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몫
누가복음 10장 38~42절
▪ 이야기 들여다보기
오늘 예수의 일행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걷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순례입니다. 길을 가다가 어느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그 마을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살고 있었고 언니인 마르다가 나와 예수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셔드렸습니다. 마르다는 여느 때처럼 손님 대접에 분주합니다. 그것은 마르다의 천성입니다. 그런데 손님 대접에 거들어야 할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에게 일손이 모자라니 마리아에게 말씀하시어 일손을 도우라고 해주십사하고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좀 생뚱맞습니다. “마르다야, 네 동생 마리아는 가장 좋은 몫을 차지했구나. 누구도 그것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 이야기 펼쳐보기
1) 순례자 / 길을 걷는 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약속한 땅, 가나안을 향하여 길을 나섭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순례입니다. 신앙이란 세상 질서를 등지고 하나님 질서를 향하여 길을 가는 순례 여정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역사도 당시 제국의 질서인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질서로 전환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순례였습니다. 예언자들도 거짓과 불의로 얼룩진 죄악 된 세상을 쫓지 말고 하나님의 정의를 위한 질서로 나아가는 신앙의 순례를 제안하였습니다. 예수도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이 하나님께 이르는 영원한 길이니 당신을 믿고 걸으라며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기에 위험하고 힘든 길이기에 찾는 사람이 적으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고 제안하십니다. 그 이후 교회는 2000년 동안 예수를 따라 길을 걸어왔습니다. 때로는 예수를 수단화하여 걷다가 망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의 길은 내가 죽어 너를 살림으로 모두를 살리는 십자가의 길이었고 이 십자가의 길을 걷다가 정말 많은 목숨들이 그 길 위에서 죽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로마의 종교가 되고 유럽의 종교가 되어 권력을 갖게 되면서 세속화되자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사의 길을 걷기도 했고 종교절대주의에 매몰되자 진정한 종교운동으로 개혁의 길을 걷기도 하였습니다. 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자 예수의 무소유의 길을 걸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급진적 사회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기독교 신앙인의 길을 걷는 자들은 사유재산을 버리고 모든 것을 공유하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들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길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으로 걷는 이들 덕분에 어렵게 이어져 왔고 그 길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그 덕분에 우리도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 인생의 최대 축복입니다.
근래와 와서 걷기 순례는 간디의 제자인 비노바 바베가 토지 헌납운동을 펼치기 위해 비폭력 불복종의 일환으로 인도전역을 돌았던 것으로 다시 부각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녹색연합’이라는 환경단체가 ‘녹색 순례‘라는 이름으로 환경파괴 현장을 직접 발로 다니며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정신을 이어갔습니다. 그 뒤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 ‘새만금 사업 반대 3보 1배’라는 이름으로 걷기 순례는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생명평화결사’라는 이름으로 21세기의 화두인 생태와 평화문제를 전면으로 부각시키며 5년간 전국을 찾아가는 탁발순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4대강 개발 반대를 기치로 건 ‘생명의 강 모시기 100일 순례’가 있었고 이어서 지리산 노고단에서 임진각 망배단까지 ‘생명평화세상을 여는 오체투지 순례’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순례가 몇 차례 있었고 탈핵 순례, 다시 케이불카 반대 녹색순례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양양군청에서 출발한 순례단은 인재, 횡성, 홍천, 춘천을 거쳐 이번 주 수요일 서울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존재는 길을 걷는 존재입니다. 도상의 존재라고 합니다. 어느 길을 갈 것인지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일입니다. 어떤 길은 그 끝이 영원한 멸망으로 이어지고 어떤 길은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 지 살펴야할 이유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끝자락이 영원한 생명과 맞닿아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거든 빨리 돌아서십시오. 그리고 다른 길을 찾으십시오. 또한 누구랑 같이 걷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길벗이 좋으면 순례가 행복합니다. 하지만 길벗을 잘 못 만나면 걷는 내내 불행합니다.
2) 자신의 집으로 모심.
내 인생에 내 순례에 누구를 모셔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마르다는 길이신 주님을 모셔드렸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내 생의 존재 이유와 사명을 가르쳐 주는 길입니다. 아니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셨기에 하나님을 모셔드린 것입니다. 마르다 인생에 최고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토기장이의 그릇과 같습니다. 우리 그릇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로 그 그릇이 결정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모셔드린다면 난 신성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내 주인에 따라 내 존재가 결정됩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합니다.
▪ 이야기 생각하기
누가는 의도적으로 복음의 진수를 적시합니다. 율법사의 입을 통해 율법의 가장 중요한 계명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지난 주 강도 만난사람을 살려주는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통해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시더니 오늘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사랑의 진수를 알려줍니다. 아니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에도 이웃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손님을 환대하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르다처럼 음식으로 손님을 대접하는 일입니다. 이는 이웃을 섬기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리아처럼 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것으로 대접하는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예수를 깊이 환영하는 길은 예수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보다는 예수의 발치에서 예수의 복음을 듣는 일이었습니다.
환대는 상대방에 따라 달리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정말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사랑이요 환대입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환대를 통해 추진되었습니다. 그 두가 전형입니다. 하나는 민중들과 방상공동체를 운영하는 일이며 이것이 이웃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공유하는 일이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요 이것이 하나님 사랑을 실현하는 일이었습니다.
▪ 이야기 살려내기
1) 신성한 공간에서 살라
엘 베델이란 사람은 수도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수도원을 찾아가서 뛰어난 영적 스승인 에피파무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에피파무스는 수도원의 원장이었습니다. 그가 원장에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저는 수도사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점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에피파무스가 물었습니다.
“수도사는 무엇 때문에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은거 생활을 하는 겁니까? 속세에서도 신을 사랑하는 일은 가능한데 말입니다.”
수도원장 에피파무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촛대를 가져다가 초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런 다음 엘 베델에게 바깥으로 나가자고 했습니다. 바깥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방문을 나서기 전에 수도원장은 촛불을 엘 베델에게 넘기면서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거든 촛불을 꺼뜨리지 않도록 조심하게, 바람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라는 말일세. 엘 베델은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방을 나와 겨우 세 걸음을 떼어놓자 금방 세찬 바람이 불어 닥쳐 촛불을 꺼뜨리고 말았습니다. 엘 베델은 다시 불을 붙여보았지만, 불은 붙자마자 금세 꺼져버렸습니다.
엘 베델은 수도원장 에피파무스에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촛불이 제대로 타오르게 하려면 아무래도 방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바깥에서는 바람 때문에 불이 도무지 견뎌나질 못합니다.”
그러자 에피파무스가 엘 베델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지금 그 말이 그대의 의문에 대한 해답일세. 바깥에서는 바람 때문에 촛불이 잘 타지를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속세의 바람이 수시로 불어 닥치는 바깥세상에서는 피어오르는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하기가 불가능하다네. 이 사랑이 타오르게 만들자면 은수 생활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네. 이제 아시겠는가?”
엘 베델은 마음이 환해졌고, 그리하여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앤드류 마리아의 <한 묶음의 진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2) 가재울녹색교회
저는 요즘 우리 교회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바로 그런 신성한 공간과 같은 곳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신성한 기운을 느끼고 하나님의 불을 간직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며 그런 곳이길 간절히 바라고 시작된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훈련을 하는 장이어야 합니다.
▪ 이야기 나누기
1) 화재참사
일본 에니메이션 회사 건물 화재사고로 33명이 목숨을 잃었고 30여명이 다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유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한 사람의 생뚱맞은 행동으로 죄 없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유가족들의 가슴을 무너져 내립니다. 그 아픔을 갖고 어떻게 살아갑니까?
2) 난민
터키에서는 난민을 가득 태운 버스가 고속도로를 벗어나 전복되어 16여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차지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내전과 굶주림으로 고국을 떠나 제 3세계로 가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떠나 다시 유럽으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엉뚱한 사고가 발생하여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 또한 인재입니다.
3) 한일 갈등
한일 양국의 갈등이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징용피해자의 대법원 판결을 국제법 위반으로 몰아 경제보복을 하는 아베 정권에 응징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일제가 35년간 한반도를 지배하고 온갖 학대를 한 일, 그 중에 강제징용, 군 위안부 강제차출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고도 사과하거나 용서를 구하지 않았는데도 원만히 한일 관계를 유지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해도 납득도 할 수 없는 수 없는 아베 정권의 정책은 대한민국을 당혹스럽게 했고 우린 차분히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일본에 의지해왔던 소재산업을 전략사업으로 재구성하자고 의견을 모았고 한일무역수지도 균형을 맞추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려면 자생력을 키워야하는 데 시간이 걸릴 예정입니다. 시간이 걸려도 그리 하는 것이 유익할 듯합니다. 아울러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파렴치한 그간의 행보를 알리고 사과를 반드시 받아내야 합니다. 그 일에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에 동참해야합니다.
▪ 이야기 살기
1) 무너진 교회를 누가 세울 건가?
손석희 아나운서의 앵커 브리핑 한 개를 소개합니다.
이원영 목사, 그는 3·1운동 당시에는 선비였으나 만세운동에 참여하다가 옥에 갇힌 뒤에 감옥에서 신앙을 접했습니다. 뒤늦게 목사안수를 받고 자신의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목회를 시작했지요. 시대에 순순히 따랐다면 목사로서 평탄한 인생을 걸었겠지만… 그는 험한 길을 택했습니다.
장로교단이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의 전투기까지 헌납했던 시기.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그는 교회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교단에서 출교 처분까지 받았습니다. 산골짜기에 들어가 그 암흑의 시절을 보낸 이후에 여운형 선생은 물론 정치인들이 앞 다투어 그를 찾았으나, 그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사참배로 무너진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라며 흰 두루마기 차림으로 전국을 순례하며 교단을 재건하고자 했고, 그렇다고 신사참배를 강행한 교단 지도부를 공격하지도 않았던 종교인의 품격. 한국 개신교의 자부심으로 기억됩니다.
"신사참배로 무너진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권력과 금전과의 타협을 마다한 채 신념과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이원영 목사.
그때의 교회는 신사참배로 무너졌다지만 지금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김삼환 목사와 전광훈 목사로 대표되는 초대형 교회들의 비행은 이미 기독교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여 씁쓸합니다.
2) 예수살기와 새물결
이원영 목사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아직 기독교가 희망인 이유입니다. 사리사욕을 챙기지 않고 하나님의 몸인 교회와 역사를 소중히 여기며 시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는 한 희망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지난 2천년을 그 엄청난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살아남은 교회가 아닙니까?
기독교 정신으로 사회에 나아가 행동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교회를 갱신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것도 너무나 소중한 일입니다. 감리교회 목회자 운동인 새물결도 조금씩 탄력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의 영성과 이상으로 그 내용을 채우고 목회자 대중들을 설득하고 평신도 지도력과의 연대를 세우느냐하는 일은 새물결의 과제입니다. 생각보다 지난한 일이지만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겐 이 교회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작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겠지요. 하지만 저에겐 이 교회는 한국교회를 새롭게 할 희망입니다. 구원의 씨앗이라고나 할까요. 결국 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우리의 믿음이 이 교회의 운명을 결정할 겁니다. 그 거룩한 길에 함께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