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는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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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는 한 사람
  • 백창욱
  • 승인 2019.09.1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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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19. 9. 15) 성령강림 후 열네 번째 주일

주일설교문(19. 9. 15) 성령강림 후 열네 번째 주일
누가 15:1-10 “회개하는 한 사람”

지난 한 달 동안, 지금도 언론매체는 조국사태로 도배하지만, 그래서 이 나라에는 오직 조국문제만 있는 줄 알지만, 실제 이 나라의 가장 큰 현안은 비정규직 노동문제입니다. 김수억 기아차비정규직지회장은 정규직 직접고용을 촉구하는 단식농성을 47일째 하다가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도로공사 요금수납원 해고노동자들은 남다른 명절을 보냈습니다. 1,500명 직접고용을 요구하면서, 250명 노동자들이 김천에 있는 도로공사 본사 로비에서 농성투쟁중입니다. 건물 밖에서는 노동자와 시민들이 연대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긴급히 밥연대모금을 해서 오만원을 보냈습니다. 추석 전에 강제진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다행히 작전을 멈췄습니다. 경찰이 진압하려하자, 노동자 아주머니들이 상의탈의를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유신 때인 1978년 동일방직 20대 여성노동자들의 속옷저항이 떠올랐습니다. 조화순 목사님이 바로 그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을 깨치신 분입니다. 감리교에서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만들고 조화순목사님을 파송했습니다. 조목사님은 맨 처음 노동자로 취업해서 노동자경험을 합니다. 그 때 반장한테 겪은 수모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해서 의식을 깨우치고 마침내 노조를 만들고 권리투쟁에 나서게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남성만 어용노조 위원장을 했는데 여성들이 대거 노조 대의원 선거에 나서서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고, 최초로 여성이 노조위원장이 돼서 당시 노동계에 큰 사건이 됐습니다. 동일방직 투쟁은 유신의 강고한 폭력지배체제에 균열을 낸 역사적인 투쟁입니다. 그때도 경찰과 구사대의 침탈에 맞서서 여성노동자들이 속옷차림으로 농성, 투쟁했는데, 사십 일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9월 9일 도로공사 이강래사장의 대책발표가 수납원 노동자들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대법원 판결난 노동자들만 직고용 하겠으며, 요금수납원 업무는 이미 자회사에 넘겼으므로 직고용노동자들은 버스정류장이나 졸음쉼터 환경정비만 맡긴다고 했습니다. 도로공사 사장 이강래의 발표에 해고노동자들이 격분해서, 서울요금소 캐노피에서 농성하던 노동자들이 대거 본사점거투쟁에 들어간 것입니다.

저는 도로공사 사장 이강래를 보면서, 십삼 년 전, 노무현 정권 때, 철도공사 사장을 한 이철이 떠오릅니다. 이철은 2006년 철도공사 여승무원 직고용이 현안일 때 사장입니다. 이철은 민청학련 사건 주동자로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 현실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그는 늘 ‘돌아온 사형수’라는 타이틀을 써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쪽도 못 쓰는 바지사장에 불과합니다. 여승무원 직고용 문제에 대해서는 무능했습니다. 여승무원들만 십년 이상을 거리에서 헤매고 작년에 회사로 돌아갔습니다.

이강래도 김대중 정부의 브레인입니다. 청와대에서도 일하고 국회의원도 여러 번 했습니다. 다음 총선에도 남원에서 출마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권만들기에는 유능한 사람도 노동정책에서는 무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노무현 정권 때 노동홀대정책으로 지지를 크게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권에서 같은 경험을 되풀이하는 것을 볼 때, 우파독재정권이나 소위 진보정권도 노동자 정책에서는 한 치도 다를 바 없다는 비애를 느낍니다. 어느 정권이든 자본주의, 자유주의 경제구조에서는 제 나라 노동자 찾는 일에 완전 무심합니다. 소위 진보 정권도 노동자보다 자본가에 충실합니다. 다행히 전 지구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더 이상 지속가능한 체제가 아니라는 문제의식이 확산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와 시민들이 얼마만큼 저항하느냐에 따라 모순의 간격이 더 짧아질 것입니다. 노동모순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정권에 기대기보다는 노동자들이 더욱 단결, 투쟁해서 권리를 찾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15장은 유명한 비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잃은 양 비유, 둘째는 잃은 드라크마 비유, 셋째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모두 누가에만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첫째와 둘째 비유입니다.
여기서 다시 상기할 일이 있습니다. 두 비유에 나오는 양과 드라크마는 하나의 은유입니다. 양과 드라크마는 실제가 아닙니다. 실제는 사람입니다. 이 비유는 다른 모든 비유와 마찬가지로 사람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빼 놓고 양에만, 드라크마에만 골몰한다면 완전 오독입니다.

두 비유는 형식과 내용면에서 똑같습니다. 처음에는 잃어버립니다. 다음에는 주인이 찾을 때까지 갖은 수고를 다합니다. 그리고 찾으면 크게 기뻐합니다. 결론도 같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7절)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10절)

두 비유가 워낙 유명해서 비유내용만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비유가 나온 배경과 비유의 교훈이 더 중요합니다. 배경은 무엇인가요? 바리새와 율법학자는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광경이 불편해서 투덜거립니다. 이 점이 의외입니다. 왜 이들은 투덜거리나요? 어떤 이해관계가 있길래? 세리와 죄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시대 지배자인 바리새, 율법학자와 예수가 갈립니다.

어떻게 갈리나요? 바리새,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그냥 죄인으로 있어야 합니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채, 움츠리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전세력 대신 주류가 된 회당체제에서 율법으로 세리와 죄인들을 대상화하면서 지배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또는 말도 안 돼!’ 라고 개탄하겠지만 원래 한 사회의 기득권 세력들은 오직 기득권 사수가 지상과제입니다. 인간애, 세상에 대한 예의, 정의, 도덕성이나 윤리는 하위개념입니다. 지금 검찰을 보십시오. 자기 집단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검찰이 가진 공권력을 무제한으로 사용합니다. 조국 가족 수사하는데, 대형사건만 수사하는 특수부를 다 동원했습니다. 피의사실 유포하는 범죄행위를 계속 합니다. 사실관계를 조작하여 언론플레이로 여론을 호도합니다. 공안이 존재증명을 위해 사건을 엮어서 억울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듯이, 특수부도 같은 방식으로 존재증명을 합니다. 시대 따라 모양만 다를 뿐 권력을 유지하려는 욕망은 다르지 않습니다.

바리새와 율법학자들은 민중의 신음과 고통에는 하등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들 권력만 유지하면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회당과 율법은 계속 신성불가침이어야 하고, 안식일법과 정결례법은 계속 족쇄가 돼야 합니다.
그러나 현상의 본질을 꿰뚫은 예수에게 바리새와 율법학자들의 행위는 위선덩어리입니다.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제일 쓰기 싫은 말이 법원에 탄원서 쓸 때, ‘존경하는 재판장님’입니다. 전혀 존경하지 않는데 형식적으로 써야 해서입니다.

예수가 세리와 죄인을 대하는 태도는 병자를 치유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예수가 병자의 질병을 없애지는 못하지만 질병을 대하는 사회의 터부를 깼습니다. 병은 죄의 결과라는 사회의식을 부정했습니다. 정결례법에 구애받지 않고 병자의 부정을 만졌습니다. 그냥 병자의 고통에 동참했습니다. 율법의 터부를 깨는 예수의 행동에서 병자는 크게 감동합니다. 치유가 시작합니다. 자기 병을 수용하는 사람을 보다니! 거기에서 치유이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병은 고칠 수 없어도 형제자매의 아픔에 동참할 수는 있습니다. 거기서 감동과 치유가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을 맞아들였습니다. 죄인의 낙인을 벗겨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딸, 아들이라고 명예회복을 시켜주었습니다. 받아들여짐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쁨! 어디서나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경멸당하던 자신들이 받아들여지다니! 세리와 죄인들이 평생 맛보지 못한 환대입니다. 이보다 기쁠 수는 없습니다. 자연히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막걸리 마시듯이 집에서 만든 포도주를 마시는 소박한 잔치입니다. 잔치는 즐기는 자리지, 비판하고 투덜대는 자리가 아닙니다.

비유 자체를 분석하겠습니다.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온갖 수고를 합니다. 찾아서 기뻐합니다. 비유는 주인의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비유의 결론은 초점이 살짝 변합니다. 주인 대신에 죄인 한 사람을 비춥니다. 주인의 온갖 수고를 치하하는 대신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기뻐합니다. 말하자면 모든 이야기의 초점은 한 사람의 회개로 귀결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결론에서도 주인의 온갖 수고를 떠벌였으면 죄인 한 사람도 역시 주인의 공치사에 대상화됐을 것입니다. 그런 위험을 피하려고 비유이야기의 실제는 주인의 수고가 매우 크지만 결론에서는 주인도 사라지고 그렇게 해서 찾은 한 사람을 조명합니다. 이 한 사람이 주인공임을 강조합니다.

드라크마 비유도 똑같습니다. 어떤 여자는 드라크마 열 개 중 한 개를 잃어버렸습니다. 한 개를 찾기 위해 대 수색을 벌입니다. 샅샅이 뒤진다는 말에서 여자의 의지와 집념이 묻어나옵니다. 그래서 찾았습니다. 매우 기뻐합니다. 그런데 드라크마 비유의 결론 역시 여자의 수고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돌아온 죄인 한 사람에게 무게를 싣습니다. 그의 회개를 기뻐합니다.

바로 이 점입니다. 잃은 양, 잃은 동전으로 상징한 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 입니다. 물량으로 본다면 백 마리 중 한 마리, 열 닢 중 한 닢입니다.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물량으로 세는 존재가 아닙니다. 지배자들은 그냥 대상으로 봅니다. 통치행위에 방해가 되면, 쓸어버려도 되는, 짓눌러도 되는, 무시해도 되는 존재일 뿐입니다. 남은 아흔아홉 양이, 남은 아홉 동전이 결코 멀쩡한 게 아닙니다. 실제는 사람세계 일이기 때문입니다. 백 사람에서 한 사람이, 열 사람에서 한 사람이 제거되면, 나머지 아흔 아홉도, 아홉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지배자들은 나머지도 똑같이 그렇게 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해야 하는 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복음에서 진짜 회개할 사람은 바리새, 율법학자이듯이, 지금 세상에서 진짜 회개할 사람은 한 사람의 존재를 무시하는 욕망들입니다. 그 욕망을 어떤 특정집단으로 부르든, 권력과 자본으로 통칭하든, 그 속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회개해야 합니다.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쓰려는 자본가와 그런 욕망을 정책으로 지원하는 권력이 제일 먼저 회개해야 하고, 권력을 남용하는 집단 구성원이 회개해야 하고, 도로공사 구사대 노릇하는 정규직 노조원들도 회개해야 하고, 권력의 지시에 개처럼 순종하는 경찰 한 사람 한 사람도 회개해야 합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나기에 하늘에서도 크게 기뻐합니다. 욕망이 사람세계를 해치지 못하도록 각성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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