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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그렇게 행하여라
성령강림 후 제5주 하늘의 소리
2019년 07월 15일 (월) 11:15:59 양재성 hfmc1004@hanmail.net

너도 그렇게 행하여라.
신 30:9-14, 눅 10:25-37

▪ 스승과 제자
한 스승이 제자 한 명과 여행을 떠났습니다.
제자는 그들이 타고 간 낙타를 돌보기로 하였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여행에 지친 두 사람은 사막에 텐트를 치고 쉬기로 하였습니다.
제자는 낙타를 잘 돌볼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낙타를 그냥 놔둔 채 신에게 기도만 하였습니다.
『신이여. 낙타를 돌봐주소서』
그리곤 지쳐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낙타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낙타가 제 발로 어디를 간 것인지, 도둑을 맞은 것인지,
어쨌든 낙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승이 물었습니다.
『얘야, 낙타는 어디 있느냐?』
제자가 대답하였습니다.
『글쎄요. 저도 모르겠는데요. 어제 낙타를 좀 돌봐달라고 신께 맡겼거든요. 그리곤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잠이 들었어요. 어쩐 일인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제가 책임질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전 신에게 맡겼거든요. 스승께서도 신을 믿으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전 그저 믿었을 뿐이에요.』
스승이 기가 찬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신을 믿되, 우선 낙타를 잘 묶어둬야 하잖니? 신은 너와는 달라. 그분은 손이 없잖아.』

   
▲ 사진출처 : 양재성님 페이스북

하나님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겪는 어떤 문제들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만 지키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침묵은 무능과 무관심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자기만의 고유의 삶이 있습니다. 그 고유한 삶을 실현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책임 있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삶, 하나님의 자비의 도구가 되어 자신의 삶을 불태웠던 사람들은 압니다.

▪ 율법사의 물음
당시 율법의 해석을 놓고 힐렐(Hillel)파와 샴마이(Schammai)파 간에는 다툼이 있었습니다. 힐렐파는 자유로운 율법 해석을 존중했습니다. 평화와 공의를 소중히 여기고, 인간(인류)을 사랑하는 이방인들을 토라로 끌어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한편, 보수적인 샴마이파는 이방인들은 유대 선민들의 이웃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들을 경멸했습니다.
샴마이파에 속한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려고 예수께 묻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질문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져야할 당연한 질문이고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율법에 뭐라고 적혀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율법교사는 “정성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적혀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에 율법교사는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율법교사에게 반문합니다. “너는 누구의 이웃이냐?”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너는 누구의 이웃이냐로 묻는 예수님의 혜안이 놀랍습니다. 진리는 나 중심적인 삶에서 너 중심적인 삶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 중심적인 삶에 갇혀 있는 한 너 중심적인 대동세상을 지어갈 수 없습니다.

▪ 사마리아인의 선행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거반 죽게 되어 내버려졌는데 그 길을 성직자인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제사장은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안 된다는 종교규칙에 잡혀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보고 지나쳤고 다음에 전문 종교인인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도 비슷한 이유로 지나쳤고 강도만난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오히려 원수지간인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 그를 도와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상황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디밀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숨은 지혜는 무엇입니까? 예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너희를 자유케 할 수 있는 길은 율법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 율법을 행하는 사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형식적인 종교가 희망이 아니라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는 삶이 구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 너는 누구의 이웃이냐?
여러분은 어려움 당했을 때 찾아가서 그 어려움을 상의할 만한 이웃이 있습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하며 행복해할 이웃이 있습니까? 정말 좋은 이웃이 있습니까?
또한 여러분은 누구의 이웃입니까? 강도만난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 있습니까? 상처받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찾아와서 기댈 이웃이 되고 있습니까? 좋은 이웃을 둔 자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람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성서를 통하여 새롭게 이웃을 발견하시고 좋은 이웃이 되길 빕니다.

먼저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율법사의 질문입니다.
율법엔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 그 어떤 철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인류에게 가장 신비스러운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냥 황홀하고 좋습니다. 때로는 사랑은 가혹하게 힘들게도 합니다. 사랑엔 귀천도 경중도 없습니다. 성경의 한 문장으로 줄이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들어가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율법사는 다시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보통 관심사입니다. 우리는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를 찾습니다. 율법사는 영생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 된 이웃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이것이 그의 한계였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만난 무수히 많은 사람들 가운데 여러분이 기대고 의지하고 사는 이웃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고통스러울 때, 아플 때 찾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장 절망스러울 때 찾아가는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되묻습니다.
“너는 나에게 내 이웃이 누구냐 묻느냐? 그렇다면 너는 누구의 이웃이냐?”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주님의 질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이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주님이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시겠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질문이 “너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은 누구냐? 그러면서 너는 누구의 이웃이었던 적이 있느냐?” 물으십니다.

▪ 나와 너
여러분은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시고 있습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와서 기대고 있습니까? 이것이 영생과 무슨 상관이냐 묻지만 예수님은 상관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웃이 되어 주어야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강도 만난 자들의 이웃이 되어 주어라.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웃을 찾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기댈 이웃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이웃에 대한 비유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치료했고 치료비를 부담했고 추가 치료비까지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똑같은 상황을 보고 정 반대의 행동을 했던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사고와 행동의 주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가 사고와 행동의 중심이었고 사마리아 사람은 ‘너’가 사고와 행동의 중심이었습니다. 율법학자의 사고는 철저하게 ‘자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강도만난 사람 ‘너’를 근거로 합니다. ‘나’만을 지키고, 쌓고, 위하는 사고가 있는가 하면, ‘너’를 위하고, 사랑하고, 필요에 응하고자 하는 사고가 있습니다. 전자는 자기로부터 출발하지만 결국 ‘나’를 지켜내지 못합니다. 후자는 너에게서 출발하지만 결국 자기도 세우게 됩니다. 전자의 경우는 현장이 있을리 없습니다. 이웃이 있을 리 없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밑이 없는 것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연대의식 일체의식이 없기 때문에 지나쳐 간 것입니다. 연대의식, 일체의식이 있어야만 걸음을 멈추고 돌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며 역사의식입니다.
이제 우리가 좋은 이웃이 되려면 우리는 ‘자기’를 근거로 하는 사고의 틀을 깨야합니다. 사고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경우에만 ‘너’와의 관계를 이룰 수 있고 ‘너’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역사를 볼 수 있게 합니다. 비로소 앎이 삶이 됩니다. 이렇게 될 때 값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회개이며 영적인 성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를 묻기 전에 나는 누구의 이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만일 나를 이웃으로 여기는 사람이 없다면 나는 이직도 영적인 어린아이입니다.

▪ 드라마 ‘녹두꽃’
녹두꽃이란 드라마가 인기리에 상영되다가 어제 마지막회로 종영되었습니다. 조선말기에 열강들이 식민지를 개척할 때 한반도의 상황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1895년 갑오농민전쟁이 그 중심부에 있고 그 주인공은 전봉준 장군과 백이강 장군이며 후천개벽을 꿈꾼 동도 즉 동학쟁이들입니다. 대부분이 농민, 노비, 천민이고 몰락한 양반과 서자출신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가르침과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가르침을 얻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자신의 입신출세만을 위해 사람을 우습게 여기고 억압하는 탐관오리들, 그 관료에 기생하여 백성의 고혈을 빼먹던 중인들.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백성을 괴롭힌 무인들. 모두가 난세에 자신들의 목숨을 보전하고 출세를 위해 세력가들과 야합하여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그 세력가가 정부든 일제든 러시아든 상관없이 그들의 개가 되어 살아감으로 권력을 얻고 목숨을 부지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불가능한 싸움이 시작됩니다. 정부는 동학농민군에 밀리자 일본군을 들여오게 하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할 수 없는 농민군은 장열하게 패배합니다. 당시 죽은 동학농민군이 30만명이라고도 하고 50만명이라고도 하고 아니 그보다 더 많다고도 합니다. 철저하게 살육당한 그 외형엔 일본이 있었지만 그 내부엔 부패한 관료와 외세를 등에 없고 몰지각한 권력층, 탐관오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대 소리, 양심의 소리.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학도들은 이미 하늘의 소리를 들었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이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인가 봅니다. 하늘의 소리는 하늘을 응시하는 자들에게만 들립니다.
백이강 장군의 한 번의 연설과 한 번의 고백이 장합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한 동학도들,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도부마저 혼란에 휩싸이고 진영 내부에서도 내분이 일어나고 많은 동학의병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후일을 도모하자며 절망하고 있을 때 백이강 장군이 일어나 선동하는 장면은 두고두고 이 드라마의 백미 중 백미입니다. 우금치 전투가 패배가 아님을 동학농민전쟁이 무모한 전쟁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명장면입니다. 전봉준 장군 조차도 백이강의 연설을 듣고 사람이 한울이라는 도가 이미 백성들의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있음을 보았고 이미 넘을 수 없다는 벽을 넘었다며 우린 패배할 수는 있지만 틀리지 않았다라고 다시 희망의 불꽃을 피워냅니다. 백이강 장군의 연설입니다.
“해산을 혀서 목숨은 부지할지 몰라도 더 이상 접장은 아니겄제. 양반 있던 자리에 왜놈이 올라 타갔구 다시 개돼지로 살아야겄제. 그래서 난 싸울라고. 겨우 몇 달이었지만... 사람이 동등하니 대접하는 세상 속에 살다본 게 아따 기깔라갔꼬 다른 세상에서 못살 것 드랑께. 그래서 나는 싸운다고. 찰나를 살아도 사람처럼 살다가 사람처럼 죽는다 이 말이여.”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사람이 사람으로 서는 세상, 사람이 한울님으로 존중받는 세상을 위해 많은 목숨들이 바쳐졌지만 그 꿈은 실현되었습니다. 갑오년 동학혁명은 삼일운동의 중심사상이 되었고 삼일운동의 정신은 인도, 필리핀, 이집트 등 수많은 독립운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35년간 식민지 통치 속에서도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정신적 힘이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친일 독재 권력과 싸운 4.19혁명의 바탕이 되었고 5.18 광주항쟁, 6월 항쟁 등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우리 근대사뿐만 아니라 현대사의 근원적 정신이 되었습니다.
그 정신은 놀랍게도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종교가 깨달음으로만 있었다면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신념이 되고 행동이 되었을 때 세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민중들이 그 깨달음이 실현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순교가 아니고 무엇이 순교입니까? 종교적 신념이 세상의 정의를 세우고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이루는 일이 진짜 종교의 사명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 거룩한 흐름 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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