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하고 존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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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하고 존중하라
  • 백창욱
  • 승인 2020.02.16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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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20. 2. 16) 존중하고 존중하라(마태 5:21-37), 주현절 후 여섯 번째 주일

2월 14일 금요일, 반가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보도연맹 사건에서 첫 무죄판결이 나왔습니다. 보도연맹 사건은 1950년 한국전쟁 중에 이승만정권이 좌익혐의만으로 시민 십만에서 삼십여 만 명을 집단학살한 참극입니다. 마산에서만 보도연맹에 속한 시민 141명이 억울하게 사형 당했는데, 그 중 희생자 유족 6명이 낸 재심청구에서 70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판사는 당시 영장 없이 체포했으며 이적행위를 한 범죄증명을 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3살 때 아버지를 잃은 노인은 칠십 평생 아버지의 무죄를 밝힌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같은 날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 재심에서도 35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은 1985년 9월 국가안전기획부가 해외 유학생들을 강제 구금하고 고문해서, 간첩이라고 발표한 사건입니다. "안기부에서 두 달 가까이 있으면서 폭력과 고문에 못 이겨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들이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했다고 얘기하라'고 해 놓고 잠시 후 다시 질문을 했을 때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외울 때까지 때렸다.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자신을 돌아볼 때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증언자 강용주는 고문에서 살아남아서, 지금은 광주에서 고문 생존자를 위한 트라우마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희생자인, <야생초편지>로 유명한 황대권씨는 판사가 ‘무죄’ 하는 순간 방청석에서 환호성이 터지고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황대권씨는 기자가 묻는 소감에서 “이 판결은 이 땅에 비이성적 반공독재를 마무리 짓는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야만의 시대를 거쳐 왔습니다. 비록 야만의 시대 때는 국가폭력에 쓰러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은 국가폭력을 단죄하여 역사의 정의를 세우고 다시 살아납니다. 이렇게 차근차근 분단의 질곡을 극복하며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조금씩 전진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 민족이 미제점령 75년 세월에 한반도가 허리 잘려 신음하지만 이 수난의 세월도 머지않아 돌파하고 자주독립의 나라를 맞이할 것으로 믿습니다. “의식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들이 그 날을 맞이할 것이다.”


오늘 복음말씀은 매우 과격합니다.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다.” “오른 눈을 빼서 내버려라” “오른 손을 찍어서 내버려라” 과격하다 못해 살벌합니다. 이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실행한다면, 예수의 후예들은 모두 장애인이 되거나 남아나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오늘 말씀을 접하면서 내가 너무 온건하다, 예수님처럼 더 과격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이 섬뜩한 말씀들은 무엇인가요? 어째서 예수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는가요?
단서는 2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복음말씀은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또 하나. 오늘 복음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예수께서는 옛 사람에게 하는 말과 비교하여 당신의 권위로 말씀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가 말하는 더 나은 의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예수는 직접 무엇을 말씀하는가? 를 보겠습니다.

첫 번째 사례는 살인에 대해서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살인이 일어나나요? 사인 간에 원한이나 다툼, 복수심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가공할 살인은 다른 데 있습니다. 가장 많은 살인은 국가가 저지릅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보면, 잔돈 몇 푼 훔친 사람을 극형에 처합니다. 이 문제로 주인공 라파엘과 추기경이 논쟁을 벌입니다. 모세의 계율에는 절도범들은 교수형에 처하지 않고 단지 벌금을 물었을 뿐이라고. 그러나 교회 권력이 하나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질렀는지를 고발합니다. 역사에서 이런 사례는 무수합니다. 보도연맹 가입자 십만 명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세력은 국가뿐입니다. 한국전쟁 전후 백만 명이 죽은 민간인학살의 범인도 국가입니다. 여섯 번째 계명을 가장 심각히 지켜야 하는 대상은 국가권력입니다. 이 계명을 사인 간 계명으로만 국한하는 건은 거대한 세력의 집단적인 범죄를 눈감아 주는 또 다른 잘못입니다. 국가권력이 시민을 존중하지 않으면 어느 시대든 간에 비극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민주시민은 국가권력이 사람을 존중하도록 끊임없이 견제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태 저자가 지금과 같은 시민의식으로 일세기 로마제국의 폭력을 고발, 단죄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 대신 가장 근본적인 처방을 했습니다.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 이면에 있는 마음의 문제에 천착했습니다. 형제자매에게 성내지 말라고,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말을 하지 말라고. 존중하라고.  


또 하나 눈여겨 볼 대목이 있습니다. ‘형제와 자매’라는 표현입니다.(22-24절) 형제와 자매를 나란히 표기합니다. 고대 시대 여자의 사회적 위치, 계급 등을 생각할 때, 남성과 여성을 시종일관 동등하게 표기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나라 의로만 가능합니다. 여성을 소유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존중했다는 뜻입니다. 살인에 대한 말씀 하나만 봐도 예수의 하나님나라 윤리가 얼마나 사람을 차별 없이 위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 간에 시비가 벌어져서 고소하고 법정에까지 가는 일들은 왜 일어나나요? 존중심이 없어서입니다. 저도 분쟁현장에서 분노만 가득했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푼까지 다 갚은 후에야 끝났습니다. 존중하십시오.

‘간음하지 말라’는 칠계명입니다. 간음이라는 단어를 직접 말하는 게 품위를 해치므로 칠계를 어겼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마음의 문제를 말합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오른 눈과 오른 손의 범죄를 말합니다.


“네 오른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빼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29,30절) 이 말씀은 상징인가요? 아니면 문자 그대로인가요? 교회에서 음욕 죄로 눈이나 손을 절단했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유명한 교부 오리게네스는 정욕 때문에 죄를 짓지 않으려고 스스로 거세했다고 합니다, 실제 눈과 손을 절단해도 이게 욕망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쪽 눈이나 손으로 또 죄를 짓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오른 눈이고 오른손인가요? 인도나 인도네시아에서는 손으로 밥을 먹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오른손으로 먹습니다. 왼손잡이도 밥 먹을 때는 오른손으로 먹습니다. 고대 유대인들도 오른쪽을 왼쪽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왼손은 밑을 닦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른쪽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신체의 하고많은 부위 중 왜 눈이고 손인가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을 때, 그 유혹이 어디서 시작하나요? 불순한 눈길에서 시작합니다. 불순한 눈으로 여자의 동태를 훑어봅니다. 손은 왜 문제인가요? 불순한 눈으로 시작한 음욕을 손으로 실행합니다.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로 죄를 짓습니다. 정말 오른 눈이, 오른손이 나를 죄를 짓게 하면 잘라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면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말입니다. 또 단호한 조치가 자신의 의가 되면 어떡하나?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단 단호한 조치를 하고 나서 말하십시오.

이혼에 대해서 옛 사람들은 이혼증서 한 장으로 쉽게 아내를 버렸습니다. 이혼증서 형식은 이렇습니다. 남편 아무개는 아내 아무개를 소박하니 다른 남자가 데려가도 상관 않겠다는 내용을 적은 다음 남편과 두 증인이 서명하고 장소와 날짜만 쓰면 됐습니다. 그럼 여자는 하루아침에 존재를 박탈당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런 못쓸 이혼형식으로 남자가 여자를 함부로 소박 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여자가 음행한 경우에만 이혼이 가능하다고 못을 쳤습니다. 이 이혼윤리 역시 바닥에는 사람존중이 깔려 있습니다.

맹세에 대한 윤리에서 ‘예’ 할 때는 ‘예’라 하고, ‘아니오’ 할 때는 ‘아니오’ 하라고 합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말하면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예’와 ‘아니오’만 말하기도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권력자의 압력으로 권력자의 수하는 ‘예’와 ‘아니오’를 권력의 입맛에 맞게 말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시국 재판에서 권력 수하들은 거짓증언을 능사로 합니다. 또 진영논리에 따라, 이념이나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예’와 ‘아니오’를 뒤집는 건 일상이 됐습니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나라 윤리는 바늘구멍 같습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의식하고 분투하는 사람이 위선적이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계신 하나님 현존을 의식하고 사람을 존중하고 평화하며 사십시오. 자신의 존재를 시험하는 그런 위기가 닥치지 않기를 구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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