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제자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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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백창욱
  • 승인 2019.09.09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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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19. 9. 8) 성령강림 후 열세 번째 주일

주일설교문(19. 9. 8) 성령강림 후 열세 번째 주일
누가 14:25-33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조국을 법무부장관 후보자로 발표한 날부터 지금까지, 한 달 동안 온 나라가 조국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모든 매체는 온통 조국관련 소식으로 넘쳐납니다. 강제로 무엇을 먹이려는 것처럼, 보고 싶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조국 소식을 강요합니다. 처음에는 그런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야? 하다가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조국을 향하던 부정적인 시선이 조국을 보도하는 언론으로 옮겨졌습니다. 왜 언론은 저렇게 벌떼같이 마녀사냥 식으로 한 사람을 탈탈 터는 것인가? 게다가 조국 본인을 터는 게 아니고 그의 가족을 터는 것인가? 금요일 청문회에서 자한당은 조국의 딸이 동양대에서 표창장을 받은 것을 가지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청문회를 보는 국민은 스트레스를 참으며 자한당의 막무가내 행태를 마냥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딸이 동양대에서 표창장을 받고 안 받고 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이 나라 정치가 참으로 저열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무수한 보도가 사실이 아닌 의혹이라는 점입니다. 신문 헤드라인은 ‘~ 듯, ~같다’ 식으로 장식합니다. 어떤 선입견이나 의혹을 사실인 것처럼 보도하는 수법입니다. 언론은 왜 이럴까요? 이에 대해 KBS 저널리즘 토크쇼에서 정준희 저널리즘 전문가가 이렇게 진단합니다.

 

 

“왜 언론사들은 의혹을 더 키우는 방식으로 보도할까? 그게 쉬워서다. 의혹이나 사실을 확인하는 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이른바 가성비가 떨어진다. 그 시간에 5-6개 의혹기사를 쓰는 게 훨씬 더 많은 클릭질을 유도한다. 발품 팔아 어렵게 확인 작업해서 ‘문제없음’ 이라고 나오면 기사가 안 된다. 그러니 사실학인 기사보다는 의혹기사에 더 열을 내는 것이다.”
아하, 그렇구나. 언론의 사명은 진실보도가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언론사 기사에 클릭질을 많이 하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근대올림픽 구호인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강하게’를 흉내 내자면, 오늘날 대중매체의 기호는 ‘더 집요하게 더 자극적으로 더 뻔뻔하게’ 가 됐습니다. 그렇게 클릭이 많아야 광고도 몰리고 돈을 법니다. 극우 유튜브는 돈 버는 재미에 빠져서 경쟁적으로 가짜뉴스를 만들어냅니다.

사실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수단을 가동합니다. 자선기관도 종교단체도 지지하는 사람을 많이 모아야 기부금도 많이 들어오고 사업도 확장하고 단체 대표자도 더욱 명성을 얻습니다. 어떤 유명한 단체는 알바를 고용해서 길에서 회원모집을 합니다. 사람 많이 모이는 것을 경계하고 비판하지만 막상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기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내 능력이 거기에 못 미쳐서 탈이지, 할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의 보통 마음을 깹니다. 뒤집습니다. 보통 설교제목을 잡을 때나 어떤 주장을 할 때 철칙 같은 교훈이 있습니다. ‘반드시 긍정문을 쓰라’ 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제목은 부정어입니다.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이 연속해서 제자의 자격을 거론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27절, 33절)고 못을 쳤습니다. 이렇게 같은 말을 계속해서 세 번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서술입니다. 비록 부정어이지만 매우 중요해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나요? “많은 무리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개역성서는 ‘허다한 무리’라고 했다. ‘많은 무리’ 보다는 ‘허다한 무리’가 더 실감납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동행한다고 무조건 예수 제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예수는 이 많은 사람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나 같으면 좋아서 입이 찢어졌을 것입니다. 저절로 흥이 났을 것입니다. “드디어 나의 비전을 실현할 때가 왔구나, 아, 와신상담, 참고 기다린 보람이 이제 서서히 나타나는구나, 이들을 통하여 내 이름을 더욱 높여야지,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하면서, 앉아서나, 서서나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마음이 설레고 들떠서 어쩔 줄 몰랐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돌아섭니다. 허다한 무리와 ‘함께 나란히’ 걸은 게 아니라, 돌아섰습니다. 예수의 돌아섬은 군중의 행보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제자의 자격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나를 따를 결심이 없으면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예수는 오는 사람도 돌려보냅니다. 이런 점만 봐도 예수는 세상의 풍토와 다릅니다. 가급적 대중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고 장단 맞추며 인기유지하고 자신의 야망을 키워가는 사람과 얼마나 다른지요. 진실로 예수처럼 살고 싶습니다. 고독하지만 진리를 살며, 하나님의 영으로 민중을 살리는 길을 가십시오.

예수는 어떤 말씀으로 사람을 돌려보냅니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26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두 번째는 27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세 번째는 33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 세 가지 제자의 자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나요? 예를 들면 부모, 처자식, 형제자매,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미워하라는 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이것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면 큰 탈이 날 것입니다. 가장으로서 집안봉양의무를 저버리고 희한한 신앙에 빠져서 목사의 따까리로 전락해서 일생을 허비한 사람이 허다합니다. 실제 그렇게 이단사이비근본주의에 휩쓸려서 가정이 해체되고 뿔뿔이 흩어진 가정도 많습니다. 그 후 갈 데 없어진 사람들이 기도원식객으로 살다가 기도원이 퇴색하자 태극기부대가 돼서 더욱 열렬히 미국기와 이스라엘기를 흔들며 삽니다. 자신들은 예수의 제자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라는 말인가요? 또는 반대로 가족이기주의에만 빠져서 그 너머 민주시민의 역할에는 아예 문외한으로 사는 사람도 허다합니다. 오직 가족봉양과 성공출세를 목표로 달려갑니다.

또는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매우 위선적이 될 수 있습니다. 성서공단에 있는 어떤 회사의 경우, 사장은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으로 혹사시키면서, 교회에는 일억 이상을 헌금합니다. 노동자들에게는 온갖 원망을 들으면서도 교회에 충실한 것을 사는 보람으로 삼습니다. 전혀 덕이 안 되는데, 본인은 매우 신앙적으로 산다고 자위합니다. 농성하는 노조와 대화하고 평화하는 대신에 사탄아 물러가라는 기도를 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미워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인가요? 그래서 예수제자로서 사는 것인가요?

그것을 분간하기 위해 두 번째 자격이 있습니다. 그 길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인가? 입니다. 사람이 지는 십자가는 가로대 나무입니다. 처형장에는 세로대가 세워져 있습니다. 자기 몸을 매달을 가로대를 매고 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부귀영화형통과는 완전 반대되는 일입니다. 자기 면을 세우는 일이 십자가를 지는 일은 아닙니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망대비유와 전쟁비유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됨에 대해 말하는데 이 두 비유는 어떤 연관이 있나요? 비유 자체로 좋은 교훈입니다. 망대건축 하기 전에 완성할만한 예산을 준비하는 것은 두말 할 나위없습니다. 첫 삽을 떴는데 예산부족으로 건축을 중단하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전쟁비유 역시 그 자체로 충분한 완결구조입니다. 무턱대고 전쟁을 벌이는 나라는 없습니다. 전력이 적대국에 미치지 못하면 무력충돌 전에 다른 평화수단을 강구해야 합니다. 제 정신 가진 임금은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다시 질문하자면, 이 두 비유는 제자도와 어떤 연관이 있나요? 두 비유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28, 31절) 어떤 일을 벌이려면 사전에 미리 충분히 헤아려야 합니다. 일차 대안, 이차 대안 등을 마련하고 일을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 미리 헤아려야 합니다. 무엇을? 내 소유를 버릴 수 있는가 헤아려야 합니다. 소유욕을 가진 채,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무턱대고 망대를 세우는 사람이고 막무가내로 적대국과 전쟁을 벌이는 임금입니다. 틀림없이 실패합니다.

오늘 구약 본문은 토기장이 비유(렘 18장)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다. "너는 어서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너에게 나의 말을 선포하겠다." 그래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갔더니, 토기장이가 마침 물레를 돌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빚다가 잘 되지 않으면,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빚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이 토기장이와 같이 너희를 다룰 수가 없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렘 18:1-6)

진흙은 사람을 상징합니다. 토기쟁이에게 가장 좋은 진흙은 어떤 흙인가요? 토기에 맞는 재료여야 하고 불순물없는 순결한 흙이어야 합니다. 아무 흙이나 가져다가 토기를 빚지 않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제자에 맞는 태도를 갖춰야 합니다. 그것은 소유욕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각오하고 있다가 상황이 요청하고 주께서 부르시면 언제라도 실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전적으로 예수를 따라 하나님나라 운동에 몰두해야 합니다.

1997년, 저는 다시 목사가 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을 때, 모든 게 구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생활대책도 세워져 있지 않았고, 신학교 들어갈 기초실력도 안 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결심이 있었습니다. 뒤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 중요기도제목이 애굽백성처럼 뒤돌아보지 않도록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다만 토기쟁이가 손에 있는 진흙을 원하는 그릇으로 빚는 것처럼, 주님이 다시 주신 소명 따라 나의 마음을 완전히 비웠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주어진 길을 한 걸음씩 걸었습니다. 걷는 동안에 과거 생활을 그리워하지도 않았고, 앞에 있는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앞만 보고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덧 길 한 가운데 들어섰습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이 나에게 예비하신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알아차리고 그 길을 가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것이 은총입니다. 우리는 예수 제자로 살기 위해 심지어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또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사람입니다. 오직 예수 따라 하나님나라 운동을 이어가는 게 우리의 소명이고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운명적 상황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처럼 식민지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것이고 둘은 예수의 제자로 살도록 부름 받았다는 소명입니다. 최근에 저는 이 두 가지 소명을 더욱 투철히 의식했습니다. 이 소명에 합당하게 투신하려 합니다. 내 존재의 모든 것을 조국의 자주독립에 바치려 합니다. 제가 전향한 계기부터 그렇게 살도록 예정돼 있습니다. 제가 학맥, 인맥 같은 인적네트워크에 거리를 두는 이유도 이 길을 가려면 독자적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망대비유와 전쟁비유는 내 앞에 놓여 있는 현실적인 삶의 조건 속에서 냉철하게 예수의 길을 가라는 교훈입니다. 부르심에 성실히 응답하십시오. 그래서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를 극복하여 예수의 참 제자가 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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