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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이유, 그리고 한국전쟁
살기 위해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2019년 04월 01일 (월) 12:18:17 김홍한 khhyhy@hanmail.net

어느 나라든, 어느 문명이든 그들의 역사를 보면 전쟁이야기가 태반이다. 역사라는 것은 전쟁으로 매듭짓고 또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될 것이다.

   
▲ 김홍한님은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 새교회 목사이다.

“모든 전쟁은 추악한 전쟁이다.” 라는 말도 있지만 전쟁의 효용성에 매료되어 전쟁이라는 만병통치약을 사용하는 인간들이 전쟁의 추악함을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왜 전쟁을 할까? 전쟁은 복잡하게 꼬인 여러 문제들을 가장 쉽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꼭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질줄 뻔히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에 진다하더라도 그 결과가 최소한 지금보다는 낫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 속에 하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언제든지 권력자들이 시작한다. 그러면 일반 백성들은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갈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백성들, 그것도 가난하고 비참한 백성들일수록 전쟁에 열광한다. 전쟁은 지금의 고통을 잊게 하는 마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의 참상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환상 때문이다. 가끔은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권력자들이 비참하게 꼬꾸라지는 모습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장에 나가는 병사는 사람을 죽이러 가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나는 적병을 많이 죽여야 겠다”고 다짐하며 가는 병사는 없다. 전장에는 죽으러 간다. 그렇게 죽으러 가서는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전장에서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적병을 만나지 않는 것이다. 적병을 만나면 내가 죽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내가 적병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다행이지만 내가 적병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면 십중팔구는 미쳐버린다. 그리고 평생을 사람구실하지 못하고 산다. 그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인간을 생각하고 신을 생각하게 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이들은 신의 섭리에 찬양을 보낸다. 그러나 온갖 부조리의 결정체인 전쟁터에서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도 한다. 정의롭지도 않고 자비롭지도 않으며 합리적이지도 않은 신, 그들의 삶이 온통 무너져 내리는 전쟁터, 거기에서 신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런 면에서 전쟁은 최고의 신학교제이고 최고의 인문학 교제이다.

전쟁은 엄청난 문학작품을 쏟아낸다. 과학적 성과들이 나타난다. 엄청난 경제효과가 나타난다. 고질적인 실업문제가 일시에 사라진다. 무엇보다도 전쟁은 사람과 사회를 송두리째 바뀌어 놓는다.

1922년 5월 춘원 이광수는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실었다.

“… 허위되고, 공상과 공론만 즐겨 나태하고, 서로 신의와 충성심이 없고, 용기가 없고, 이기적어어서 사회봉사심과 단결력이 없고 극히 빈궁하고… 이렇듯 열등한 민족성을 지닌 조선인이니 당장 독립하는 것은 시기상조요, 민족성부터 개조해야 독립할 수 있다.”

고 했다. 이광수가 그토록 원했던 민족개조가 30년 후 한국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전쟁이 우리민족의 민족성을 바꾸었다. 그 바뀐 민족성이 오늘날 우리나라를 만들었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윤리의식을 바꾸었다. 사람은 마땅히 사람답게 살아야 하건만 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낭만적인 용어가 되어 버렸다. 짐승처럼 이라도 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던지 해야 했다. ‘살기 위해서 살인했다.’, ‘살기 위해서 몸을 팔았다’, ‘살기 위해서 인육을 먹었다.’, ‘살기 위해서 자식을 버렸다.’, ‘살기 위해서 동료를 배반했다’ 이 ‘살기 위해서…’라는 처절한 명분에 모든 것이 묵인되고 용서되었다.
이것뿐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였다.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자살행위로 알고 철저히 함구하였다. 학교에 등교하는 아이에게 ‘나서지 마라’, ‘중간에 서라’라는 부모의 경고는 살기 위한 최선의 처세술이었다. 무고한 친척이, 무고한 아비가, 무고한 형제가 죽어 가는데도 아무변명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을 가슴에 묻었다. 평생을 비겁함과 비굴함에 살아야 했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위안했다.

전쟁이 끝나고 보니 어느덧 우리 민족의 눈에서는 반짝 반짝 빛이 났다. 지혜의 빛이 아니다. 창의력의 빛도 아니었다. 지옥훈련을 받고 휴가 나온 특수부대 병사의 눈빛이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절체절명의 때에 얻게 되는 야수의 눈빛이었다. 더 이상 조선말기의 흐릿한 눈이 아니었고 일제치하의 체념의 눈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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