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기
오늘은 주현절 후 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맞아들이고 자신이 빛임을 인식하고 빛으로 살아가고자 길을 나서는 멋진 절기입니다. 이제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머지않아 나무마다 새순이 돋고 꽃을 피우고 언 땅이 녹아 새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마술사입니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봄이 오면 거짓말처럼 천지가 깨어나고 생명활동은 시작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길 빕니다.

▪ 꿀맛 똥맛
따뜻한 봄 날,
나비, 벌, 파리가 모여 서로 자기자랑을 했습니다.
꽃에 앉아 꿀을 빨고 있던 나비가 잘난 척하며 말했다.
"니네들 ~ 나처럼 우아하게 날 수 있어?"
그러자 벌이 지지 않고 말했다.
"니들이 나처럼 톡 쏘는 침이 있어?“
그러자 파리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야 니들이 똥 맛을 알아?“
▪ 홍정길의 선택
나라를 위한 기도모임에 초대형 교회 원로 및 현직 목사들이 대거 참석하였습니다. 기도모임을 시작하면서, 유기성 목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한 마음을 주신다.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권하심을 공감했다"며 기도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유 목사는 무엇이 불안하게 하는 지는 정확히 하진 않았지만 문재인 정권의 체제 문제임을 설교자로 나선 홍정길 목사를 통해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유 목사는 지금은 극심한 혼란기라고 지적하면서 성령께서 이 기도 모임을 이끌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유 목사는 교묘하게 성령을 끌어들여 자신의 입장을 주장함으로 복음을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뒤 이은 홍정길 목사의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대하 7:14)'는 설교는 그야 말로 그간 한국교회를 이끌어 왔다는 초대형교회 목사들의 수준을 의심케 하였습니다.
홍 목사는 " 기도하고 또 기도해 봐도, 이번 선거는 너무 중요하다"며 "이제까지의 선거는 대부분 좋은 사람, 친한 사람 뽑는 선거였고 정강정책을 보고 어떤 정당을 선택해야 할까 하는 선거였다"고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그것을 넘어서는 한 가지 선택을 더 해야 하고 체제를 선택해야 하는 선거"라며 "우리 문재인 대통령께서 2017년 취임 당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선포했다. 그리고 3년여 시간이 흘렀다. 너무 고통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참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 나라를 혼한에 빠뜨리는 자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계가 긴장하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광화문 광장 집회를 강행하고 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전광훈 일당과 그들과 야합하는 자한당이 아니던가요. 그들에 대한 질타는 없이 체제 전복 우려하는 추상적 메시지는 공허하게 들립니다. 물론 저는 문재인 정권이 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비하면 훨씬 합리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봅니다.
▪ 선택
오늘 성서일과는 히브리인들의 성서 신명기 30장의 말씀입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설교 모음집이며 30장은 모세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모세는 이스라엘의 최대 영웅입니다. 모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집트 제국의 식민지 시절 히브리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태어나자마자 죽음에 내몰립니다. 하지만 기적같이 살아나 바로의 딸 공주의 양자가 되어 궁궐에서 자랍니다. 하지만 그는 노예 제도 및 제국체제의 부당함을 보고 권력과 힘을 이용하여 개혁하고 노예 해방을 도모하다가 제국의 미움을 받아 광야로 추방됩니다. 그곳에서 40년을 지내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고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해방의 역사를 위해 일어납니다. 이번엔 힘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인 비폭력 평화적 방식으로 해방운동을 전개하여 바로를 무릎 꿇리고 출애굽의 거대한 역사를 일궈냅니다.
하지만 광야로 나간 히브리인들은 아주 작은 문제에도 모세를 비난하고 원망합니다. 모세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걸 보면 얼마나 고통스러웠나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와중에 모세는 하나님의 산인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 율법을 만듭니다. 십계명과 모세 율법은 그렇게 주어집니다. 율법은 히브리 공동체의 정체성을 세우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고 삶의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공동체는 틈만 나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등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모세는 너희 앞에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이 있으니 너희와 너 자신을 위해 생명을 택하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과 우상 중에 누구를 섬길 것인지 택하랍니다.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길을 따라가면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너와 네 후손이 잘 되고 번성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면 반드시 망하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과 세상 중에 어디를 택할 것인지 그 기로에 서 있습니다.
세상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는 처음 인류부터 지금까지 인류의 운명적 과제입니다. 지금도 우린 매 순간 세상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처음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따르도록 요청받았습니다. 그것은 현상의 문제만이 아니고 본질의 문제였습니다.
▪ 좁은 길과 넓은 길
인생은 선택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앞에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제시하십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좁은 길은 불편하고 위험하고 힘들지만 그 종국이 영생에 이르고, 넓은 길은 편리하여 찾는 사람이 많지만 그 길의 종국은 멸망입니다. 오늘날 생태환경문제도 이 사실 위에 있습니다. 편리와 풍요를 따르는 삶은 자연환경을 지속적으로 파괴하였고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넓은 길을 택하였습니다. 모두가 망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일지라도 생명을 살리기 위해 불편한 길을 걷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세상은 희망을 얻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으로 사는 길은 불편을 감수하고 단순소박한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모든 생명이 제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추구합시다.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 세상풍조와 하나님의 뜻
바울 사도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세상의 풍조를 본 받고 따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 뜻을 따라 살라고 당부합니다.
아울러 세상 풍조는 육신의 일을 하게 하여 멸망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의 뜻은 성령의 이끌림을 따라 살면 생명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결국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인간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시기와 싸움, 편당을 짓습니다. 하지만 영에 속한 사람은 각 자 맡겨진 대로 순명하고 일합니다. 각 자 맡겨진 일은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모두가 소중한 일입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영에 속한 일은 생명과 평화를 이루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며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모든 생명이 평화롭게 제 숨을 쉬며 사는 세상을 지어가는 일입니다. 이 일엔 자유민주주의나 사회주의 등 이념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에는 보수나 진보도 상관이 없으며 피부색도 인종도 상관이 없습니다. 독선과 배타성은 참 된 종교의 모습이 아닙니다. 포용과 배려가 참 신앙의 길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이 일을 함에 돈이 되느냐를 묻지 않고 이 일을 함에 생명이 사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그 종교가 진짜냐 가짜냐를 구분하는 것도 그 종교가 생명을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신앙이라 표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 노예와 해방
오늘 복음서의 성서일과는 마태 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5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는 제자들과 추종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산 밑에서 그저 자신들의 왜소함을 탓하고 눈치 보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민중 혁명은 언감생심 감히 생각도 못했던 그들이었습니다. 적당히 잘 보여 녹을 조금이라도 더 받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산위로 초청하여 모세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노예들을 설득하고 혁명의 주체세력으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체험과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의기소침해서 노예로 사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사람들에게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를 떠올리게 함으로 제2의 출애굽 운동을 제시하고 준행하였습니다.
예수공동체는 모세를 기억함으로 민족을 구원할 뜨거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보편적으로 임하고 있고 결국은 그 은총을 입은 개인들의 결단과 행동이 중요하였습니다. 노예가 이집트 제국과 겨루어 이김으로 해방공동체를 시작한 것이 가나안 공동체입니다. 이는 향후 인류 역사에 거대한 혁명의 기점이 되었습니다. 예수공동체는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로마 제국과 겨루었고 제국의 질서를 넘어설 새로운 체제의 공동체로 부상하였습니다.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핵심이 율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율법은 가진 자들의 애완견이 되어 있었습니다. 율법이 그 정신을 잃어버리면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예수는 비판했습니다. 예수는 그것에 분노한 것입니다. 이미 민중들의 삶을 옭아매는 율법은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 정답이었습니다. 예수는 과감하게 율법을 파괴합니다. 하지만 그 파괴는 근본적인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형제를 미워하고 바보라고 욕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지적하였고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이미 자매를 두고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간음한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율법 뒤에 숨어 자신들의 잘 못을 정당화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 반해 민중들은 그 율법의 폭력성으로 주눅 들어 꼼짝달싹 못하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었습니다. 애당초 민중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율법이 더 이상 민중의 삶을 지켜내지 못하게 되자 그 율법을 파괴함으로 다시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 인간적인 삶
지난 목요일 예수살기 회원인 권병길님의 연극을 관람하였습니다. 연극은 그의 연극 인생 40년을 조명하며 한국 영화와 연극의 큰 줄거리를 소재로 하였습니다. 퍽 의미 있는 연극이었습니다. 올해로 우리나라 연극이 100년을 맞이하였습니다. 퍽 의미 있고 신선한 이야기였습니다.
권병길님은 연극은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인간을 인간답게 말하고자 하는 예술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 존재를 보여주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연극은 세상의 모든 것을 용해시키는 용광로이며 사람도 자연도 도구도 세세한 먼지라도 다 녹여내는 자유혼이 춤추는 곳이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연극도 자본과 세상과 타협하면서 그 길을 잃었고 권력자들의 박해로 그 칼날이 무디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가난하게 그 길을 걷고 있는 연극인들이 있습니다. 창조적 소수, 그들이 세상을 구원하고 있습니다.
▪ 자본가와 노동자
지난 1월 31일, 양주의 한 피혁공장에서 보일러실 가스가 폭발하는 화재사고가 발생하여 2명이 죽고 8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이런 저런 산업재해로 연간 2500여명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안전보다는 공장운영이 더 중요하고 생명보다는 돈을 더 소중히 여기는 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재해로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죽어갈 것입니다.
쥐꼬리만한 봉급을 위해 노동자들은 밤낮없이 일을 했습니다. 비정규직이란 이름으로, 이주노동자란 이름으로, 언제 해고될지 모른 채 노동자들은 노예가 되어 갔습니다. 이제 힘들고 어려운 산업 전선엔 이주노동자들이 채워지고 있습니다. 푸른 꿈을 안고 이 땅에 들어온 그들입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자본주의 체제로 인하여 노예로 전락되었습니다. 안전장치 없이 위험에 노출되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자본가들에겐 노동이 수단이었습니다. 노동자는 돈을 만드는 기계였습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들은 천문학적인 부를 대물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대한 폭력이며 살인 행위입니다. 이젠 죽음의 외주화. 죽음의 이주화를 끝장내야 합니다.
청와대 분수대 앞은 신문고가 되었습니다. 기수 문중원님의 억울한 죽음, 그 진실을 밝혀달라고 그의 부인이 상복을 입고 피켓을 들었습니다. 화력발전소 희생자 김용균님의 어머니, 그녀도 그 옆에서 피켓을 들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도, 전교조 교사들도, 토지를 강제몰수당한 주민들도 ......
노동자들이 인간의 권리를 얻고 노동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는 참 세상은 거저 오는 법이 없습니다. 피눈물 속에서 자라는 사랑, 우리들의 거룩한 분노, 절망의 벽을 깨뜨릴 그 희망으로만 옵니다.
▪ 두 편의 영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오스카상을 그것도 네 개 부문에서 수상하였습니다. 이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영화 역사를 다시 쓰게 하였습니다. 오스카 최고의 상인 감독상과 작품상을 휩쓸었습니다. 비영어권. 영미권 밖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 대한민국 영화에서 드러났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세계도 놀랬고 우리나라 국민들도 놀랬습니다.
기생충은 점점 더 심각해지는 양극화를 다룬 영화입니다. 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1%의 부자들이 50%의 부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단순 월급쟁이가 영화 속 부자의 집을 사는 데 걸리는 시간은 547년이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경제적 약자들의 삶을 그림으로 세계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이는 방탄소년단이 세계 속에 한국의 노래를 알린 것이라면 이번 기생충은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영화의 새로운 페이지를 여는 단초입니다. 세계가 열광하고 있으며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이번 오스카상에 후보로 오른 또 다른 영화가 있습니다. 세월호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부재의 기억이란 다큐영화입니다. 진살을 규명하고 기억관을 짓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이야기였다던 유가족의 말이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250명의 아이들 이름표를 갖고 시상식장에 들어갔다는 아이들의 어머니는 세월호 사건은 세계인이 기억해야하는 비극적 사건이라고 말하곤 이 영화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세월호 사건을 알리는 계기가 되길 소망했습니다.
▪ 운전기사의 선택
어느 날 버스가 빠르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좁은 커브 길에서 아이가 뛰어나왔습니다.
갑자기 닥친 일이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찰나처럼 짧은 순간에 운전기사는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버스가 아이를 비켜 가면 커브 아래로 굴러 전복될 것이고 그렇다고 아이를 살리자고 버스가 뒤집혀 더 많은 사상자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운전기사는 순간 선택을 했습니다.
버스는 아이를 쳤고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승객들은 놀라서 밖으로 나와 운전사를 가리키며 "저 살인마!" 하고 흥분해서 당장이라도 몰매를 칠 것 같았습니다.
운전기사는 아이를 안고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하였습니다.
그때 버스 안에서 한 청년이 내리며 흥분한 승객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잠깐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줄 아십니까? 바로 저 운전기사입니다."
▪ 좋은 선택
그렇습니다. 우린 내 목숨 아니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외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겐 하나님께 나가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 창조해 가야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길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제 우리 그 길에 함께 나섭시다.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