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도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기를.
원불교에서 늘상 하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마음공부 잘 해서 새 세상 주인 되자” 원불교가 말하는 마음공부는 ‘처처불상 사사불공’입니다. 모든 이가 부처님이므로, 하는 일마다 부처님 모시듯 하라는 뜻입니다. 정말 모든 사람을 부처로 보고 부처님 모시듯 살아가면, 그 곳은 자연히 하나님나라 평화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성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언어는 다르지만 뜻은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평화해야 합니다. 내가 평화해야 하나님 말씀이 순조롭습니다. 어떨 때 나는 평화하지 못하나요? 평화보다 분노 우울 걱정 근심에 사로잡히나요? 영적 교사인 에크하르트 톨레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에서 말하기를, 우리의 에고가 나를 흐트러뜨린다고 말합니다. 에고는 ‘마음에서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서만 유지되는 거짓된 자아’입니다. 에고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내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할 때 작용합니다. 이 책은 나와 마음을 동일시하지 말라는 권고가 계속 나옵니다. 마음에서 비롯되는 끝없는 생각의 행렬에 사로잡혀서 에너지를 소진합니다. 그 생각은 절실한가요? 지금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생각인가요? 그러면 좋겠지만, 실상은 ‘지금 여기’와는 아무 관계없는 과거나 미래의 것입니다. 톨레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과거와 미래에 빼앗기므로 지금을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내면에 의식의 빛을 비추라고 합니다. ‘마음의 생각과 거리를 두라. 가만히 응시하라.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고 관찰하라. 판단분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관찰할 때, 무의식에서 설치던 생각은 저만치 물러갑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됩니다. 무의식에서 나의 생각은 과거나 미래라는 시간에 사로잡히지만, 생각에 의식의 빛을 비추면, 생각은 힘을 잃고 나는 지금 여기에서 존재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는 의사소통 전문가인 이현경씨가 쓴 책 <영혼을 깨우는 책읽기>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이현경씨도 제가 느낀 점과 같은 말을 합니다. “다행히도 에고가 가짜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으면 에고의 망상이나 무지에서 벗어나는 일이 어렵지 않다. 톨레는 자신의 마음,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을 생생하게 의식하고 관찰하라고 여러 대목에서 제안한다. 의식의 빛을 비추기만 하면 무의식적인 것은 무엇이든 힘을 잃고 녹아버리므로, 무언가를 없애거나 바로잡으려 하지 말고 생각, 감정, 몸의 반응을 그대로 주시하며 깨어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내면과 주위에 고주파의 에너지장이 형성되어, 어둠이 빛 속에서 힘을 잃듯이 낮은 주파수의 부정적인 감정이나 무지는 작동을 멈추게 된다.” 여러분, 바라기는 올해를 시작으로 해서 남은 생애는 마음의 생각에서 깨어나서, 참 나를 찾으십시오. 지금 여기에서 자유하고 평화하는 사람이 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말씀인 요한복음 앞에는 세 복음서가 있습니다. 우선 네 복음서의 흐름을 초간단으로 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쓴 마가복음은 예수의 운동을 소개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전반부는 활동, 후반부는 수난이야기가 전부입니다. 그러다가 십년에서 이십년 쯤 더 지나서 마태와 누가 때는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더 멋진 이야기로 승화시키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는 산상설교, 누가는 평지설교같은 멋진 설교가 등장합니다. 예수의 일생을 조명하는 탄생설화도 등장합니다. 예수의 활동에서도 마가의 간단한 증언에 교회 상황에 맞도록 살을 붙이는 가필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흐른 후, 요한 때는 복음서 서술이 완전 달라집니다. 요한복음 때는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은 확고부동한 공적 신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예수의 탄생이야기를 창작하듯이, 요한은 예수의 출발점을 아예 한 처음으로 소급했습니다. 예수님의 출현을 창세기의 창조에 버금가는 사건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와 같은 어법으로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그는 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고 선언합니다. 고백이나 증언도 앞의 세 복음서보다 훨씬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예수의 세상오심은 온전히 하나님의 수준으로 승화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역사 예수는 역사를 초월하는 하나님 예수로 변모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가장 신학적으로 완성시킨 복음서입니다.
고백과 증언이 세 복음서보다 훨씬 깊어지고 풍성해졌다고 했습니다. 근거를 보겠습니다. 13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누구인가요? 예수를 맞아들인 사람입니다. 이들의 출현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합니다. 이 말은 성령으로 잉태한 예수에게 해당하는 서술입니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에서는 예수에게만 국한되었던 고백이 요한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에게까지 넓어졌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선언은 예수가 세상에 오신 뜻을 가장 기독정신에 맞게 완성한 증언입니다. 그분은 은혜와 진리 자체입니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16절)라고 고백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복된지라, 은혜에 은혜가 더하였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신앙에서는 혁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현현을 접하면 죽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벌벌 떨면서 ‘모세가 대신 말하게 하소서’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현현이 예수를 통하여 구체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가 육체가 되어 사람 세상에 계십니다. 그분을 맞이한 사람은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받은 율법의 이미지인 두려움, 규칙엄수, 징계, 심판은 지나갔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와 진리만이 충만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에 대해 증언하여 외쳤다(15절)는 서술 역시 요한복음 저자의 증언의 절정입니다. 앞의 복음서를 보면, 운동은 세례 요한이 먼저 했습니다. 요한의 운동구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이다. 이 구호를 예수가 똑같이 따라했습니다.(마태 3:2,17) 이처럼 세례 요한은 예수 운동의 원조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예수를 증언할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저자들은 세례 요한의 비중을 예수 아래 놓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말하기를 나는 물로 세례를 주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두 사람의 위치를 완전 바뀌어 놓습니다. 요한의 입으로 “그분은 사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공식화합니다. 이렇게 세례 요한의 증언도 하나님이신 예수를 위한 서막으로 말합니다. 왜 이처럼 예수에 대한 증언 내용은 뒤로 갈수록 더 깊어지고 풍부해 지는 것인가요?
병행말씀 엡 1장이 말합니다. 3-14절인데 매 절 예수에 대한 고백으로 가득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무한한 복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엡 1:3) 우리에게 주시는 신령한 복에는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의 자녀 삼는 것, 죄 용서 받는 것, 모든 지혜와 총명을 주시는 것 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탁월하고 최종적인 고백과 증언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만 하나님의 뜻으로 나신 것에서 더 넓어져서 예수를 맞이하는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뜻으로 났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 모든 고백과 증언은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더욱 은총을 부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 역시 각자 예수 그리스도께 입은 은총을 더욱 깊고 풍요롭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마음공부 차원에서 말씀하자면, 거짓 자아인 에고에 휘둘린 내가 무의식에 의식의 빛을 비추어, 나의 내면에서 주님의 현존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의식을 새롭게 하십시오. 우리를 위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은총을 사모하고 누리는 복된 한 해가 되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본 글은 주일설교문(20. 1. 5) 성탄절 후 두 번째 주일, 신년주일, 요한 1:10-18 "하나님에게서 났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