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나움, ‘돌이켜라, 돌아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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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 ‘돌이켜라, 돌아서라’
  • 백창욱
  • 승인 2020.01.28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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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20. 1. 26)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

경자년 한 해도 주님 은총으로 의식과 분별에서 더욱 진보하시기를 빕니다. 
영화 가버나움을 아시는지요? 작년 1월에 개봉한 영화입니다.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출연자들 전부가 전문배우가 아니라 보통 사람입니다. 보통사람들이 자기들 실상을 연기했습니다. 영화 무대는 레바논입니다. 주인공 자인가족은 시리아 난민입니다. 자인은 베이루트 거리에서 캐스팅됐습니다.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정확한 나이를 모릅니다. 치아검사를 통해 열두 살 가량입니다.

영화 첫 장면이 매우 도발적입니다. 법정인데, 소년교도소에 갇힌 자인이 부모를 고소해서 재판이 열립니다. 원고는 자인, 피고는 부모입니다. 판사가 고소이유가 뭐냐고 묻자 자인은 ‘나를 태어나게 해서’ 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자인가정의 일상을 비춥니다. 동네는 빈민촌입니다. 아버지는 무위도식 백수입니다. 자식만 나 제낍니다.(자인이 부모에게 가장 크게 분노하는 이유입니다.) 자인이 실제 가장입니다. 가짜처방전으로 마약성분 약을 사 오면, 엄마와 함께 빻아서 마약 쥬스를 만들어서 판매합니다.

그리고 집주인 아사드의 슈퍼에서 배달 일을 해서 동생들을 건사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열한 살짜리 여동생 사하르를 아사드에게 시집보냅니다. 자인은 필사적으로 여동생을 붙잡지만 부모는 강제로 사하르를 팔아넘깁니다. 자인은 그런 부모를 견딜 수 없어서 가출합니다. 가출했지만 갈 데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놀이동산에서 청소일하는 이주노동자 라힐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라힐에 집에 얹혀삽니다. 알고 보니 라힐도 갓난애 요나스를 맡길 데가 없어서 놀이동산 화장실 한 칸에 숨겨 놓고 일을 해 왔습니다.

자인이 오고부터 요나스는 자인이 돌봅니다. 그런데 라힐도 불법체류자입니다. 가짜체류증이 만료가 다 돼서 다른 체류증을 만들어야 하는데, 돈이 턱없이 모자릅니다. 궁여지책으로 머리를 잘라서 모자란 돈을 마련했는데 그만 단속반에 걸려서 잡혀갑니다. 라힐이 잡혀가고 나서 영문을 모르는 자인은 요나스를 건사하느라 악전고투 합니다. 소년가장의 강한 생활력을 살려서 겨우겨우 살아갑니다.

처음에는 대책이 없어서 굶고 살다가 옛날 실력을 발휘합니다. 가짜처방전으로 약을 구해서 마약쥬스를 만들어 판매해서 돈도 조금 모읍니다. 자인의 생활력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라힐의 집이 월세를 내지 않아서 주인이 집 자물쇠를 바꿔버려서 집에도 못 들어가고 알거지로 거리로 쫓겨납니다. 생존력에는 어지간한 자인도 자신의 처지가 너무 힘들어서 눈물을 흘립니다.

자인은 하는 수 없이 업자를 찾아갑니다. 업자가 그전부터 자인과 요나스를 유럽으로 보내 준다고 계속 꼬셨기 때문입니다. 서류를 만들어야 하니 증명서를 떼 오라고 해서 다시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여동생 사하르가 임신 합병증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사하르 역시 법적 서류가 없어서 병원에서 안 받아줘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자인은 분노에 차서 칼을 들고 아사드에게 달려가 그를 찔렀습니다. 다행히 아사드는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소년교도소에 갇힌 것입니다. 

영화는 자인을 통하여 아이들의 실존을 고발합니다. 자인은 아동학대를 고발하는 TV 생중계에 출연해서 교도소 실상을 알립니다. “교도소는 사람 사는 데가 아니에요. 사슬, 호스, 혁대로 때리고 욕설로만 말해요. 지옥같아요. 사는 게 개똥같아요. 제 신발보다 더러워요.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어요” 그리고 재판정에서도 판사에게 말합니다.

“애를 그만 낳게 해주세요. 애들을 돌보지 않는 부모가 지긋지긋해요.” 다행히 자인의 처지가 알려지고 재판도 잘 돼서 석방됩니다. 그리고 경찰의 급습으로 업자의 소굴도 들통 나서 요나스도 엄마에게 돌아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자인이 사진을 찍는 장면입니다. 이 끝장면에서도 자인의 주체성이 나타납니다. 사진사가 사진을 찍으려고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이라고 말하는데, 자인은 당신이 말하는 오른쪽이 나에게는 왼쪽이라고 대꾸합니다. 영화 내내 한 번도 웃지 않은 자인은 사망신고가 아니라 신분증 사진이니 웃어보라는 말에 처음으로 웃음 짓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끝납니다. 

영화 후 자막을 통하여 출연자들의 그 후 소식을 알려줬습니다. 자인과 가족은 유엔난민기구의 도움을 받아 2018년 8월 노르웨이에 정착합니다. 자인은 15살에 생애 처음으로 학교를 다닙니다. 불법체류자로 억류된 라힐도 요나스와 함께 케냐로 돌아가서 안정적인 생활을 합니다. 자인의 여동생 사하르는 베이루트를 벗어나서 유니세프의 특별지원프로그램으로 학교에 다닙니다. 제작진은 영화에 출연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돕기 위해 가버나움 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제가 “가버나움” 영화 이야기를 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운동의 첫 번째 거점이 가버나움입니다. 그런데 가버나움 운명이 참 기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태 저자는 예수의 가버나움 정착이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성취라고 합니다. 예언내용은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입니다. 그러나 가버나움은 고대나 현재나 여전히 어둠에 싸여 있는, 그늘진 땅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기원전 8세기에도 그랬고, 이사야 때부터 700년이 지난 일세기에도 어둠에 싸여 있는, 그늘진 땅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또 이천년이 훨씬 지난 21세기에도 영화 “가버나움”을 통해 볼 때, 여전히 흑암의 땅입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내일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냥 삽니다. 자인의 고소에 자인 부모는 나도 자인처럼 이렇게 태어나서 자랐을 뿐이라고 호소합니다. 부모도 딱히 다른 수가 없는 겁니다. 아사드는 너무도 어린 신부 사하르가 임신 때문에 죽은 것을 변명하기를, 장모도 그 나이에 결혼해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어서 괜찮을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모두 대책없이 그냥 사는 것입니다. 복음은 어둠에 싸인 흑암의 땅에 예수가 큰 빛이 됐고 빛을 비추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그 선언과는 달리 현실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나요? 예수는 외쳤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런데 마태 11장을 보면 가버나움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화가 있다. 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는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마 11:23) 예수께서 회개하지 않는 마을들을 꾸짖는데, 가버나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예수운동의 첫 거점이지만, 회개하지 않는 불명예를 안았습니다. 

예수가 말씀하는 회개는 무엇인가요? 지난주에 회개는 단순히 죄의 뉘우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지배하는 정죄사회에서 그렇지 않아도 죄의식에 빠져 있는데 그들에게 죄를 뉘우치라는 개념으로 회개를 말했을까? 회개는 전환입니다. ‘회개’의 그리스말 ‘메타노이아’는 돌이키는 겁니다.

개인으로는 기성문화로부터 습득한 정체성을 넘어서 마음 너머 내면에 계신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정치적으로는 기득권 세력이 유포하는 지배이데올로기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가버나움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증거로 기적을 체험했지만 그 기적이 새로운 세상으로의 초대인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자인부모는 자녀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투철히 고민하지 않고 그냥 본능에만 충실해서 아만 나 제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는 현실은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국의 노동자 대중은 같은 노동자를 편들지 않고 부자선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원인이 지배 이데올로기이든 매체의 선전이든 자신들에게 부당한 이론인 것을 간파하고 분별해야 하는데 그냥 지배자가 유도하는 대로, 살던 대로 삽니다.

분단세월이 75년인데, 남북일치를 구하기보다는 여전히 한미동맹 신주단지에 절절 맵니다. 그래서 분단을 극복할 전환을 하지 않습니다. 기후위기가 갈수록 심각하지만 우리의 생활방식은 그대로입니다. 이런 질서를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어둠에 싸여서 그늘진 세상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가버나움의 현실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가 목놓아 외친 구호,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에서 ‘회개하라’ 대신에 ‘돌이켜라, 돌아서라’로 바꾸십시오. 이 선포를 경자년 한 해 내 마음에 깊이 새기십시오. 마음을 각성시키고 나와 세상을 전환시키는 동력이 되게 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글쓴이 백창욱님의 마태 4:12-17 “가버나움”, 주일설교문(20. 1. 26)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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