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참 사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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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참 사람의 길
  • 양재성
  • 승인 2019.09.17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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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있는 일 시작해봅시다

회개, 참 사람의 길
누가복음 15:1~10. 디모데전서 1:12~17

▪ 자기 정화
지난 한 주간은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이었습니다. 추석 명절 잘 쇠셨습니까? 저도 고향에 잘 다녀왔습니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가 안 계신 고향은 텅 빈 곳이었습니다. 형님 내외분이 애를 써 보지만 여전히 어머니 아버지의 빈자리가 큽니다. 그래도 고향은 어딘지 모르게 안온함을 주기도 합니다. 지난 5월 큰 조카가 혼인을 하는 바람에 식구가 한 명 늘었습니다. 오랜만에 온 식구가 반갑게 만나 덕담하고 맛난 음식 먹고 웃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조카며느리도 착해 보여 다행입니다. 추석명절예배 드리고 성묘하고 올라오는 길 너무 오래 걸려 멀미나게 올라왔습니다. 저녁엔 처가에 가서 인사하고 처가 식구들 만나 담소하였습니다. 추석은 이렇게 소소한 만남의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정화의식에 참여하고 온 듯합니다. 일상의 삶을 출발선상에 다시 세우는 정화의식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 조국장관의 임명
지난 한 주간의 핫이슈는 조국 장관의 임명과 미국 볼턴 안보보좌관의 해임이었습니다. 조국 후보자는 그 험난한 검색대를 통과하여 끝내 법무부장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조국장관 이후로 누가 장관이 되려고 할까요? 아마도 단 한 사람도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부인과 딸에 대한 의혹은 대부분 의혹으로 끝나고 있고 사모펀드와 공문서 위조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조국장관 자신에 대한 의혹은 제기되지 않았고 장관직을 수행하지 못할 만큼 문제가 있지 않다고 판명된다며 가족에 대한 의혹만으로 장관에 임명하지 않는 것은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기에 검찰개혁의 적임자라고 판단되어 임명한다며 대통령이 직접 임명 이유를 밝혔습니다. 두 달간 전 방위적으로 스캔하였지만 위장 전입이나 부당 거래, 그 흔한 논문 표절도 없는 것으로 밝혀져 금수저에 특권층이라는 비난 외엔 비교적 성실하게 삶을 살아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오히려 조국 후보자의 딸의 의혹을 부풀려 비난했던 나경원 의원과 장제원 의원의 자녀들의 문제가 더 큰 비난을 불러오고 있는 중입니다. 나 의원은 딸을 부당하게 성심여대에 입학시킨 정황들이 드러났고 아들도 서울대 인턴과정에서 제1저자로 등재시키기 위해 담당교수에게 부탁한 것으로 알려져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장 의원 아들은 3억짜리 외제차를 타다 음주운전으로 걸렸고 그것도 운전수를 바꿔치기 하려다가 들통이 나는 바람에 사회적 문제가 되어 국회의원직 사퇴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고 하더니 그 꼴이 되었습니다.
이 참에 고위공무원수사처(공수처)를 신설하여 국회의원을 포함한 고위 공직자 자녀 특혜에 대해 전수조사를 하자는 의견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제안입니다. 꼭 그렇게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방식으로 우리 사회가 더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정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회적 회개입니다.

▪ 볼턴의 해임
트럼프 대통령은 안보보좌관 볼턴을 해임했다고 통보하였습니다. 볼턴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노란 봉투를 들고 나타나 다된 회담을 수포로 돌린 장본이기도 합니다. 볼턴은 리비아 모델인 선비핵화 후제제해제를 들고 나와 북한으로부터 지탄을 받아왔습니다. 볼턴의 해임으로 북미대화는 더 나은 환경이 마련되었고 조만간 열릴 것으로 보입니다. 바라기는 북미간의 합의로 남북관계도 개선되길 기대합니다. 북미정상화는 남북정상화를 불러 올 것이며 한반도의 평화는 물론 동아시아의 평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인류를 더 평화의 세계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렇고 보면 사회 여러 단위에서 회개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시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자들입니다.

 

   
 

▪ 체제의 전복
오늘 복음서의 성서일과는 누가 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15장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누가 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모여든 자들이 세리와 죄인들, 민중이었음을 증언합니다. 예수는 어디를 가든지 민중 앞에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아니 예수가 어디를 가든지 세리와 죄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자체로 거대한 정화의식이었습니다. 이들, 갑이 아닌 을들, 기득권이 아닌 비기득권이 예수의 지지자였습니다. 예수의 입장은 시종일관 분명합니다. 세리와 죄인들 즉 민중들을 칭찬하셨고 편드셨습니다.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더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거라고 말씀하셨고 심지어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의 중심이 아픈 곳이듯 우주의 중심, 하나님의 관심은 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시종일관 아파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게 관심입니다. 하나님은 아파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는 이들을 심판하시고 그 압제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을 구원하십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비는 체제 전복적입니다. 종교주의에 안주하고 기득권을 누려왔던 율법주의자들과 바리새인들을 탈탈 털어 인민재판에 넘긴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자들이 종교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밥상을 둘러엎으시고 성전에서 내 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한 사람들은 위선자들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마치 대단한 자들인 양 자신을 부풀리고 약자들을 하대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제국주의자들 뿐 만 아니라 종교 기득권에 기대어 민중을 등쳐먹는 사람들을 미워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들어가지 못하는 천국의 문을 다른 사람까지 못 들어가게 막아서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막아선 자들도 이들입니다. 이들은 혁명을 꿈꾸는 자들을 위험한 자들이라고 정죄하였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을 죄인으로 정죄하였습니다.

▪ 세리와 바리새인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혹은 지킬 수 없는) 세리/죄인 그룹과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서기관 그룹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바리새인/서기관들은 구원받은 자들이고, 세리/죄인들은 저주 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랍비였음에도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민중을 품고 그들의 친구가 됨으로 당시 잘 못된 이원론적 사회체제를 보기 좋게 타파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을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바리새인/서기관들에겐 미움을 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함께 식사하시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며 불평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스스로를 의롭다 생각한 나머지, 자신과 다른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하고 차별한, 바리새인/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비판이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죄인 취급을 받는 부당한 사회와 왜곡된 종교에 대한 거부입니다. 사람됨의 길을 막아서는 모든 것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 잃은 자를 찾는 하나님
어떤 목자에게 양 100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 주인은 양 99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가지 않겠느냐? 찾으면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 이웃들을 불러 큰 잔치를 베풀 것이란 비유입니다. 그리곤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사람보다 회개하고 돌아온 한 사람으로 인하여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드라크마를 잃은 사건도 매 한가지입니다.
하지만 비유는 양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주인이 찾아 나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던 율법주의자들 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민중들을 정죄하고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비판하였고 그의 흠을 잡아 가두려고 혈안이었습니다. 마치 조국 청문회를 보면서 바리새인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은 신앙적 오만으로 우월의식에 빠져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과 외식을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고 놀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이미 천국은 여기서 실현되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가 먹고 마시고 노는 곳이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를 추종하는 기득권들이 판을 치는 곳엔 더 이상 구원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짓밟고 유지되는 사회라면 전복이 필요한 사회입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예수님은 날마다 혁명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로 혁명하신 분입니다. 이 일은 목숨을 걸어야 했고 자신을 추종하는 지지자들도 목숨을 거는 위험한 길입니다. 지금 우리도 그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시기입니다. 하지만 우린 사람됨의 길을 믿기에 이 길을 가고자합니다.

▪ 율법의 길과 복음의 길
율법은 지키고 행해야 구원에 이르고 복음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구원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 때부터 실행되었고 모든 생명에게 작동됩니다. 율법은 차별의식을 심어주고 자신의 의로 구원에 이른다며 계급의식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모든 존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평등한 사회를 지향합니다.
처음 예수님은 율법을 지킴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율법의 이중성을 보시곤 율법을 타파하는 길이 율법의 정신을 세우는 길임을 알았고 그것은 곧 체제의 전복이었습니다. 회개입니다. 복음의 길입니다.

▪ 참 사람됨의 길
오늘 서신서의 성서일과는 디모데전서 1장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나님의 자비와 인간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와 예수의 순명을 알지 못하였을 때 바울은 복음의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요 죄인의 우두머리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비를 넘치게 베풀어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허름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길을 여신 예수의 믿음과 사랑을 알게 됨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큰 선물임을 증언합니다. 이는 자신을 믿음의 본보기로 세우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시고 참 사람의 길을 여신 분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구원자)로 믿고 예수께서 걸어가신 참 사람됨의 길을 걸어가면 구원에 이릅니다.

▪ 예수에 속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로 무시당하고 사람대접도 못 받던 민중들은 예수님을 만나 존재를 인정받고 사람으로 거듭 태어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삶을 축제로 만드셨습니다. 율법은 그 정신을 상실하면 맛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 해방된 노예들이 만든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평등한 사회였습니다. 누구도 차별 받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였습니다. 이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율법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율법은 그 정신을 잃고 율법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차별이 생겼고 기득권자들의 갑질로 사회적 약자는 무시당하였습니다. 이 차별화된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사람을 비인간화시키는 율법은 더 이상 사람을 구원할 수 없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정신만 되살려 가져오면 되었습니다. 그건 사랑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대강령이었습니다. 지극한 정성으로 사람을 존중하고 대접하는 일, 사람에 대한 환대가 구원의 길입니다. 환대의 삶으로 전환이 바로 회개였던 것입니다. 이는 개인적 회개는 물론 사회적 회개를 동반하였습니다. 사회적 회개란 집단적 회개를 의미하였습니다. 사회체제의 전환입니다.

 

   
 


▪ 한번에 한 사람씩 / 마더 테레사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입니다. 난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입니다. 난 한 사람을 붙잡습니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수 만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습니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번에 한 사람씩,”

▪ 회개
회개(metanoia)는 ‘마음으로 돌이켜 행동을 고치다’란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예수님의 전 삶은 회개의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회개의 삶이어야 합니다.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이타적 사랑을 추구하는 삶에로의 전환, 비인간화의 삶에서 참 사람됨의 길로 나아가는 일체의 삶은 회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따라 마땅히 져야할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걷는 것이 구원이라면 모든 과정은 회개입니다.
회개한 한 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얻으신다는 고백은 참으로 옳습니다. 온 인류는 한 영혼과 무게가 같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 성심을 다하시는 주님의 모습에 놀랄 뿐입니다.

▪ 작은 일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시작해봅시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그 일은 마침내 하나님의 의와 연동되어 있고 타자와 연대하게 되며 집단지성으로 발현되어 사회를 정화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는 인간화를 향한 자각된 개인과 자각된 개인들의 연대하는 힘으로 가능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요 구원입니다. 예수는 이 거룩한 길로, 세상을 바꿔보자고 세상을 정화하는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여러분, 지체하지 말고 주님의 손을 잡읍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아 당신의 일꾼으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불평등한 세상을 전복하여 평등의 세계로 비인간화된 세상을 변혁하여 참 사람됨의 세계를 세우는 거룩한 길에 함께 나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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