토론하는 시간에 여신도회, 남신도회 공통으로 교회의 신도수가 좀 늘어야겠다는 의견이었다. 우리교회가 머릿숫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회는 아니지만 너무 양적으로 위축되어 있어서 무엇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실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바램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게 된다. 

작년 한해 예배 처소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서 꿈나무에 신세를 지기도 하고 임시로 1층 공간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오늘 비로소 처음 우리들의 예배 처소를 만들어 입주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처음 지하 공간을 이용하게 된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아름답지요? 아직 의자, 조명, 프로젝트, 간판 그리고 몇 가지 빠진 것들이 있지만 아름다운 성전이다. 지역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고 공연도 할 수 있고 영화나 음악감상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애를 썼다. 누구든지 찾아와서 기도하고, 차도 마시고, 모임도 하고 찾아와 쉴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다. 

어제 밤에 긴급하게 교회로 오신 교우들께서 청소하는 과정에 밖에서 등이 달린 것을 보고 여기가 어디인지 너무 예뻐서 들어와 본다며 지역 주민 한분이 첫 방문자로 오셨다. 공간을 꾸미는데 문외한이지만 아름다운 성전을 마음에 그리며 기도하면서 만들었다. 

십자가는 무지개의 십자가다. 다양한 색깔들이 조화를 이루어 가는 십자가로 가장 밝은 흰색, 가장 어두운 검정, 빨강, 파랑, 노랑, 교회의 절기 색등이 다 다르고 강렬하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만들어 간다. 그러면서도 그냥 다양하지만은 않다. 그 밝음이 또는 어두움이 모여서 집중되는 곳이 있고  모여서 힘을 내는 곳들이 조화를 이루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기도실에는 아주 현대적인 십자가가 있다. 지금 십자가는 밝은 이미지라면 기도실의 십자가는 조금 묵직하고 침착한 십자가다. 아마 사순절 절기에 앞으로 나올 것이다. 

강대상과 성찬상은 예수님이 팔을 벌려 우리를, 또는 우리가 이웃을 품어 안는 모양을 이미지로 했다. 등도 밝은 색의 등과 따듯한 색깔의 등의 한지등으로 우리 문화의 이미지를 살렸다. 교회 입구의 등은 오시는 분들을 환영하는 청사초롱의 이미지이고 중앙 등은 노아 방주와 같은 이미지다. 

교회이기도 하지만 편안한 분위기의 까페 같은 곳으로 다목적으로 만들었다. 우리만 보기엔 너무 아깝고 공간도 꽤 큰 자리다. 여러분들께서 이 공간을 새교우들로 가득 채우기를 바란다. 여러분들이 아멘하고 대답하셨는데 그 대답에 의미가 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에 부임하고 첫 설교를 했다. 설교 후 많은 교우들이 은혜받았다고 인사하고 좋아했다.  

목사님 부임 둘째 주일이 되었다. 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하고 교우들은 기대감에 넘쳐서 싱글벙글했다. 그러나 내용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설교였다. 가만히 보니 지난 주일 설교와 같은 내용이었다. 교우들은 우리 교회에 처음 오셔서 좀 혼동이 있으셨나 보다 하고 지나갔다.

셋째 주가 되었는데 목사님이 또 지난주와 같은 내용의 설교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은혜를 받았지만 같은 내용을 세주동안 반복하니 목사님이 기억력이 어떻게 된 것 아니냐? 아무리 건망증이 있어도 부임한 교회 세주 동안 같은 설교를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냐며 분노했다. 당회를 긴급 소집해서 당회원들이 목사님께 따졌다. 목사님이 답했다. 

“내가 첫 주에 여러분에게 ‘저 발코니까지 사람들을 가득 채우자’고 설교하니 여러분들이 ‘아멘!’으로 응답하고 모두 좋다고 하지 않았냐? 그런데 그 다음주일도 그대로고.... 그 다음주일도 그대로니 어찌 된 것이냐? 나는 신앙적으로 말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몸을 움직여서 저 발코니까지 가득 채울 때 까지 이 설교를 계속할 것이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거짓 맹세를 하지 않게 된다.”   

오늘 여러분들도 모두 대답 하셨다. 지켜보고 저도 오늘 설교를 계속할 수도 있다. 

요나의 생각에 가장 혹독한 폭력 집단 니느웨는 반드시 망해야할 집단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한다. 요나는 그들이 보기도 싫었고 만약 그들이 회개한다면 마음이 약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마 그들을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요나는 도망가려고 했다. 그런데 요나가 우려하던 결과가 나타났다. 니느웨의 왕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을 심판하려던 계획을 철회해 버린다. 이것은 요나에게는 치명타였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었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요나 3:4). 하나님의 계획 철회로 인해 요나는 자기가 선포한 예언이 거짓이 되고 이제 요나는 거짓예언자가 될 판이다.

예언자들의 전통에서는 심판 예언은 피할 수 없는 중심 주제다. 요나도 역시 예언전통에 서서 여전히 심판예언을 전했다. 그러나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는 심판보다는 은혜를 베푸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궁지에 몰리더라도 니느웨 멸망 계획을 철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자체를 즐기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심판보다는 구원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니느웨 백성들을 용서하신다. 요나 자신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때문에 이루어지지도 않을 예언을 하나님께로부터 강요받은 셈이다. 요나의 도피와 불평은 하나님의 메시지 주제가 변하였다는 것을 선포한다. 이제 어떤 심판예언도 기대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예언 보다는 자비를 베푸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고웬, 『구약 예언서 신학』차준희 역, 기독교서회, 2004, 333-6)

강남향린의 시련의 시간 혹독했던 어려움들이 물러가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응답하시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은 어디 밖에서 온 것만은 아니다. 우리 안에서 온다. 저도 강남향린에 부임하면서 옛 교우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초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우리 청년교우들을 비롯해서 옛 교우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핑계들이 먼저 떠울랐다. 한 냉담중인 교우를 기껏 불러냈더니 오랜만에 교회를 찾은 그 분 왈, “난 허리가 아파요. 자리가 너무 불편해서 교회 의자가 놓여지면 올께요.” 힘이 빠졌다. 그동안 부동산, 세입자, 조합, 내용증명, 재판, 소송... 이런 것들이 전부 마음을 무겁게 하는 요소이고 목회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니 내가 집중하지 못했다. 

밖에 이런 저런 이유는 모두 핑계에 불과하다. 우리 삶에서 어디 편안하고 모든 조건 갖추어진 경우가 인생에서 몇 번이나 되든가? 모든 것이 나 자신이, 우리들 스스로가 안 되는 조건을 견디며 풀어가야 할 것들이다. 그것이 삶의 과제이다. 그러니 이러 저런 이유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결론을 미리 확정하고 그 이유를 찾는 셈이다. 핑계라는 것은 안 되는 이유를 늘어놓고 그것들을 섬기는 것이다. 

요나는 하나님께 니느웨로 가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요나는 화가 나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탔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언제나 “그러나”를 말한다. “그러나”로 핑계를 댄다. 안 되는 조건을 앞세우고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찾아내서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보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도 만만한 분이 아니시다. 번역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히브리 성경에는 1장 4절 앞에도 ‘그러나’(히브리 ‘우’) 라는 전치사가 있다. 이것은 ‘그리고’ 또는 ‘그러나’의 뜻이다. 3절의 그러나는 요나의 ‘그러나’ 지만 4절은 하나님의 ‘그러나’다. 하나님의 '그러나'는 풍랑을 보내 요나가 탄 배를 뒤흔들어 놓으시고 마침내 요나를 희생시켜 바다에 던지게 만든다. 그 때에야 바다가 잔잔해졌다. 마침내 큰 고기가 요나를 삼키고 몸부림치다가 요나를 뭍에 뱉어 놓았다. 그리고 요나는 다시 니느웨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의 '그러나'는 요나가 자기 고집대로 반대 방향으로 간 것을 되돌려 놓는다. 하나님의 '그러나'는 인간의 '그러나'를 삼켜 버린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자리인데 처음부터 고분고분 따라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들은 항상 먼저 저항하고 갖은 발버둥을 다 치다가 결국은 그 길로 간다. 각자의 마음에 격정과 흥분을 가라앉히고 관조하여 보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요나는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역설처럼 자신의 진정한 운명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자기가 가려고 하는 모든 것이 끝장난 곳-거기서 비로소 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한 곳을 향할 수 있었다. 

우리가 맞이하는 좌절이나 홀로있음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를 절망에 이르게 하는 것만이 아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내쳐버려진 홀로 있음은 모든 것 속에 계신 하나님의 고적함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환희를 주고 만족을 주는 모든 느낌들이 사실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유일한 진리는 우리가 고독할 때 우리에게 온다. 그가 마음으로 홀로일 수 있다면, 그는 홀로 있음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나를 만나기 전에 나를 광야로, 사막으로 부르신다. 사막이란 꼭 지리적인 사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인위적인 기쁨이 소멸되고 하나님 안에서 재탄생하는 마음의 고독이다.

홀로 있음은 내가 건드리는 모든 것마다 나의 기도가 되고 나무에 스치는 바람도 나의 기도가 되는 곳이다. 하나님은 그 모두이시니 말이다. <고독속의 명상 91>

사십 년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 한 번도 다투지 않은 두 수도승이 있었다. 정말 단 한 번도 그들은 다툰 적이 없었다. 어느 날, 한 수도승이 다른 수도승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한번쯤 다툴 때가 되지 않았나? 어떻게 생각해?” 
다른 수도승이 대꾸했다. 
“좋아, 당장 해보자고! 무얼 가지고 다툴까?” 
“이 빵 조각, 어때?” 
“오케이. 그럼 이제부터 이 빵 조각을 놓고 다투어보자고! 자네가 시작하게.” 
한 수도승이 말했다. 
“이건 내꺼야. 내 빵이라고!” 
다른 수도승이 말했다. 

“그래? 그럼 자네가 그 빵 먹게나.” 

평화는 논쟁이나 다툼에 의하여 깨어지지 않는다. 평화를 깨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나’다. 이건 내꺼다. 그러므로 이걸 누구하고 나눠 가지는 것은 싫다고 말한다. 욕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질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주장, 나의 견해든지, 내가 친숙하게 생각하는 인간관계든지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다면, 나를 내세우는 성품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오늘의 동지를 내일의 적으로 만들 수 있다. 나의 욕심과 집착을 유지할 때 우리의 가슴은 더욱 단단하게 굳어진다. 바로 이 욕심과 집착으로 굳어진 마음이 평화의 가장 큰 적이다. 

진정한 평화는 나 자신이 자신이 침묵 속으로 들어갈 때 가능하다. 
두려움 없이 홀로 있을 용기를 가진다면
그리고 함께 하나님을 찾는 의로운 이들과 더불어 그 고독을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들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영과 친밀하게 결합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과 하나님은 모두 진리 가운데서 한 영이기 때문이다. 
그 만남은 우리들에게 진리를 바르게 볼 수 있는 능력과 빛을 
되찾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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