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지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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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지르러 왔다
  • 백창욱
  • 승인 2019.08.19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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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열 번째 주일설교문(19.8.18)

주일설교문(19. 8. 18) 성령강림 후 열 번째 주일
누가 12:49-56 “불을 지르러 왔다”


금요일 김천시청에 갔습니다. 관제센터 해고노동자 복직집회입니다. 관제센터는 24시간 CCTV 관제를 통해 김천시의 안전을 예방하는 곳입니다. 예를 들면, 차량 절도범을 잡고 자살시도자를 구출하고 청소년을 선도하는 등, 위험한 상황을 사전에 파악해서 대처하는 일을 합니다. (저도 이분들을 통해 이런 곳이 있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김천시장이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 전환정책’을 지키지 않고 관제센터 노동자 36명을 대량 해고했습니다.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라고 판정했는데도 불구하고 김천시장은 복직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해고노동자들은 김천시청 앞에 농성천막을 치고 일 년이 넘도록 정규직 복직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사드철회집회에도 열심히 연대하는 인연으로 나도 금요집회에 참여해서 발언했습니다.

▲ 사진 : 박성율님
처음 해고당했을 때는 당황스럽고 막막하지만, 그 혼돈을 뚫고 투쟁에 돌입할 때, 또 다른 신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전에 알지 못한, 결코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인생이 열립니다. 무엇보다 나의 존재가 바뀝니다. 지배질서 상명하복에 익숙한 순둥이에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으로 변모합니다. 시장이나 노동자나 똑같은 사람이라는 평등의식으로 거듭납니다.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선물이고 하늘이 주는 은총입니다. 투쟁하는 사람만이 느끼는 신비라고 했습니다. 부흥집회처럼 참석자들이 아멘을 연발했습니다. 연대오신 스님도. 오늘 히 11장에서 믿음의 선조들이 겪는 극한 수난을 열거한 후에, 이렇게 평가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38절) 의식과 삶이 주체적으로 변한 사람은 자본과 권력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서울대 청소노동자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모순과 차별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지하1층 창문도 에어컨도 없는 한 평 남짓한 방에서, 강의실과 맞닿아 있어서 미관상 좋지 않다고 문도 열지 못한 채 폐쇄된 방에서, 한 노동자가 외롭게 죽었습니다. 대학당국은 노동자들이 오래전부터 에어컨을 설치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듣는 둥 마는 둥 방치했습니다. 고등학교 입시경쟁을 유발하고, 제도교육의 비정상화를 부추기는 최고정점에 있는 대학이지만, 권력과 자본의 마름들의 출세를 평생 보장해 준다는 구실에 힘입어 온갖 구조적 차별과 모순을 안은 채 존재하는, 명색이 한국을 대표한다는 대학에서, 모든 방에서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지만,(규장각 책도 보호받는) 오직 노동자의 휴게소에만 에어컨 하나 없어서 더위를 먹은 한 노동자가 쓸쓸하게 죽은 것입니다. 한겨레신문 그림판은 세계로 뻗어가는... 글로벌 초일류 대학... 무풍에어컨과 대비하여 선풍기 바람에 쓰러져 있는 노동자를 그렸습니다.

7월 31일, 서울 관악구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탈북민 모자가 숨진 지 두 달쯤 지나 뒤늦게 발견됐습니다. 추정 사인이 아사(굶주려 죽음)입니다. 엄마와 여섯 살 아이가 아사하기까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안전망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했지만, 공무원이 요구하는 이혼서류 미비로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복지공무원의 부작위(적극적 조치에 대한 불성실)가 탈북민 모자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우리나라 복지제도에 삼대 맹점이 있다고 합니다. ‘아는 사람만 받는 복지, 부양의무자 제도에 발목 잡힌 복지, 재정적 보수주의에 발목 잡힌 복지’입니다. 이런 맹점 때문에 자격이 되지만 실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백만 명에 이릅니다. 직접 방문해서 현장조사를 하면 되는데, 복지공무원들은 늘 일손이 딸린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전에부터 주장하는 바, 대한민국 복지를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공안들을 구조조정하고 복지 쪽을 확대하면 됩니다. 공안들은 존재증명을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공권력을 허비하고 사건을 조작합니다. 그래서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내고 민주주의를 퇴보시킵니다. 이런 불명예를 벗고 민중을 위한 나라가 되도록 하려면, 공안을 대폭 줄이고 복지공무원을 늘이면 됩니다.

지난주 국방부는 5년간 국방계획이란 걸 발표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과 미사일 방어 계획으로 2,400억 달러(우리 돈 290조원)을 투입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발표를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래서 한 소감을 밝혔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이다. 도대체 이 돈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게 누구 꿍꿍이일까? 미국군산복합체의 사주를 받는 안보마피아들의 장난이다. 이런 천문학적인 돈이 이렇게밖에 쓰일 데가 없는가? 무기구입비는 눈 먼 돈이라 안보마피아들이 장난치기 딱 좋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앞에서는 역사적인 합의와 평화선언을 해 놓고, 평양 능라도경기장에서는 멋있는 연설까지 해 놓고선,(정권의 마름들은 이 연설을 얼마나 우려먹었는가) 뒤돌아서서 상대를 궤멸시키려는 계획을 발표하는 건, 상대에게 엿 먹이는 짓이다. 오죽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다시는 남과 마주 앉지 않겠다고 하겠는가. 미국의 사주를 받는 안보마피아들이 농간 짓 하는 게 진짜 나라가 흔들리는 것이다. 더 이상 미사려구로 호도하지 말라. 실체를 보고 실증적으로 대처하라.”라고 했습니다.

한 주 동안 일어난 일들에 대한 소회입니다.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의 고통, 일류대학 청소노동자의 죽음. 복지 사각지대에서 아사한 모자, 안보 구실로 390조원이라는 국민 돈을 쓰겠다는 국방부. 분단적폐, 노동차별, 계급문제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산적한 모순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의 통념을 깹니다.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은 종말상징입니다. 모든 걸 태워서 끝장냅니다. 살리고 보존하지 않고 불을 지르다니! 예수님은 몹시 과격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럴만합니다. 한국 사회 산적한 모순과 차별, 적폐를 청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이 아니면 이 산적한 과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불을 질러서 다 태워버리고 새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박근혜를 끌어내릴 때, 국회도 해산시키고 새로 시작했어야 했다.) 나는 21세기 한국 사회 문제를 말했지만, 예수는 일세기 문제를 의식했습니다. 식민지의 아들로 태어나서 로마의 폭력지배와 거기에 빌붙은 이스라엘 지배자들을 보고 겪고 느낀 문제들이 좀 많겠습니까. 그가 발붙이고 사는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파격적인 가르침들과 뿌리 깊은 반골정신이 나왔습니다. 예를 들어 제사장, 바리새로부터 갈릴리 촌놈으로 멸시당한 경험, 당신이 경험한 세리와 창기의 꾸밈없는 순수한 마음, 겸손한 인간성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그런 문제의식과 경험이 바리새보다 세리와 창기가 하나님나라에 가깝다거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굳어버릴 대로 굳어버린 기득권 체제를 허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강고한 폭력체제 아래서 신음하는 민중들을 구출할 수 있을까요? 예수가 찾은 대안은 불을 지르는 일입니다. 불을 지름으로 썩은 질서를 불사르고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불 터 위에 하나님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은 더 이상합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리고 한 집안의 분열을 말씀합니다. 도대체 이 말씀은 무엇인가요? 당연히 예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 스스로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합니다. 과격을 넘어 괴팍하기까지 합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집안 식구들이 서로 맞서는 일은 어떤 경우인가요?

시내를 다니다 보면 사이비집단인 신천지에 가족을 빼앗긴 사람들이 차량에 현수막을 달고 방송으로 신천지를 규탄하는 시위하는 것을 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신천지는 가정파괴범입니다. 예수는 신천지 같은 가정파괴범의 원조인가요?

권력의 강력한 힘은 한 집안까지 통제합니다. 굳어버릴 대로 굳어버린 기득권 체제지만 영향력은 광범위해서 한 집안에까지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분단 이후 반공이 한 나라의 국시가 된 이후, 반공주의는 이 나라 모든 가정에 스며들었습니다. 반공을 어기는 일은 한 개인뿐만 아니라 한 집안을 풍비박산 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어머니는, 시어머니는 이데올로기의 통제 때문에 아들과 딸과 며느리를 반대해야 합니다. 아들과 딸과 며느리는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인륜까지도 어겨야 합니다.

저는 분쟁현장에서 정부가 폭력으로 밀어붙이는 개발사업 앞에서 한 마을이 갈라지는 풍토를 숱하게 봤습니다. 마을공동체가 서로 원수가 됐습니다. 처남매부 작은아버지조카 같이 아주 가까운 친족사이에서 입장이 갈리는 경우는 부지기수입니다. 소위 대명천지, 근대화가 완성됐다고 하는 21세기 초에도 이런 가공할만한 현상이 사람세계를 지배하는데, 일세기의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가혹했습니다. 로마제국의 폭력질서와 이스라엘 지배세력의 수단으로 변질된 율법과 예수도는 정면충돌합니다. 예수도를 따르는 사람은 지배세력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원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비극적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결단을 해야 하나요?

기존질서를 넘어야 합니다. 넘어야 새 세상을 만납니다. 노동자가 투쟁하기 전에는 저 미지의 세계를 어떻게 들어가나 하고 심난하고 막막하지만 결단하고 투쟁에 돌입하면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듯이, 비록 원수가 되더라도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벽을 돌파해야 합니다. 예수도는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예수는 그 너머의 세계가 너무도 뚜렷하기에 당신이 받아야 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고 하지만, 기꺼이 고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불을 통과해야 하고 분열을 극복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때, 역사의 때가 왔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요 4:23) “구름이 서쪽에서 일면 소나기가 오겠다, 남풍이 불면, 날이 덥겠다는 것을 쪽 집게 짚듯이 맞추면서, 위선자들아, 왜 이 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예수는 무리에게 위선자라고 일갈합니다. 왜 위선자인가요? 그들은 참을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합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합니다. 그래서 사악한 자들은 더 가짜뉴스를 생산합니다.

우리가 봐야 하는 참은 무엇인가요? 어느 때를 분간해야 하나요? 이제 우리는 권력과 자본이 지배하는 일방 독점세계를 넘어서 평등한 사람세상을 만들 때가 됐음을 분간해야 합니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분단이 일세기를 넘기 전에 분단을 극복하고 남북이 하나 될 때가 왔음을 분간해야 합니다. 미국의 속국신세를 극복하고 자주주권 나라를 세울 때가 됐음을 분간해야 합니다. 국방비로 290조를 들이느니 그 돈을 같은 동족에게 쓰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고 더 안보적이고 더 평화적임을 분간해야 합니다.(독일은 1952년 이후 홀로코스트 생존자에게 연금과 사회복지비로 93조원을 지급했습니다.)

누가 그 일을 하나요? 누가 대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받아야 할 세례를 받았듯이, 우리 역시 받아야 할 세례가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세례는 죽음 후에 부활영생을 주는 희망의 세례입니다. 우리가 받을 세례는 분단의 역사에 아파하는 일입니다. 그 괴로움을 거친 후에 더욱 참사람이 됩니다. 때를 분간하는 인식능력을 가지십시오. 인생노선으로 삼으십시오. 이 길이 하나님나라와 의의 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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