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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식민지였다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설교문(19. 5. 26)
2019년 05월 27일 (월) 12:02:40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일설교문(19. 5. 26)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
행전 16:6-15 “로마 식민지였다”


지난 주 월에 정운이와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정운이가 불쑥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목사가 됐어요? 질문 자체가 반가웠습니다. 보통 묻는 말에만 답하는 데 먼저 물어주니까 좋았습니다. 그래서 짤막하게 목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말했습니다. 총신대 다니다가 80년 5.18 광주진실을 알게 되면서 신앙전향을 하고나서 총신대학을 그만두고, 나이 들면 청년 때 품은 목사 소명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없어지기는커녕, 목까지 차는 압박을 견딜 수 없어서 다시 목사의 길을 갔다고. 이처럼 목사가 된 것은 내 의지보다는 하나님의 섭리가 훨씬 강력하게 작용했다고. 그렇게 목사가 됐지만 지나고 보니,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맞는 길을 인도하셨다는 고백을 합니다. 진로결정에 참고하라고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나에게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제일 먼저는 본인 자신이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또 주변 사람들이 보는 판단도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나도 인정하고, 나를 아는 사람들도 인정하면 그 길은 대체로 맞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왕에 사람이 인생을 살자면, 자기의 업이 공익적인 면모를 가져야 합니다. 출세, 성공, 어느 자리에 오르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전두환이는 권력 욕심에 제 나라 시민들을 학살하고 대통령까지 됐지만 지금 전두환 인생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제 식구들과 저 닮은 자한당 부류들이나 그렇다고 할 뿐, 대한민국에서 뇌가 정상인 사람은 전두환을 살인마라고 하지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 그런 인간들 얼굴은 얼마나 흉측하게 변하는지! 그리고 인생에는 답이 없습니다. 특히 청년시절에는 실패든 성공이든 다양한 경험자체가 인생수업이어서 꼭 어느 길을 가야만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자기 업에만 몰두하기보다는 민주공화국 시민의식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이근안 같은 고문경찰도 자기 업에는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충실하면 할수록 그는 민주주의와 사람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업에 충실함과 동시에 민주주의 의식을 함양하고 우리나라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이 나라가 어느 방향으로 가면 좋을지도 의식하는 깨어있는 민주 시민이어야 합니다.

일 자체보다는 방향도 중요합니다. 방향은 하는 일의 가치와 노선을 말합니다. 생명의 길이 있고 죽음의 길이 있습니다. 요즘 삼성바이오의 회계조작사건 은폐 연루자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있습니다. 삼성물산과 합병할 때, 제일모직 가치를 뻥튀기해서 무려 3조원의 유령회사를 만들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그 유령서류를 조작하는데 한국의 대표 회계법인이 동원됐습니다. 국민연금도 그 가짜서류에 속아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에 찬성표를 던져서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 손해를 봤습니다. 국민의 노후연금이 재벌회장 경영권 승계에 쓰였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되게 하려고 이재용은 최순실에게 말을 사 준 것입니다.

회계법인은 기업이 투자자에게 투명한 정보를 제공하는지를 검증해야 하는 본분을 망각하고 거꾸로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고 투자자를 속이는 범죄에 가담했습니다. 그 회계법인 직원들은 일에 대해서는 전문가이겠지만, 자기 일을 범죄수단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아주 나쁜 일을 한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보람있게 또 이웃에게 이롭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돼야 합니다. 복불복처럼 보이게끔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뜻 안에서 길을 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말씀은 바울 일행이 처음 유럽에 발을 딛게 된 연유를 서술합니다. 수시로 말씀드리는 바, 성서에 나오는 역사 서술은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 여부를 따지는 건 의미 없습니다. 실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원천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문헌에도 비슷한 주장이 있으면 교차검증이 되므로 사실에 접근할 수 있지만, 일세기 소수집단인 기독인들의 선교행적을 소상히 밝혀놓은 역사서는 없습니다. 대개 짐작과 유추뿐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서술 자체보다는 역사서술 형식을 빌어서 말하려는 바가 무엇이냐를 밝히는 게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바울일행이 처음 유럽선교의 문을 열었다고 말하지만 실제 그런지는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일세기에는 바울일행 말고도 수많은 전도자들이 복음전도의 사명을 가지고 순례전도를 다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 바로 위에 나오는 바나바가 그렇습니다. 바울과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선 후에 바나바는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났고 바울은 시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났습니다.(행 15:39-41) 각자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만 이런 순례전도를 한 게 아닙니다. 사도행전이 말하지 않은 무수한 전도자가 지구 곳곳을 다녔습니다. 당연히 로마도 갔을 것이고 로마 제국 아래 있는 여러 도시들에도 갔습니다. 바울일행도 모르는 전도자들이 이미 유럽 곳곳을 지나갔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로마도로는 정복과 피식민지 관리를 위해 가설했지만, 평시에는 사람들이 다니기 좋은 통행로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로마도로를 통해 제국과 교통했습니다. 워낙 순례전도자가 많아서 때로는 교회에 민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전도자인지, 가짜 전도자인지를 분별하는 요령도 나왔습니다. 전도자가 하루나 이틀을 머물면 진짜지만, 사흘을 넘기면 의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오늘 사도행전 진술에서 무엇을 봐야 하나요? 바울이 유럽선교 첫발을 디뎠다는 정보제공 말고 또 무엇을 증거하나요? 예수의 일군들이 어떤 신념으로, 어떤 의지로 어떤 행동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지를 교훈합니다.

우선 바울 일행의 동선을 보십시오. 6절 아시아에서 12절 빌립보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이동합니다. 결코 멈추거나 중단하거나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동경로를 유심히 보십시오.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성령이 막았습니다. 그러자 새로운 노선을 택합니다. 그래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로 가서 무시아 가까이에서 비두니아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예수의 영이 말씀전하는 일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노선을 바꿔서 무시아에서 드로아로 갑니다. 지금처럼 자동차로 휙휙 다니는 게 아닙니다. 대개는 걸어 다녔습니다. 문자로는 간단히 어디를 지나갔다고 말하지만, 실제 이들의 여정은 매우 고달팠습니다.

또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길을 막은 자가 악령이 아니고 성령과 예수의 영입니다. 하나님이 막았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은 길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다른 노선으로 길을 갔습니다. 왜 이들은 성령과 예수의 영이 막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힘들게 애써서 새로운 노선을 찾아가는 것인가요? 말씀전하는 일을 중단하거나 가만있어야 하지 않나요?

하나님이 전도자에게 주신 사명, 땅 끝까지 말씀을 전파하라는 사명은 중간에 변경할 사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 끝날까지 변하지 않는 주님의 제일 명령입니다. 일행은 말씀전파라는 대사명은 주님의 확고부동한 뜻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막았을 때, 말씀전파를 그만 하라는 뜻이 아니고 다른 곳으로 가라는 뜻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노선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바울일행은 처음 받은 주님사명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이 비슷한 사례를 여로보암 시대 두 예언자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다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북왕국 여로보암에게 보내서 왕을 심판하는 예언을 명합니다. 명하시기를, 베델로 갈 때 밥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온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명대로 베델로 가서 여로보암과 북왕국에게 앞으로 닥칠 일을 예언하고 돌아갑니다. 그 때 베델에 사는 늙은 예언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베델에서 한 일을 듣고 급하게 뒤쫓아 가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집에 가서 무엇을 좀 잡수시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주님께서 명하신 말씀이 있어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늙은 예언자가 나도 그대와 같은 예언자요.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를 내 집으로 데려가서 밥과 물을 대접하라고 하셨다고 말하고 집으로 모셔갑니다. 그런데 늙은 예언자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예언자의 집에 가서 음식을 먹고 있는데 주님의 말씀이 늙은 예언자에게 임했습니다. “당신은 주님의 말씀을 어겼소. 당신은 주님께서 밥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고 말씀하신 곳에서, 밥도 먹고 물도 마셨소. 그러므로 당신의 주검은 당신의 조상 무덤에 묻히지 못할 것이요.”(왕상 13장) 결국 하나님의 사람은 밥을 먹고 길을 떠났는데 가다가 사자를 만났고 사자가 물어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잘못은 무엇인가요? 처음 주님이 자신에게 명한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예언자가 자신도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다면서 구슬리니까 곧바로 속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부여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가 행하신 하나님나라 운동을 따라서 정의평화가 충만한 평등세상을 세우는 일입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세상을 사는 일입니다. 단결해서 불의에 저항하는 일입니다. 이 사명은 하나님이 주신 대 원칙입니다. 중간에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결코 바꾸거나 멈출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가다가 힘들다고, 여건이 여의치 않다고, 쉽게 뜻을 접습니다. 좌회전 방향등을 켜고 우회전합니다.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처음 뜻대로 길을 가나요? 안 갑니다. 언제 그랬냐 싶게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늘 상황 따라 살다가 세월만 보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큰 뜻을 항상 기억하고 노선을 잘 잡아서 가야 합니다. 그것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일행은 드디어 드로아에서 환상을 접하고 하나님의 뜻이 마케도니아로 가는 것임을 압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게 됐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아시아에서부터 마케도니아 환상을 보여주지 않고 계속 뺑뺑이를 돌게 했을까요? 어째서 드로아에 와서야 마케도니아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나요? 난관을 극복하는 연단을 위해서입니다. 처음부터 마케도니아 부름을 보여줬으면, 그래서 아시아의 이곳저곳을 헤매는 경험이 없었으면, 바울 일행은 연단 없이 유럽에 가는 것입니다. 유럽의 전도 길에서 환난을 당할 때마다 아시아로 돌아가고 싶다며 뒤를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아시아에서 이길 저길 다닐 때마다 성령이 막은 경험이 있어서 마케도니아에서 말씀전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땅 역시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제국의 지배에서 오는 모순과 갈등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도시입니다. 로마의 후견인 네트워크와 무관한 민중들은 어디서나 살기 힘듭니다. 이들에게 황제 복음 말고 예수 복음이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이들에게 제국의 평화 대신 예수의 평화를 심어줘야 합니다. 일부러라도 찾아가야 할 곳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복음전파사명을 아시아에서만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예수의 평화가 절실한 곳은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케도니아로 보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은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순종으로 돌파하는 사람을 결코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난 것이 그 예입니다. 하나님은 바울 일행에게 신앙이 독실하며 재력있는 사업가를 붙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루디아의 집은 빌립보의 첫 교회가 됐습니다. 예수운동의 거점이 된 것입니다. 소수자들에게 그들만이 모이는 거점이 있다는 것은 오늘날 교회 가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루디아는 미리 예비해 둔 선물입니다. 그러나 난관을 극복해야만 받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루디아는 거기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일행이 그곳을 가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치 마리아가 새벽에 무덤에 올랐더니 돌이 옮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듯이,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럼, 그곳에는 인간적 판단을 넘어서는 주님의 자비가 듬뿍 담긴 신비한 예비하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에는 그런 신비가 곳곳에서 우리를 기다립니다. 그 신비 경험을 통해 우리 신앙은 한 단계 성숙합니다. 주님 살아계심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루디아를 예비해 두었습니다. 우리가 순종하여 의로운 길을 갈 때, 루디아를 만납니다. 그 뜻밖의 선물은 주님의 뜻에 순명하는 사람들이 받는 신비한 선물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선물의 은총이 있기를 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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