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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몫을 택하였다
주일설교문(19. 7. 21)
2019년 07월 23일 (화) 11:43:36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일설교문(19. 7. 21)
누가 10:38-42 “좋은 몫을 택하였다”


요즘 여러분 덕분에 견문이 넓어집니다. 대구살이 십년을 결산하면서 오지랖 넓게 살아온 것을 깊이 반성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대구노동시민사회진영과 절연하고 살았습니다. 그 안에서 겪은 조금의 단맛과 훨씬 많은 쓴 맛을 하나하나 씻어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우들 덕분에 이런저런 명목으로 대구에도 관여하게 됩니다. 현수막 연대도 하고, 엊그제는 오오극장에서 좋은 영화도 봤습니다. 내 안에 갇혀 있지 않도록 교우들이 내 마음의 문호를 개방시켜 주고 있습니다. 수요일에는 청도 삼평리 침탈 5년을 기억하여, 한전규탄 기자회견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6월에 경찰청 인권침해 진상조사위원회의 발표를 통하여 우리의 투쟁이 매우 정당했음이 공식 확인됐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 발언해야 한다고 해서 사양하다가 응했습니다. 살다보면 때로 하고 싶지 않아도 극복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영화 <주전장> 본 소감이 어땠나요? 우리 쪽에서 매우 당연히 알고 있는 역사사실을 반대쪽에서 완전히 다르게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게 너무 놀랐습니다. ‘정말 해석이 중요하다.’는 소감입니다. 똑같은 사건이지만 사람의 의식과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합니다. 가공한 사실을 굳게 믿는 모습이 섬뜩했습니다. 바르게 보고 해석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은 단지 어떤 한 사건에 국한된 일이 아니고 한 사람의 인생 전체와 연관합니다. 극우 편에 서서 해석하는 사람은 인생 자체가 극우의 길을 가고, 사실에 충실하게 문제를 이해하는 사람은 인생도 양심적인 방향으로 갑니다. 즉 무엇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기독 언어로 말하자면 구원여부를 좌우합니다. 단적으로 과도한 국가주의, 국수주의, 신민족주의에 빠져서 위안부를 부정하는 극우 사람을 구원받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온전한 구원은 마음과 영혼도 포함하고 정서, 지식, 이성 등은 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성의 작용이나 지식이 용납할 수 없는 상태는 구원에도 하자가 있는 것입니다.

감독 미키 데자키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주전장>이 처음 작품입니다. 제목이 <주전장>인 이유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미국이 주된 전쟁터가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많은 내용이 미국에 처음 소녀상을 설치한 글렌데일 시를 중심으로 일본 신민족주의자들과 양심시민세력이 논쟁을 벌입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극우파 사람들이 ‘내 말이 맞다’며 자신을 설득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위안부가 민감한 주제라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취재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취재과정에서 확인한 사실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위안부라는 단어 자체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식민지시절 위안부 범죄를 인정한 1993년 고노담화 이후 정권을 잡은 아베는 위안부문제를 거론하는 교과서는 심의에서 퇴짜놓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길들였습니다. 결국 교과서 출판사는 검정심의를 통과하기 위해 자진해서 위안부문제를 삭제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학생들은 일제의 과거 역사범죄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방송신문매체도 일치감치 정부 수중에 장악됐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1991년 위안부를 처음 세상에 밝힌 김학순할머니 이야기를 보도한 아사히신문의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극우파 일본인들에게 파상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인터넷에 딸의 사진이 도배가 되고, SNS에는 ‘자살할 때까지 몰아넣자’는 말이 돌았습니다. 일본 극우파의 공공의 적이 됐습니다.

위안부 문제 쟁점은 세 가지입니다. “20만 명의 위안부(성노예)가 강제로 끌려갔다”는 주장에 대한 시비입니다. 감독은 세 가지 쟁점에 대해 극우파와 양심세력의 주장을 대조합니다. 한 영화평은 극우의 입을 통해서 자신들 주장의 허점을 밝히는 매우 영리한 영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화에 등장하는 극우파 출연자들이 공동으로 영화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연구용이라는 처음 말과 다르게 상업용으로 썼다고. 그러나 감독은 이 다큐 인터뷰가 다른 용도로도 쓰일 수 있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제시해서 그들의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했습니다.

쟁점 첫 번째, 20만 명은 사실인가? 극우파는 당시 일제가 중국과 아시아에 주둔한 병력을 추산하여 과장됐다거나 근거가 약하다고 주장합니다. 양심세력도 숫자가 여러 논란을 일으키므로 숫자에 매이는 건 좋지 않다고 합니다. 이유는 숫자도 부정확하거니와, 가령 20만과 40만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더 많은 숫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숫자가 진실을 말하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또 극우파는 비율로 따져서 한 여성이 그렇게 많은 일본군을 상대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실제 위안부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본군을 상대했습니다.

쟁점 두 번째, 위안부 곧 성노예인가? 극우자들은 매춘부라고 합니다. ‘정부문서나 신문에 위안부라는 말이 없다. 그들은 현지에서 정기적으로 쇼핑도 하고 외식도 하고 돈도 많이 벌었다. 자유롭게 생활했는데 어떻게 노예라고 하는가?’ 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양심세력은 말하기를, 꼭 발목에 족쇄를 차야 노예가 아니다. 정부문서에 위안부라는 말이 없는 이유는 위안부 존재를 밝히는 모든 문서를 파기했기 때문이고, 자유로워 보이는 생활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가혹한 환경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쟁점 세 번째, 위안부는 강제로 끌려갔는가? 극우파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말이 일관성이 없고 오직 그들의 증언만 있어서 신뢰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안부 모집은 민간업자의 일이지 정부가 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양심세력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평생 깊은 한을 간직하고 살고 있으며, 그 경험을 떠올리는 게 죽는 것만큼 괴로운데, 항상 준비된 사람처럼 위안부경험을 일목요연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처음 본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대뜸 할 수는 없습니다. 비슷한 예가 5.18 광주항쟁 때 계엄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입니다. 한 방송매체가 그들을 취재했는데 뜻밖에도 그들은 그 때 기억이 아예 없습니다. 취재진이 정부기록소를 통해 그 때 자료를 바탕으로 접촉하니까 그 때서야 간신히 단편적인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봤습니다. 그들 기억에 아예 없는 이유는 왜 그런가요? 사람의 방어본능이 살기 위해서 그 때 기억을 지워버린 것입니다. 비록 기억은 지워졌지만 그 충격이 너무 커서 평생 약을 먹고 병자로 삽니다. 하물며 위안부할머니들은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일제는 그런 인신매매 납치범죄를 공공연히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거짓말(공부, 취직, 돈 번다)을 갖다 붙여서 그 말에 속은 사람이 허다하고, 또 군국주의 시대 군대가 하는 일은 정부의 통제에도 벗어나 있다. 그리고 당사자의 증언만큼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는가' 하고 반박했습니다.

극우파들이 위안부, 강제징용을 극구 부인하는 이유는, '대일본군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 그리고 국가는 잘못을 시인하면 안 된다. 조상들의 잘못을 믿고 싶지 않다, 국가는 좋은 이야기만 해야 한다.' 등등입니다. 한 극우자의 말이 실소를 자아냈습니다. “중국은 곧 주저앉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자동적으로 일본에 기댈 수밖에 없다. 한국은 칭얼거리는 어린아이처럼 귀여운 데가 있다.” 한 양심적인 역사학자는 극우자들의 역사해석에 대해 완전히 틀린 해석이라고 간단히 규명합니다. 일본 극우파들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패전의 결과인 평화헌법 이전, 군국주의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범죄를 강하게 부정하고 아시아를 해방시켰다고 헛소리하고, 일본의 힘을 만방에 떨치려고 합니다. 영화 <주전장>은 극우파들의 왜곡된 인식과 현상이 일본 대중 전체에 퍼져서 일본을 자해하는 반평화의 길로 이끌고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심각한 점은 일본과 같은 편에서 생각하는 친일토착왜구가 버젓이 이 사회 기득권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팟캐스트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에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일본판 사설을 분석했는데, 주장하는 내용이 완전 일본편입니다. 놀랐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백 년 전 친일분자들과 똑같았습니다. 이들을 청산하는 게 발등의 불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도 많은 논쟁을 일으킵니다. 실제 교회에서 특히 여성은 마르다의 역할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마리아 편을 듭니다. 예수가 마르다보다 마리아와 더 가깝기 때문인가요? 그런데 가만히 살펴 볼 일이 있습니다. 예수와 두 자매는 처음 만났습니다.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어떻게 아나요? 두 자매 소개하는 말이 보여줍니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와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어투는 모르는 사람을 처음 소개할 때 쓰는 말입니다. 즉 예수는 두 자매에 대한 선경험이 없습니다. 특별히 누구와 더 가깝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마르다의 행위를 지적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두 번 부른 것은 애정의 표시입니다. 애정으로 말씀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마르다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습니다. 마르다는 손님접대 때문에 마음이 바쁩니다. 그런데 그 일이 여의치 않습니다. 왜? 혼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평이 나왔습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마르다의 말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마르다가 이 말을 할 때 톤은 어땠을까요? 살살 말했을까요? 언성이 높았을까요? 마르다는 오늘 예수를 처음 봅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의 부대낌을 주저없이 말합니다. 마르다의 성격이 자아발휘에 거침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격은 본성이기 때문에 조심한다고 의식한다고 해서 제어되는 게 아닙니다. 뭐가 맞지 않으면, 결국은 터져 나오게 돼 있습니다. 마르다의 짜증 섞인 화살은 예수님과 마리아를 향해 동시에 날라 갔습니다.

마르다의 말을 다시 보겠습니다. 정말 마리아는 언니 혼자 일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나요? 마르다의 말은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그건 순전히 마르다의 추측일 뿐입니다. 본문을 보면, 마리아는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또 마리아는 언니를 거들어 주는 것을 싫어했나요? 그런 말도 없습니다. 다만 마리아는 주님 말씀 듣는 것이 간절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마르다는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나요? 마르다는 예수님 대접하는 일에 대한 구상을 미리 세웠습니다. 그 구상에는 당연히 동생도 함께 자기를 도와 줄 것이라는 생각도 포함돼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자신의 구상과는 다르게 일이 돌아갑니다. 상황이 불편한 마르다는 짜증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이리로 보내라고, 애초 자신의 구상대로 돌아가게끔 하려는 통제욕망이 작용한 것입니다.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니 개척 십년은 나의 마음에 본성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통제욕망을 지우는 연단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통제하고 싶어도 통제할 거리가 없었습니다.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냥 가만히 있는 게, 통제하려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해석하기를, 주님의 말씀 듣는 것이 주방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라고 설교하는데, 그것은 일본 극우자들과 토착왜구들의 역사해석처럼 완전히 틀린 해석입니다. 말씀 듣는 일과 주방에서 일하는 것은 통제욕망을 말하기 위한 사례일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실제적입니다.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오직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갔습니다. 다른 일은 일절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을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자신의 통제욕망으로 이웃의 소중한 것을 빼앗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인정하고 존중하고 각자 자기 역할에 충실할 때 조화와 균형 속에 하나님나라는 서 갑니다. 고대 지혜인 톨텍의 네 가지 금언 중 세 번째 금언은 “추측하지 말 것”입니다. 통제욕망과 추측의 망상에서 깨어나십시오. 한 가지에 충실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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