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영으로 서로서로 천국을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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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영으로 서로서로 천국을 누리십시오
  • 백창욱
  • 승인 2020.02.0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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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 마태 5:1-12 “영이 가난한 사람”

천종호판사를 아시는지요?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입니다. 창원지법에 있을 때 소년부 전담재판을 했습니다. 일명 호통판사입니다. 재판모습을 봤는데 가해자는 물론이고 부모, 교사를 가리지 않고 따끔하게 호통 칩니다. 인터뷰에서 기자가 호통 치는 이유를 물으니까 소년범 재판을 이삼 주에 한 번씩, 백 명 정도를 재판해야 합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조근조근 말을 할텐데,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아이를 위한 마음을 호통으로 표현합니다. 천판사의 재판은 호통만 있는 게 아니고 감동과 눈물도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 또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잘못한 일을 말하고 무릎 꿇고 용서를 빌게 하는데 꼭 열 번을 말하게 합니다.

“아무개야 미안하다. 용서해라”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아들아, 사랑한다” “엄마가 네 마음 이해 못해서 미안해” 같은 말을 열 번 시키는 이유가 뭐냐면, 열 번을 채우기 위해 계속 하다보면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눈물로 뉘우치고 용서와 공명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천판사는 말하기를, 악질청소년범죄는 전체 범죄 중 1%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 외는 대다수 가난한 집 결손가정에서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는 청소년들이 범죄에 내몰리는 경우라고 합니다.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선처한다고 풀어주면 또 같은 범죄로 들어오는 구조적 문제가 있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청소년그룹홈을 만드는 운동을 합니다. 그룹홈에 들어온 청소년들은 재범율이 현저히 줄어든다고 합니다. 천판사가 청소년들과 가까워진 이유가 있습니다.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은 주로 우수한 아이들 편에 서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부자집 아이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교사가 탄원서도 잘 써 주는데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집 아이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나라도 버림받은 아이들의 대변자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소년부 전담판사가 됐다고 합니다. 

저는 죄책고백을 열 번 시키는 이유가 특히 공감이 갔습니다. 한 두 번은 판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형식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 번까지 가게 되면 진심이 우러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소성리에 가면 빠지지 않고 하는 일이 있습니다. 진밭교 기도회와 사드불법기지 앞 평화행동, 소성리와 김천집회참석, 생명평화 백배 등을 고정으로 합니다. 이 일은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이고 혼자 고정으로 하는 일이 있습니다. 마을회관 화장실 청소를 합니다. 화장실이 세 칸인데, 휴지 태우고 변기 닦고 물로 씻어냅니다. 처음, 연대자들이 많이 올 때는 이 사람도 하고 저 사람도 하고 그랬는데, 사드철회투쟁이 길어지니까 오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고, 자연히 화장실 청소도 뜸해졌습니다. 그래서 매주 가는 김에 고정적인 일이 됐습니다. 청소를 계속 하다보면 하는 일이 익숙해집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사랑스러워집니다. 배설물이 묻은 곳을 솔로 문지르는데 꼭 설거지하는 기분입니다. 내가 밖에서만 이렇게 하면 안 되지 하는 생각으로 집에서도 자주 하려고 노력합니다. 청소 후 상쾌함은 해 본 사람만 아는 기분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 청소하다가 문득 한 가지 성찰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구나 생각합니다. 대구에서 활동할 때는 주로 맡은 일이 단체나 대책위 대표 같은 자리였는데, 그런 자리보다는 소성리에서 화장실 청소하는 게 딱 내 깜냥에 맞다는 생각입니다. 내 기분도 좋고, 모두를 편하게 하니 얼마나 보람 있습니까. 앞으로도 소박한 자리에서 민중과 함께 있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국가폭력이 난무하는 분쟁현장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에게 절실한 게 무엇인가요? 우리가 투쟁하는 일이 정당하다, 옳다는 신념입니다. 신념이 굳게 서야 계속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백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이런 자리에 최적화됐습니다. 제가 그동안 경험하고 공부한, 지배이데올로기와 제국신학을 타파하는 이론과 선전을 전파하는 게 저의 소명입니다. 그 소명을 민중과 함께 나누는 일이야말로 나의 전도요 선교입니다. 예수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제국을 타파하는 민중의 소리입니다. 우리도 예수의 후예로서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산상수훈의 첫 번째 단락입니다. 마태복음은 모세와 율법을 흉내 내는 형식이 많습니다. 예수의 탄생이야기에서도 모세의 탄생을 떠올리는 이야기들이 출현하듯이, 오늘 말씀도 모세의 십계를 떠올립니다. 모세는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십계를 받았습니다. 비슷하게 예수도 산에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다른 게 있습니다. 말씀의 출처가 다릅니다. 십계의 출처는 하나님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출 20:1)
그런데 산상수훈의 출처는 예수입니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마 5:2)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게 아니고 당신이 직접 말씀합니다. 물론 산상수훈도 예수가 어느 날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로 말씀한 건 아닙니다. 후대 편집자가 편집했습니다. 실제 현장에서 글을 쓰듯이 일목요연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 다듬고 정제해서 읽기 좋게 하는 편집 작업은 필수입니다. 편집이지만, 예수의 정신, 삶과 말씀이 백 프로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팔복은 예수의 영성이 집약된 말씀입니다. 역사 예수가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 본 제자들이 예수의 영성을 온전히 깨닫는 자리에 이르렀을 때, 예수의 영성을 팔복으로 서술했다고 봅니다. 제자들의 영성이 예수의 영성을 이해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영이 가난했기에 죽을 때까지 민중을 위해 자기 몸을 투신했습니다. 영이 가난하지 않으면 예수도 노선을 바꾸거나, 전술전략을 바꿔서 지배세력과 타협하거나 다른 수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가난한 영을 고수했습니다. 오로지 천국만을 살았습니다. 땅의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초연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습니다. 

저는 매일 기도할 때, 환영기도와 팔복을 차례로 반추합니다. 관상에 들어가기 전 또는 관상이 끝난 후, 팔복으로 시작하거나 마무리합니다. 팔복을 반복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향심기도를 할수록 되레 내 성정은 기도본향과 더 멀어지는 것 같아서 낙심, 좌절할 때가 많습니다. 왜 기도는 꾸준히 하는데 내 성정은 이 모양인가? 예수님의 영성에 가까이 가는 길이 뭘까? 생각하다가 팔복이 떠올랐습니다. 천종호판사가 고백을 열 번 시키듯, 저도 팔복을 반복해서 나의 내면인자로 새기려고 합니다. 

팔복은 다 연결돼 있습니다. 한 사람이 팔복에서 어느 항목은 잘 하고 어느 항목은 못하고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전체가 하나로 연결돼 있어서 같은 영성이 이런 때는 이 모습으로 저런 때는 저 모습으로 나타납니난다. 예를 들면, 영은 가난한데 애통하지는 못한다? 애통은 잘 하는데 온유하지 못하다? 이런 주장은 말은 되지만 실제는 맞지 않습니다. 영이 가난한 사람이 애통도 하고 온유하고 자비하고 평화합니다. 영이 가난하지 않으면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지복은 나머지 지복의 출발점입니다. 왜 영이 가난한 게 첫 번째 지복인가요? 영은 한 사람의 모든 것입니다. 한 사람의 존재가 다 담겨 있는 지성소입니다. 사람의 지성소는 가장 깊은 곳, 가장 내면에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마음의 생각, 정서, 인격, 성격, 성향, 의식, 이념 등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영의 작용입니다. 다 관념적인 것들이지만 이 관념들이 모여서 나의 몸을 이루고 육신생활을 합니다. 말하자면 영이 어떠하냐에 따라 한 사람의 삶이 그대로 됩니다.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화장실 청소를 하는 영성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이 일이 내 깜냥에 맞다는 성찰의 출처는 무엇일까요? 저는 첫 번째 지복 말씀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영이 가난하므로 작고 소박한 것에 만족합니다. 다른 데 있는 것보다 민중 속에 있는 것이 편합니다. 외양이 화려하지 못하고 볼품없더라도 마음이 평안하고 자족합니다. 가난한 영을 구하십시오. 하나님 은총이지만 구하는 사람이 얻기도 합니다. 가난한 영으로 서로서로 천국을 누리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본 글은 주일설교문(20. 2. 2) 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 마태 5:1-12 “영이 가난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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