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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에 합당하라
성령강림 후 세 번째 주일설교문(19. 6. 30)
2019년 07월 04일 (목) 10:52:46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일설교문(19. 6. 30) 성령강림 후 세 번째 주일
누가 9:51-62 "하나님나라에 합당하라"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임자도로 수련회를 왔습니다. 대기리교회에서 함께 예배하니 참 좋습니다. 황현수목사님, 유금영사모님 덕분에 임자도를 알았습니다. 참 아름다운 섬입니다.
황현수목사님은 2015년 10월, 예수살기 히말라야 산행에서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예수살기에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황목사님과 인연을 맺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어제는 부부세미나를 통해 많은 깨우침을 주었습니다.

   

예수살기는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일이 많습니다. 저도 매주 성주 소성리에 가서 사드철회투쟁을 합니다. 상대가 미국이어서 쉬운 일이 아닌지라 평생에 걸쳐서 임해야 한다는 각오를 합니다. 우리나라는 해방되자마자 미국의 식민지세월이 74년입니다. 일제 식민지 때부터 따지면 백년을 넘게 외국의 지배아래 있었기 때문에 자주적으로 사는 게 무엇인지 경험이 없습니다. 우리 세대까지는 식민지 백성으로 살았지만 우리 후손은 외세 간섭 없이 자주적인 나라를 만드는 게 우리의 소명입니다.

예수살기는 창립한 지 십일 년 된 기독교운동 단체입니다. 이름에서 보듯이, ‘예수를 살자’는 신조로 활동합니다. 한국교회는 보통 ‘예수를 믿자’이지만, 예수살기는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성찰을 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지금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이렇게까지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내린 결론은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수 믿기를 넘어서 예수를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게 진정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사도신경과 별도로 예수살기 신앙고백문을 만들었습니다. 대구새민족교회는 매 주일 예수살기 신앙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해방의 역사를 통해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살아 참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이 생명과 평화의 영임을 믿나이다.
우리는 예수의 몸인 교회가 생명, 평화 그리고 정의의 세상을 여는 하나님의 일꾼임을 믿으며
성서와 더불어 자연과 역사가 진리와 은총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나이다.
우리는 모든 생명이 자유로이 살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믿으며 예수를 따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임을 믿나이다. 아멘
사도신경과 더불어 예수살기 신앙고백으로 균형을 이루면 한국 사회에서 깨어있는 신앙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세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는 하나님나라에 합당한가, 나는 진정 예수를 따르는가’를 되새김으로, 삶을 새롭게 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누가복음 9:50까지는 예수님의 갈릴리 활동을 서술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무대가 갈릴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51절부터는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상경기'라고 부릅니다.
51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승천하실 날은 곧 예수님의 죽음을 말합니다. 예수는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결국 최후의 결전을 위해 예루살렘에 갈 수밖에 없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결정이 서울에서 이루어지듯이, 일세기 이스라엘을 좌우하는 지배세력은 예루살렘에 모여 있기에 그곳을 피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네 가지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각각의 사건에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는 예수님의 생각과 유대세상이 더 익숙한 제자들의 생각의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제자들의 생각에서 내 모습을 돌아보고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에 더욱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첫째 사건은 야고보와 요한의 과격함입니다. 두 사람은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저주합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은 '천둥의 아들'이라는 별명답게, 다혈질입니다. 혈기왕성합니다. 말의 실행여부를 떠나서 사람을 죽이는 말을 태연히 한다는 것 자체가 참 무시무시합니다. 얼마 전 장경동목사도 북한동포 끌어안고 죽이고 죽자는 말을 스스럼없이 말해서 우리를 기함시켰습니다. 방송에서 인기많은 목사지만 이 전쟁발언으로 하루아침에 기독교를 반평화집단으로 매도했습니다. 오늘 신자의 가장 큰 덕목은 분별입니다. 분별 못하면 같이 망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 저주할 때, 엘리야를 떠올린 것 같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들과 대결할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해서 제단을 태워버린 일이 있습니다. 또 아하시야왕이 자기를 잡아오라면서 군대 오십부장 두 무리를 보냈는데, 하늘의 불로 태워버린 사건도 있습니다. 자신들도 엘리야같은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고, 또 말 안 들으면 사정없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해서 우리가 얼마나 센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망이 제자들을 지배합니다. 이 모습은 우리 모습이기도 합니다.

힘을 과시하는 일은 신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다른 마을로 갑니다. 교회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현실에서 세속적인 힘을 과시하고 남용하게 되면 동시에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힘을 써야 한다면 낮아지는 힘, 약자와 함께 하는 힘. 불의한 세력에게 진리를 말하는 힘, 저항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따라오는 모욕과 수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사실 이렇게 사는 것은 힘듭니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길이 예수님이 명하신 좁은 길이기 때문에 피하지 말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명했는데, 사람들은 넓은 문으로 갑니다. 그 길은 멸망으로 이끈다고 명백히 말씀했는데도 좁은 길을 피합니다. 언제부터 이런 추세가 됐는지... 우리의 욕망이 서서히 왜곡된 현상을 만들었을 테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는 예수의 말씀과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예수님이 자신에 처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안정되게 살고, 이왕이면 편안한 삶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머리 둘 곳도 없는 처지는 예수님의 정해진 운명이고, 따르는 사람도 이같은 생활을 감수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을 돌아다닐 때, 예수일행을 영접하는 집이 없을 시에는, 계속해서 구차하게 남의 집 문을 두들겼을 것이며, 그래도 얻지 못할 때는 수없이 많은 밤을 노숙으로 지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는 사람의 설움을 늘 겪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현실은 많이 다릅니다. 머리 둘 곳도 없는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예수 믿고 잘 되자’는 성공이데올로기의 기독교식 표현이 됐습니다. 의롭게 살고 부하려 하지 않고 역사에 깨어 있고 하나님나라를 사는 것은 관심사에서 멀어졌습니다. 역사에 깨어 있지 못하고 반공을 신앙과 등식화하고 민주시민의 덕목이 없는데 구원받았다고 하는 건 예수신앙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의지를 가지고 낮은 자리를 향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안락한 자리에 있습니다. 의식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셋째 사건에서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이 한 제자를 부릅니다. 다행히 이 사람이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장 따르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장례를 두 번 합니다. 처음 장례 때는 돌아가신 분을 동굴 무덤에 모십니다. 그리고 일 년 후 육신이 썩어 뼈만 남게 되면, 다시 와서 상자에 뼈를 넣어 무덤 벽의 구멍에 다시 장사지냅니다. 당연히 이 일은 그 집의 아들이 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말하는 장례는 첫 매장은 아닙니다. 상중에 나가서 제자가 되겠다고 설레발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두 번째 장례를 치룰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합니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이 말씀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고차원적으로 보면 그만큼 하나님나라를 선전하는 일이 시급하고 최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이례적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유다교에서 장례는 선행의 극치입니다. 특히나 장남의 가장 중요한 책임 중 하나는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일입니다. 장례는 모든 일의 최우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회 관습을 깨뜨립니다. 다른 자리에서라면, 귀싸대기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급진적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게다가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들을 죽은 사람들이라고 말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예수님 말씀 중,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2:51)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요? 일세기 예수님이 발붙인 세상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인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민중은 로마에 눌려서 제 숨 편히 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엎친데덮친 격으로 이스라엘 지배세력은 율법윤리로 민중을 더욱 발가벗겼습니다. 이런 이중 억압에서 하나님나라는 어떻게 세울 수 있나요? 민중을 살리기 위해서는 기존질서를 깨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유대사회에서는 장례가 최우선이지만, 그것부터 뛰어넘어야 새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 죽은 자를 장례하는 것은 그 세상에 익숙한(죽은) 사람에게나 잘 어울리는 일입니다. 죽은 사회의 규범을 돌파하는 일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일뿐입니다.

넷째 사건은 예수님이 어떤 사람의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하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르기 전에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지극히 상식에 준하는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잘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어찌 이리도 몰인정합니까? 하지만 이제 막 시작한 하나님나라 운동이 처음부터 단호하지 않으면, 죽도밥도 안 된다는 것은 우리도 압니다. 평생 농사만 지은 분들 앞에서 쟁기 이야기 하자니 외람됩니다. 쟁기교훈은 분명합니다. 쟁기를 잡을 때는 눈을 떼지 않고 정확히 앞을 보면서 방향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쟁기를 끄는 소를 잘 부리기 위하여 힘과 요령을 적절하게 써야 합니다. 그러려면 단단히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쟁기잡은 농부가 자꾸 뒤를 돌아다보면, 밭고랑은 삐뚤삐뚤해 집니다. 밭고랑이 꾸불꾸불해지면 농부에게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산만하고, 엉뚱한 곳에 정신 팔려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나라가 되도록 내가 선 삶의 자리에서 분투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영혼을 사모하고, 팔복의 영성으로 무장하고,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나라에 합당하게 사십시오. 주님의 구원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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