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일상이 준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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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는 일상이 준비하는 삶
  • 백창욱
  • 승인 2019.12.0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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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19. 12. 1) 대림절 첫 번째 주일

마태 24:36-44 “준비하고 있어라”

교회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열렸습니다. 늘 일상 속에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주 월, 화 서울에서 겪은 소감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주보 글에 실린,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시를 민주의 낭송으로 들어보겠습니다. 예수살기 후원행사 순서지에 실린 시입니다. 이 시를 소개한 양재성목사님은 매일 예수살기 카톡에 시 한 편과 자신의 감상을 올립니다. 이 시에 대해 양목사님이 올린 짧은 감상입니다. 

“시인은 누군가에게 빚진 목숨임을 알아본다. 그래서 삶은 거룩하다. 
우리네 삶은 누군가의 희생에 서 있다. 그들 때문에 세상은 거룩하다.”
시인은 누우떼를 통해 세상 이치의 진실을 말합니다. 자신을 녹여서 소금이 되십시오. 빛이 되는 것은 어렵지만 소금은 될 수 있습니다. 

월요일 저녁, 예수살기 후원행사에 이웃종교인들도 오셔서 격려말씀을 했습니다. 원불교 교무님과 스님입니다. 공교롭게도 두 분 다 젊은 시절 기독교를 경험했습니다. 교무님은 중, 고등학교를 미션스쿨을 다녔고, 스님은 어머니가 집사여서 교회 안 가면 혼났다고 합니다. 원불교에 대한 소감을 말하자면, 사드철회투쟁은 지난한 일이지만, 그 덕에 원불교를 알게 된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진밭교 기도회는 종교화합의 현장입니다. 목사가 진행하는 기도회에 교무님을 포함하여 모두가 똑같이 참여합니다. 마찬가지로 교무님이 진행하는 기도회에 모두가 똑같이 참여합니다. 평화 공존 공생입니다. 문자주의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 예배만 보지 말고 그런 현장을 찾아가서 무엇이 중한지를 알면 좋겠습니다. 

법만스님은 지난달 초 예수살기가 영성수련회를 한 고창 선운사에 계십니다. 그 때 스님에게서 불교에 입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님 생활이 40년인데, 그 중 30년을 면벽수행을 했습니다. 지금은 불교환경연대 대표 일을 합니다. 수행하는 스님을 이판승이라고 하고, 행정 일을 하는 스님을 사판승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판사판이 나왔습니다. 두 분 말씀을 들으면서, 진리추구에는 자기 길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연이 다 다른 것입니다. 저는 그분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우애심이 생깁니다. 반면에 수구 교인이나 목사들을 보면, 같은 종교인이라는 생각이 한 터럭도 안 생깁니다. 왜 그런가요? 지향점이 완전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다음날 남영동 대공분실을 갔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이 박종철 기념관으로 바뀐다는 기사를 보고, 서울 가면 봐야지 했습니다. 남영동은 고등학교 다닐 때 매일 지나다니던 길목에 있습니다. 주택가에 생사람 잡아다 고문하고 죽이는 그런 악명 높은 건물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기념관 정식 명칭은 민주인권기념관입니다. 일층 입구 벽에 쓴 글귀가 인상적입니다. “국가폭력으로 점철되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거듭납니다.”
한 개인의 죄책고백이 아니라, 국가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한 글입니다. 국가가 저절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 긴 세월동안 민주시민들의 투철하고 끈질긴 저항과 투쟁이 국가를 견제했습니다. 4층은 복도 좌우로 조사실이 빼곡히 있습니다. 조사실 안은 다 같습니다. 욕조와 침대, 책상이 있습니다. 조사실마다 비명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방음벽을 만들었습니다. 

복도 중간쯤에 박종철 열사가 고문받다 죽은 조사실이 있습니다. 1987년 1월, 그 안에서 한 청년이 물고문을 받다 죽었습니다. 그 죽음이 민주화 시위를 폭발시키고 전두환 독재를 끝장냈습니다. 무엇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이 나라 공권력이 습관적으로 행한 고문이라는 시대의 야만을 끝냈습니다. 이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복도 끝에는 김근태가 이근안에게 23일 동안 고문당하던 조사실이 있습니다. 김근태는 결국 고문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4층 조사실만 있으면 기념관이 그저 그랬겠지만, 3층과 2층에는 독재권력의 불의와 폭력 앞에 굴하지 않고 투쟁한 시민들의 항쟁역사가 생생히 전시돼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저항이 있기에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몇 마리 누우가 스스로 악어 밥이 돼서 누우떼가 강을 건너듯이, 먼저 가신 분들의 희생 덕에 오늘 우리가 민주와 자유를 누립니다. 

오늘 복음은 인자의 오심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세미나 회원들은 오늘 본문도 대개 검정색으로 표시했습니다. 예수 당대의 말씀이 아니라, 후대가 자신들의 상황을 예수님 입을 빌어 말씀한다는 뜻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각은 인자의 오심, 인자가 오시는 날입니다. 유독 인자의 오심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쯤, 인자가 벌써 신격화됐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난주에 말씀하기를 ‘예수는 자신을 한 번도 그리스도라고 부른 적이 없다. 인자라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인자가 평범하고 소박한 호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인자도 이미 그리스도처럼 고유한 명칭으로 변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the son of Adam' 여기 아담은 창세기 아담이 아니고 대문자 아담을 써서 특별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미 예수는 특별한 사람으로서 믿는 대상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일세기 후반 사람들부터는 이미 종말신앙이 싹 텄음을 보여줍니다. 인자의 강림을 강력히 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표현이 다수 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이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37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39절)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는 시각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44절)

연속해서 문장 끝마다 인자의 오심에 대해 말씀합니다. 재림신앙은 인자가 다시 오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세기 신자들도 특정한 날에 인자가 오실 것을 기다린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 안에서 선풍적인 광풍을 불러 일으켰던 휴거신앙이나 재림신앙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일세기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똑같이 주님 재림을 기다리는데, 일세기 사람들 재림신앙은 본받고 지금 종말신앙은 폄하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 우선 우리 시대 종말신앙에 대해 판단해 보겠습니다. 다미선교회(다가올미래를 준비하자)는 시한부종말론으로 유명합니다.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날짜를 특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쪽 열광신도들은 진짜로 가산을 다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디데이가 임박해서는 교회당에 모여서 흰 옷으로 갈아입고 열광적으로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워낙 요란해서 방송사가 중계차까지 동원해서 생중계를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나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신도들은 머쓱해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교주는 사기혐의로 구속됐습니다. 한참 세월이 흐른 후 방송사에서 이들이 어떻게 사나 취재했습니다. 신도들은 풀이 죽은 채, 그때 자신이 그랬다는 것을 숨기며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왜 이런 오류를 범한 것인가요? 오직 아버지만 아시는 그 날을 특정했기 때문인가요? 하루라도 빨리 천국을 경험하기 위해 그 날을 특정한 게 그리 큰 잘못인가요? 저는 그들이 자신을 둘러싼 절망에 대한 희망을 너무 쉽게 찾았다고 봅니다. 

3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이 말씀의 뜻이 ‘특정한 날 인자가 오시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날은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이 뜻인가요? 문자 그대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볼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세기 신자들도 그들이 바라는 인자의 오심은 이루어지지 않고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징으로 봐야 합니다. 어떤 상징인가요?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버지만 아신다’는 말씀 뜻은 그 날 인자의 오심은 하늘영역이라서 우리와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이 언제일지 오매불망 기다리는 것은 전혀 무익한 일입니다. 저자가 인자의 오심을 말한 진짜 이유는 그들이 처한 상황이 워낙 깊고 어두워서 땅에서는 그들의 희망을 말할 게 없으므로, 인자의 오심뿐이라는 희망을 말한 것입니다. 즉 방점이 인자가 오시는 특정한 날을 기다리는데 있는 게 아니고 그런 기다림으로 오늘을 헤쳐 나가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날의 희망으로 오늘을 견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현존은 인자가 강림하는 그 날에만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안에 현존하십니다. 내가 경험하지도 못하는 강림을 무작정 기다리기보다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현존을 누리는 게 백 번 현명합니다. 일세기 신자들도 주님오심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 날의 희망으로 오늘을 헤쳐 나갔습니다. 

오늘 복음 전후문맥을 보면, 예루살렘 멸망 시 일어난 재난을 인자의 오시는 날로 대체했습니다. 성이 멸망할 때, 그들은 한 순간에 살고 죽었습니다. 두 사람이 밭에 있다가 생사가 갈렸습니다. 맷돌을 갈고 있다가 생사가 갈렸습니다. 이 사례를 말하는 이유는 이런 일을 당할 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처세를 잘 하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때, 한국전쟁 때, 역사에서 일어난, 수십 만 수백 만이 살해당하는 무수한 제노사이드에서 사람의 처세는 지극히 작은 부분입니다. 다만 우리가 간직해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 전혀 예상하지 않은 재난이 닥치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재난이 닥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권력과 자본이 한 통속이 돼서 노동자민중을 벼랑으로 몰기 때문입니다. 노동자 민중은 언제 자신에게 비극의 재난이 닥칠지 모릅니다. 2019년 11월 21일 경향신문은 일면 전체에, 작년 1월 1일부터 올해 9월 30일까지 중대재해로 숨진 노동자 1,200명 이름을 가득 실었습니다.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는 가슴 아픈 제목을 달았습니다. 노동자 목숨이 파리목숨입니다. 복음저자는 홍수가 날 때, 휩쓸려 간 사람처럼 되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일상과 역사를 살지 말라는 경종의 말씀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깨어 있으라고, 명심하라고, 준비하고 있으라”고 거듭거듭 말합니다. 
월간 『작은책』 12월호에서 김용균 어머니 인터뷰를 했습니다. 김미숙씨는 회사에서 받은 합의금으로 김용균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의 목숨 값으로 무엇을 하고픈 것일까요? “용균이같이 안전 무방비 상태인 비정규직이 우리나라 건설업이나 조선소라든지 너무 많아요. 이런 노동자들을 연결해서 싸울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 보자. 우리 용균이 기리는 사업이 아니라 한국에서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는 조직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에요.” 김미숙씨는 자신처럼 처음에 사고를 당했을 때 누구한테 도움을 청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재단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진짜 종말신앙입니다. 종말신앙은 기약없이, 대책없이,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 기다림은 주님이 가장 당혹할 것입니다. 그 날을 기다리는 열정으로 오늘을 변혁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이 처한 삶의 현장에서 하루하루 깨어있는 일상을 사십시오. 주님을 가장 잘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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