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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기도의 원리와 방법
순례자의 길, 러시아 정교회 기도요령
2019년 07월 04일 (목) 11:02:37 박철 pakchol@empas.com

예수 기도란 제5세기로부터 제8세기 사이에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생겨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 그리스도교 영성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하나의 관상 기도 방법이다. ‘예수기도’라는 명칭이 암시하고 있듯이, 이 기도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거나 혹은 마음으로 기억하면서 짧고 단순한 말마디를 반복함으로써, 온갖 상념과 상상과 추리의 성가심에서 벗어나 예수의 현존과 단순한 일치를 이루고, 고요한 빛과 평화의 헤지키아에 이르러 성삼위일체적 생명을 누리게 하는 기도이다.

   

예수기도는 아주 오래 된 사막 수도자들의 영성 전통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일찍이 교회가 박해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어 활기를 띠고 발전되면서, 제도화된 조직과 정교화 된 전례와 함께 점점 더 정치화되고 세속화되어가자, 이 새로운 물결에 식상하고 염증을 느낀 일단의 크리스천 그룹은, 사막에서 그분의 오실 길을 준비했던 예언자들의 전통을 계승하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기다리기 위해, 삶을 통한 새로운 순교의 길을 택하여사막으로 나아갔으니, 이들을 가리켜 사막 수도자들이라 하고, 이들의 독특한 영성 생활 즉 엄격한 수덕 생활과 깊은 신비기도 생활을 가리켜 ‘사막 교부들의 영성’이라고 한다. 사막 교부들의 영성을 엿볼 수 있는 ‘아포프테그마타’나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또는 ‘성 안토니의 생애’와 같은 자료들을 통하여, 그분들의 영성과 기도의 전통을 일별해 보면 다음의 세 가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첫째는 애절한 통회와 슬픔을 주조로 하는 은총의 호소이다. 성전 기둥에 뒤에 숨어 울던 세리나, 예수를 향해 울부짖던 바르티매오, 예수의 발을 눈물로 적시던 죄녀 마리아나, 버리고 온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던 둘째 아들의 이미지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는 근본적인 태도와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통회의 슬픔은 하나님을 하느님의 자리에 모시고 인간을 인간의 자리에 두게 한다. ‘통회란 하느님과의 진정한 관계가 유지되는 영원한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으뜸가는 일은 하나님의 존전에서 제 죄를 나무라는 일”이라고 성 안토니는 말하였다. “어른께서는 하루 종일 오두막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십니까?”하고 묻는 방문객에게 그는, “지난날의 내 죄 때문에 울고 있는 중이라오”라고 대답하였으며, 이어 말하기를 “수도자란 마음에 슬픔을 지닌 사람”이라고 하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범한 죄로 잃었을지도 모르는 구원 때문에 슬퍼한다”고 하였으며, 독수자 에바그리오스는 “무엇보다도 눈물의 은사를 구할지니, 눈물은 영혼을 부드럽게 한다. 죄를 인정하면 용서를 받으리라.”하였다.

이런 통회의 슬픔을 통하여 정화의 은사가 주어진다. 성전 기둥에 숨어 가슴을 치며 울던 세리는 용서를 받고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 용서를 통하여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이 사랑의 체험을 통하여 사람은 비로소 평화와 기쁨에 이르고, 이 평화와 기쁨은 죄인에게 빛과 생명을 준다. 그러므로 슬픔은 하나님 없었던 과거를 은혜로 채워주며 하나님 없을지도 모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위로와 축복으로 바꾸어 준다. 많이 슬퍼하는 사람일수록 많은 위로가 따르기 때문이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 더욱 넘쳤다”고 외친 바울로 사도의 환성은 바로 이런 통회의 슬픔을 통해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참으로 사람은 제가 죄인 인줄 아는 만큼 행복한 법이며, 죄 없다고 하는 사람 속에는 진리가 거하지 않으니, 그에게는 참된 행복이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피멘 주교는 말하기를 “죄를 슬퍼하라. 구원에는 그밖에 다른 길이 없다.”하였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진짜 죄인과, 자기가 죄인인줄로만 아는 진짜 성인이 있을 뿐이다.

둘째는 기도의 끊임없는 반복과 지속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시오”(살전 5:17)라는 사도의 권고대로, 사막 수도자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기도하고자 실제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 노동, 식사, 담화, 휴식 등 모든 시간에 걸쳐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현존 안에서 생활하고자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성경 구절과 시편 구절들을 소리 내어 외거나 반복해서 염하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구절은 “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51:1) 혹은 “하나님, 날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나를 도우소서!”(시70:1) 하는 것으로서 오늘날까지 전례기도서의 도입송으로 사용되고 있다.

때로는 자신이 고안한 말마디로 기도하기도 하였는데, 이와 같은 짧은 말마디나 단마디 기도를 “화살기도” 혹은 “단순기도” 혹은 “독백기도”라고 하였다. 이러한 단순기도를 처음 가르친 이는 에집트의 스케테 사막에 살았던 성 마카리오스인 듯한데, 그는 “주님”이라는 말마디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라고 가르쳤다.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제자에게 스승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말로써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느니라. 너희 손을 내밀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니, ‘주여 당신의 지혜와 뜻을 따라 자비를 베푸소서!’하라. 만약 마귀와의 싸움에 짓눌리고 있을라치면 ‘주여, 구하소서!’하라. 그분께서는 너희들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알고 계시니 자비를 내리시리라.”

이와 같은 단순기도는, 전례와 성사가 있는 교회 공동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던 사막수도자들, 특히 독수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현존을 한시도 놓치지 않으려는 영혼의 안타까운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이런 단 마디 기도 말을 호흡에 결합하여서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반복함으로써 그 지속성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 대 바실리오스가 말한 대로 “지속적 영성체”상태를 지속시키려 했던 것이다.

셋째는 내적 침묵과 고요인 헤지키아에 이르러 그 안에 머물고자 함이다. 헤지키아란, 타락한 본성, 즉 정념을 지닌 인간이, 그로부터 비롯되는 왜곡된 상념과 상상과 추론의 인식 작용에서 벗어나 도달하는 무정념 혹은 무념무상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동방 영성의 중핵을 이루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주론적 일원론 속에 자신을 해체해 버리거나 무인격화 시켜버리는 따위의 “공”개념과는 달리 삼위일체적 생명의 충만성을 의미한다. 이 역시 사막 교부들의 영성 전통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큰 흐름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특별히 강조하여 가르친 이는 독수자 에바그리오스로서 그는 “기도”라는 작품에서 “기도란 상념을 벗어버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 벗어나야 할 상념이란 비록 죄나 부정적인 감정 따위뿐만 아니라, 가능한 “모든 생각”으로서, 그 모든 생각에서 벗어나야 마음이 단순해지고 청정해져서 분열과 혼란을 벗어나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초월하고 두루 원만하고 온전한 하나로 통합된다고 하였다. 에바그리오스 자신은 플라토니즘의 과도한 적용으로 단죄되었으나 그의 작품들은 다른 사람(닐로스)의 이름으로 계속 읽혀지면서 사막 영성의 심저를 흐르는 수맥과도 같이 작용하였다. 나중에 이런 사막의 영성 전통은 예수기도의 신학적 기틀을 형성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나아가서 헤지카즘 영성의 길잡이 노릇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사막 교부 중의 한 분이었던 아르세니오스는 헤지카즘 영성의 핵심을 이런 권고로 요약하였다. “세속을 피하고, 침묵하며, 고요에 거하라!” 고요란 정제된 육정의 상태요 정화된 영혼의 상태로서, 신비의 문 앞에서 은총으로 그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영혼 상태이다. 곧 이어 나타나게 되는 예수 기도자들은 바로 그 문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막 교부들의 기도와 영성 전통은, 예수기도의 독자적 발전을 위하여 미리 충분한 준비를 갖추어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슬픔>과 <반복>과 <고요>라고 하는 세 가지 특징은 그대로 예수기도에 이어져 예수 기도의 세 요소로 기틀을 잡게 되었으니, 이제 예수라는 <이름>만 첨가되면 예수기도는 그 완성 형태를 갖출 것이었다.

맨 먼저, <반복>과 <고요>를 <이름>에 결합하여 예수기도를 구체화시킨 이는, 5기 말엽 북부 그리이스의 포티케에서 살았던 주교 성 디아도코스였다. 그는 “헤지키아에 이르기 위하여 예수의 이름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부른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다만 ‘주 예수기도’만을 해야 한다. 집중력을 가지고, 내적 성소인 심장에서, 온 마음으로 이 말마디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자.” “오직 주 예수기도 만을 !”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고요>와 <이름>을 결합하였다. 그는 예수기도 신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자유하고 두루 원만한 인격적 통합성을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자신 안에서 분열과 갈등을 경험한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자기 상실을 뜻하며 이 왜곡된 인간성에서 마음과 마음의 다툼, 마음과 행동의 불일치, 행동과 행동의 모순이 생겨난다. 그러나 새로운 존재인 제2의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형이요 온전한 형상이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모든 사람이 되어야 할 참 사람의 본 모습이므로 마땅히 사람은 그분을 모범으로 삼고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반복해서 끊임없이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이름이 이 이름 외에는 다시 더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노라면, 우리의 분열되고 분산된 마음과 행동은 그분의 이름을 중심으로 단순화되고, 그분과의 내적 일치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더욱 줄기차게 그 이름을 부름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자동화되고 육화되기까지, 그리하여 예수께서 기도자 안에 현성하시어,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 되기까지 불러야 한다.

이렇게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다 보면 가슴에 따스함을 느끼게 되는데 참된 기도의 시작은 여기에서 부터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그는 빛을 보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자 안에 계시게 되면 바로 그분의 모범을 따라 그는 삼위일체적 생명에 참여하게 되어 창조의 원상태를 회복한다. 이와 같은 예수기도에 대한 그의 이해는 동방 신학과 영성의 큰 줄거리를 따르고 있는 것이라 보여진다.

다음 세기에는, 남부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성 발사누피오스와 성 요한, 그리고 그들의 제자인 도로테오스가 예수기도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극도로 사람을 피하여 필화로 의사소통을 할 만큼 은수 생활을 추구하였던 ‘가자의 두 노인’은, 예수의 이름에 영성의 최고 가치를 두었다. 그들은 겸손, 순명, 자아 제거 등 사막 교부들의 영성 전통에 충실하면서, 사색적이기보다는 예수의 인격에 무한한 신뢰를 두도록 가르쳤다. 매우 실제적이고 다양한 기도문을 제안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여, 도와주소서.” “스승 예수님, 나를 보호하시고 나의 연약함을 도와주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여, 부끄러운 정욕에서 나를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예수께 부르짖어라.” “예수께로 달려가라.” “예수를 깨우자.”고 하였다.

한편, 그들의 제자인 도로테오스는 새로운 기도 정식을 사용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하는 말을 삽입한 것이 그것이다. 나아가서 그는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의 현존에 일치하는 “말없는 기도”를 가르쳤다. “기도를 떠나가도록 버려두고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분이 네 앞에 계시다는 생각을 하여라.” 이렇게 하여 예수 기도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사실적으로 대면하여 경험하는 “사건”이 된다.

그 다음 세기로부터 2-3세기 동안에는 성 요한 클리마코스, 성 헤지키오스, 성 필로테오스 등 시나이 작가들이 예수 기도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특히 성 요한 클리마코스는 처음으로 <슬픔>과 <반복>과 <고요>와 <이름>을 모두 언급함으로써 예수기도의 완성 형태를 보이고 있다. “눈물은 회개의 표시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사랑의 반응이다.” “눈물은 쓴 만큼 달다!”고 하면서 기쁨을 가져오는 슬픔과 눈물의 은사를 강조하는 한편, “아주 단순하게 기도하라. 세리와 탕자는 짧은 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느니라.” “우리의 기도는 간결해야지 수다가 되어서는 안 되느니라.” 하는 말로 단순기도를 강조하면서, 또한 고요를 강조하여 “고요는 상념을 떨쳐버리는 것이며, 고요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니라.”고 하였다.

그는 예수기도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희랍 작가로 기록될 것인데, <이름>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독백이니, 잠들 때까지 불러라.” “네 원수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매질해댈지니라.”라고 하였다. 특별히 그는 예수기도를 호흡에 결합시켰다. “예수께 대한 기억을 네 호흡에 결합시켜라. 그러면 너는 고요의 가치를 알게 되리라.” “기도는 호흡하듯 지속적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숨 쉬도록 가르쳤다.

성 헤지키오스는 다소 이채롭게도 <슬픔> 대신에 <기쁨>, <감미로움>, <빛>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성 요한 클리마코스가 말한 슬픔의 결과로 오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며 위로를 뜻하는 것이다.

성 필로테오스는 성 디아도코스의 견해를 따라 예수기도를 “조각난 자아의 통합”으로 보면서 특히 빛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예수기도를 통하여 이르게 되는 빛의 단계에서, 그 빛은 우리의 마음을 마치 감광판과 같이 만들어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새겨준다고 하였다. 이 빛의 신비주의는 후기 비잔틴 영성의 중심 주제가 되는데, 11세기에 시인 신학자인 신 신학자 성 시메온에게서 빛을 발하여, 14세기, 위대한 헤지카스트 신학자인 성 그레고리 팔라마스에 이르러 활짝 꽃피게 된다.

시나이의 세 작가들은 모두 <이름>과 <호흡>을 결합시켰다. “예수께 대한 기억을 너희 호흡과 결합시켜라.” “예수기도로 하여금 네 호흡과 결합되게 하여라.” “우리는 항상 하느님을 숨쉬어야 하느니라.”고 함으로써, 진실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거동하며 살아있고 숨쉬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기도는 동방 영성의 중심인 헤지카즘의 꽃이요 실천 방법으로서 크리스천 관상에 관한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형상화함으로써, 삼위일체적 생명의 신비를 체현하는 기도이며 영적 수행 방법이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초월 명상의 하나가 아니요, 그렇다고 상념과 상상의 기능을 사용하여 개념을 분석하거나 진리를 추론하는 추리 명상의 일종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예수께 대한 명상이나 추리나 사색이 아니라 예수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하여 그분과의 일치를 이루고, 나아가서 그분이 그러하신 것처럼, 그분을 본받아 우리도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인 신비의 산술, 즉 삼위일체적 생명의 신비를 누리려는 기도인 것이다.

이 기도를 실천하기 위한 실제적인 방법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머리를 숙이고 앉는다. “네 수염을 가슴에 닿도록 구푸리고 눈은 온 마음과 더불어 배꼽을 바라보라”고 하는데, 다른 본문에는 시선을 심장에 고정시키라고 하기도 한다. 요가나 참선에서 등을 곧게 펴고 앉는 것과는 달리 낮은 의자에 앉아 어깨를 숙이고 등을 구푸리라고 하는 것이 특이하다. 앉음새가 안정되면 숨을 천천히 쉬어 깊고 조용하게 가라앉힌다.
이렇게 호흡을 조절하는 것은 본 기도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호흡과 기도 말마디를 나누어 맞추는 방법이 꼭 요구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정교 기도 실천에서는, 숨을 들이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여”하고, 숨을 내면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할 것으로 권장되고 있다. 숨이 길고 깊지 못한 사람은 이것을 다시 나누어서, 첫째 들숨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여”하고, 날숨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여”한 뒤, 둘째 들숨에서“이 죄인을”하고, 날숨에서 “불쌍히 여기소서”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으로 할 때의 경우이고, 가령 예수기도 정식을 구송으로 외거나 노래로 음창하는 경우에는, 호흡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호흡 조절과 동시에 “심장이 있는 곳을 향하여 안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숨이 콧구멍을 통과하여 허파를 지나 심장에 이르는 상상을 하며, 마음을 그곳에 담아두기 위함이다.” 동방의 정신 신체학에 의하면“존재의 중심은 마음이며, 마음의 집은 심장이다.”

그러므로 호흡과 더불어 마음을 심장에 모아야 한다. 마음이 심장에 자리 잡으면 “마치 오랜 여행 끝에 아내나 자식들을 다시 만나는 것과 같은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이때 빨리 다시 돌아 나오지 말아야 한다. 처음에는 다소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익숙해 질 때까지 견디며 그 기쁨에 맛들이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마음이 심장과 하나를 이루어 조용해지면 예수기도의 말마디를 외기 시작한다. 때로는 마음으로, 때로는 구송으로, 때로는 노래로 읊되, 기도말을 자주 이것저것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 좋다. “자주 옮겨 심는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의 참된 시작은 심장에 따스함을 느끼면서부터이다.” 슬픔과 따스함이 뒤섞인 느낌 다음에 마음은 차츰 빛으로 상승된다.

참고로 오래 전부터 러시아 정교회에서 예수기도와 관련해 널리 알려진 “순례자의 길”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기도 요령을 소개한다.

1. 어둑하고 조용한 장소를 찾아 앉아라.
2.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라.
3. 상상으로 심장이 있는 곳을 찾아 거기 집중하며 머물러 있어라.
4. 정신을 머리로부터 심장으로 끌어내리며, 조용히 소리를 내든지 아니면 마음으로만 하든지, 편한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느님의 아들이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천천히 그리고 공손히 기도 말을 외라.
5. 가능한 한 마음을 집중하여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어떤 생각도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6. 인내하며 평화로운 마음을 가져라.
7.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에 있어 중용을 지켜라.
8. 침묵 사랑하기를 배워라.
9. 성서와 기도에 관한 사부들의 글을 읽어라.
10. 가능한 한 번거로운 일들을 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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