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그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를 불러달라고 사람을 들여보냈다. 32 둘러앉았던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34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 3:31-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35절)

자주 듣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실제 잘 적용하지 못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가족이기주의, 가족중심주의를 넘어서길 바라십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통설을 반박하시는 거지요.
당신 친히 십자가상에서 팔을 벌려 세상으로 한없이 내어놓으시고 세상 모두를 기꺼이 초대하시는 것처럼
팔을 밖으로 펼치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사랑하는 것 외에 그 무엇이겠습니까!
진실하되 식별력있게 사랑하는 것, 열정적이되 결국 자비를 실천하는 것,
생명과 평화를 사모하여 거짓과 구조악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랑, 그것에 투신한 것,
하느님 뜻일 터입니다.
그런데 흔히 사랑에 폭과 깊이를 정하고 경계선을 긋습니다.
가족도 분명 사랑의 대상이지만
가족 사랑이 경계선을 가지게 되고 패거리 사랑이 되면
그것은 하느님 뜻이 아니겠지요.
극우성향 유투브 닮아가는 조중동 언론의 패거리 분열책동은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이번 설 연휴 직전에 뿌린 선동적인 기사가
하늘 뜻에 정면도전하는 줄 삼척동자도 알만합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bar/925767.html?_fr=mt1
고향사람들도, 학교 동창들도 분명 사랑의 대상이지만
그 사랑이 경계선을 가지고 패거리 사랑이 되면
해서 새로운 악을 조장하게 된다면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동네이웃도, 조직 동지들도, 교우들도 분명 사랑의 대상이지만
그 사랑이 경계를 긋고 팔을 오무려 담을 쌓는 사랑이라면
하여 모든 피조물과의 교감을 차단하는 사랑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악을 미워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배타적일 수는 없습니다.
아픈 곳에 더 집중하더라도
억조창생과 선을 긋는 사랑일리가 없습니다.
팔 안으로 굽는 사랑은 정을 표방한 독점욕에 지나지 않을 터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하느님 뜻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풀었습니다.
참된 사랑은 예수처럼 희생을 감수하는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죽고 다른 '나'들이 사는 것을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내 가족이 죽어 다른 가족들이 살 수 있다면 그 죽음을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내 교회가 죽어서 다른 교회가 살 수 있다면 그 길을 기쁘게 갈 수 있는 사랑입니다.
교회가 죽어 세상이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사랑해낼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그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아픔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내 가족이든 내 동료이든 어느 한 사람이라도
예수처럼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 될 때라면
더욱 사랑해야 될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겠지요.
쫓기고 내몰리고 궁핍하고 허기져 있으며 억울한 누명 쓴 이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느님 뜻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게 될 터입니다.
오늘 눈 뜨면서 만나는 모든 이가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지요.
예수말씀처럼
진정한 가족사랑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내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오늘 내 인생은 성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 이루는 것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