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곧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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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곧 희망이다
  • 김기원
  • 승인 2020.01.14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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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세례 기억주일 성서정과, 이사야 42:1-9, 사도행전 10:34-43, 마태오복음 3:13-17 (시편 29)

13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오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15 예수께서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은 예수께서 하자 하시는 대로 하였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것이 보였다. 17 그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 3:13-17)

예수가 세례를 받았다. 가난한 민초들과 철저히 하나되었다. 거기에서 하늘의 정의가 드러났다고 성서는 고백한다. 우리가 민중의 한(恨) 그 복판으로 들어설 때 하늘 뜻이 이뤄진다는 예표이다. 예수의 길을 제대로 걸어갈 때 그리스도인은 비로소 세상의 희망이 된다.
예수가 세례를 받았다. 가난한 민초들과 철저히 하나되었다. 거기에서 하늘의 정의가 드러났다고 성서는 고백한다. 우리가 민중의 한(恨) 그 복판으로 들어설 때 하늘 뜻이 이뤄진다는 예표이다. 예수의 길을 제대로 걸어갈 때 그리스도인은 비로소 세상의 희망이 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7절)

오늘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주님이요 스승이신 예수가 다른 운동 그룹의 리더에게 세례받았다는 사실은 밝히기 부끄러운 팩트였습니다. 해서 마태오복음서는 회개의 세례가 필요하지 않으신 분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자기비움을 통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드러났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또 한 형태의 공현(Epiphany) 사건이 됩니다. 곧 오늘 교회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보다 그 세례과정을 통하여 당신께서 참된 ‘신의 아들’로 드러나셨음을 기억한다고 고백합니다.

초기에 형성된 기독론에 의하면 강생 자체가 하느님의 자기비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 사회에서도 돋보이는 존재가 아닌 그렇고 그런 민초들과 한 통속이 되고자 하는 주님이십니다. 세파에 찌들려 고통스러워하며 구조화된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보통사람들의 처지로 들어가, 죄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어울리고자 하시는 것이 주님의 세례였습니다. '죄인'들과의 소통을 위해 죄인의 길을 마다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 뜻이었고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세례받음은 모욕과 멸시, 그리고 비참한 죽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루가 12:50), 혹은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 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그런 세례를 생각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물세례를 받다, 욕 세례를 받다 할 때의 세례가 바로 그런 세례입니다.

오늘은 요한에게서 죄인들이 받는 물세례를 받으시지만 마침내 스승님은 욕세례를 받으며 죽음의 세례로 생을 마치십니다. 스승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인 그 정의로운 세례의 길을 걸으셨고 우리에게도 그런 과정을 따라오기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례의 과정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로 인정되듯이, 우리도 그러한 세례를 통과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하이라이트는 자기를 비우신 예수님을 향한 하느님의 선언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7절)

원래 왕의 대관식에서 사용되었던 시편 2편의 말씀과 이사야서 야훼의 종 첫째 노래(이사야 42:1-9)가 오늘 세례를 기꺼이 받으신 예수께 모아졌습니다. 비우고 낮추는 예수야말로 신의 아들(왕)이요 세상의 구세주라는 선포입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드러나시듯이, 예수의 철저한 자기 비움을 통한 민중화에 하느님의 아들 되심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의 뜻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로 철저한 정의의 길을 걸으신 예수께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종, 세상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따르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드러나는 원리와도 같습니다. 우리도 스승님처럼 하느님 앞에서의 철저한 가난에 이를 때 신의 자녀됨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스승님처럼 하느님의 뜻인 정의를 이루기 위해 철저히 자신의 기득권을 비워낼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신원이 드러납니다. 이 시대의 작은 예수로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늘에서는 오늘도 같은 울림이 퍼져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구나.”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가 지배합니다. 궤변을 신앙의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SNS로 퍼나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를 통해 하늘의 복을 누린다면서 실상 가난한 이들을 등쳐먹는 일을 서슴지 않는 이들도 널렸습니다. 정의와 공평은 뒷전이고 개인의 영화만을 부추기며 가난한 세례의 길 대신 교회 혹은 선교단체 외형 키우는데 여념이 없는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이런 짓을 할 때마다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악마의 졸개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시편 첫 노래는 이와 같은 이들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다름없다고 읊습니다.(시편 1:4)

그리스도의 세례 받으심처럼 자신을 낮추지 않고 오히려 높이려 하는 자는 스스로가 비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세례받으심처럼 자신을 비우지 않고 채우려드는 이는 자신의 신원이 하느님으로부터 동떨어져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면교사입니다. 새해 새마음으로 단장하였으니 저 엉뚱한 사람들처럼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원을 파기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비우는 만큼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됩니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 뜻을 비울 때, 곧 정의를 위해 사익을 버릴 때, 사랑을 위해 비웃음과 시련을 마다하지 않을 때, 비로소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사람, 내 마음에 드는 아이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니 내가 곧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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