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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과 아버지의 마중
사순절 넷째 주일 하늘의 소리
2019년 04월 01일 (월) 10:41:52 양재성 hfmc1004@hanmail.net

탕자의 귀향과 아버지의 마중
누가복음 15장 11~32절

▪ 파란하늘 빨간지구 (조천호 지음)
요즘엔 미세먼지를 둘러싼 논란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습니다. 그동안 오랜 시간을 황사란 이름으로 알려졌던 미세먼지가 우리 생활 전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파란하늘 빨간지구란 책이 발간되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먼지 기상 현상이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4년 신라시대입니다. 19세기 스웨덴은 영국의 산업시설에서 날아오는 매연 때문에 ‘검은 장막이 씌워진’ 하늘을 보고 살아야 했다고 적었고, 영국은 1952년 런던 스모그, 검은 먼지로 1만 2000명이 목숨을 잃는 대형사고가 발생하였고 미국에서는 ‘로스앤젤레스 스모그’ 현상이 생겨났습니다.

   

미세먼지는 산업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지구 생태계와 인간에도 돌아간다고 지적합니다. 그 근본적인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공강우, 거대 공기청정기 같은 임기 처방이 아닌 미세먼지 감축을 위한 기준을 강화하고, 에너지 전환을 이루고 대중교통 인프라 개선 등에 힘을 쓰면 미세먼지 발생 자체를 줄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정치적 결단입니다. 책은 지속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인류는 기후변화가 일상이 된 세상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 기후변화와 교회
지난 목요일 기후변화에 대한 IPCC 1.5도 특별보고서에 대한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작년 10월 인천 송도에서 197개 국가 환경정상들이 모여 2100년까지 1.5도 유지를 위해 특단의 조치를 요구하는 특별보조고서가 채택되었습니다. 서울대 허창회 교수는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써 임계점인 1.5도 유지는 불가능하다며 이대로 가면 2100년엔 4도에서 6도 이상이 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지구 온도는 체온과도 같아서 2도만 넘어도 산호초의 대부분이 죽고 10억 명 이상의 환경난민이 발생하고 물과 식량 문제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예견하고 있는데 4도이면 그야말로 지구의 종말입니다. 요즘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지난 해 10월 한국을 방문한 존 캅 박사는 이미 임계점이 넘었고 지금 우리들의 노력은 그 종말을 조금 지연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예견이 틀렸으면 했는데 오히려 허 교수가 확인시켜준 셈입니다.
많은 참가자들은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임계점이 넘었다면 주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 하며 예수님의 귀환을 기다리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하여도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기후변화에 대한 응답을 해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실제 지구생태계는 하나님의 몸이기에 잘 보전해야할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환경선교는 한국교회가 결단해야할 최우선적인 미션입니다. 환경문제의 본질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 예수의 비유
오늘 복음서의 성서일과는 누가 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15장 탕자의 비유입니다.
예수의 광폭행진 즉 세리들과 죄인들, 심지어는 창녀들을 영접하고 함께 마시고 음식을 먹는 일은 율법을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종교 권력자들의 비난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따랐습니다. 더구나 예수는 세리와 죄인 등 당시 민중들을 지지하고 환대하였고 오히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무시하였기에 바리새인들로부터 비난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지적하고 비판하였습니다. 우선 ‘잃은 양의 비유’와 ‘드라크마 비유’는 하나님이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를 찾으시는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 하나님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명 탕자의 비유는 종교관 자체를 바꾸어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대자대비하신 사랑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 민중을 옥죄였는데 그 자체를 거부하고 다시 율법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가 말한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는 예수가 세우려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예시하고 있습니다.

▪ 한 편의 그림
때로는 한 편의 시가, 한 권의 책이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냉수 한 그릇이 사람의 운명을 바꾸기도 합니다. 저는 윤동주의 서시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읽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한 점의 그림이 사람의 운명을 바꿉니다. 탕자의 귀향은 헨리 나웬 신부의 저서 제목이기도 합니다. 책은 1983년, 저자가 중증 장애인 시설인 라르쉬(L'Arche) 공동체에서 머물던 중, 작은 도서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한 점을 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입니다. 이 그림 한 점이 헨리 나웬의 삶을 완전히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4년 뒤 헨리 나웬은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실제 사람크기보다 더 큰 원작 실화를 보고 그 장엄한 아름다움에 그림을 떠나지 못합니다. 며칠간 몇 차례 어떤 때는 4시간 동안 빛에 따라 방향을 바꾸어가며 감상합니다. 사실 감상이 아니라 묵상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네델란드의 위대한 화가로 손꼽히는 렘브란트는 그의 인생 말기에 “탕자의 귀향”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마치 렘브란트 자신을 형상화한 듯 고뇌와 반전이 담겨져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아들과 딸을 잃고 사랑하는 아내까지 먼저 보냅니다. 그 이후의 삶도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화가의 명성도 추락하고 재정적으로 파산하게 됩니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 탕자의 비유를 기억하고 자신이 탕자임을 발견하곤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립니다.

▪ 탕자의 귀향
그림을 묵상하던 헨린 나웬은 먼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에서 아버지 품속에 안겨진 둘째 아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둘째 아들 탕자였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내 뜻이 아니요 주어진 모든 것이 내 몫도 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주어진 목숨도 건강도 지구도 우주도 내 몸도 자연의 섭리도 사실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이 은총을 선사하신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으시고 아들의 요구에 냉큼 내어 주시는 자애로운 아버지였습니다.
탕자는 제 것으로 착각한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먼 나라로 떠났고 그 나라에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다 폭삭 망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먼 나라는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는 나라, 하나님의 간섭이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나라, 탐욕과 향락만 존재하는 일그러진 나라, 소유로 평가받는 나라입니다. 존재의 중심추를 잃으면 당도하는 나라로 아버지의 품을 떠나면 도달하는 나라입니다.
결국 탕자는 종말론적인 종말을 맞이합니다. 가지고 있던 것은 다 낭비하고 빼앗기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언젠가는 낡아지고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뭄이 들어 구걸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오랜 굶주림 속에 돼지가 먹는 열매라도 얻고자 하였지만 그것조차도 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돼지처럼 대접해주길 바라는 자신, 돼지만도 못한 자신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둘째아들은 스스로 돼지가 아니라 인간 그것도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입니다. 탕자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은 그 깊은 절망 속에서 삶의 전환점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결단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아버지에게 돌아온 탕자는 내 몫을 달라고 요청하던 오만은 사라지고 난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소유, 품꾼입니다. 철저히 자신을 비운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거듭남이란 게 있다면 이런 상태입니다. 회개란 것이 바로 이런 행위입니다.
이렇듯 우린 일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을 언 듯 떠올리게 될 때가 있습니다. 때론 자신을 들여다보며 한심할 때가 있습니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 힘겹게 고난의 터널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분에게 돌아오십시오. 주저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이후 한 순간도 우리를 기다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그를 의지하고 믿으십시오.
란은 꽃을 그냥 피우지 않습니다. 난을 따뜻한 온실에 계속 두면 꽃은 피지 않습니다. 바깥 추운 곳에 적당한 기간을 두어야 안으로 깊이 침전해야 꽃이 핍니다. 때로는 원치 않는 고난이 엄습해오지만 이를 잘 견디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이 때로는 은총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신앙의 신비이며 삶의 신비입니다.

▪ 큰 아들의 분노
둘째로 주목한 것은 약간의 노기를 띤 큰 아들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한 번도 아버지를 거역해 본적이 없고 아버지를 지극함으로 섬겼던 큰 아들입니다. 범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생의 귀환을 거부하고 그를 귀한 손님으로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자애로운 행동을 규탄하며 화를 내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정의롭지 않다며 따져 묻고 꾸지람을 하고 벌을 주어야 할, 아버지가 오히려 새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발을 신기고 잔치를 배설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귀가를 포기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아버지를 돕고 섬겼는데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더니 당신의 재산을 다 팔아 탕진하고 돌아온 뻔뻔한 아들을 자신보다 훨씬 잘 대접하는 모습을 보며 화가 난 것입니다. 탕자를 환대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큰 아들의 신앙은 바리새인들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입니다. 보여주기 위한 신앙입니다. 그 속엔 사랑도 생명력도 없습니다. 약자를 정죄하고 무시하는 오만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는 그것을 지적하고 그들이 그 껍데기를 벗고 나오기를 기대하셨습니다.

▪ 아버지의 사랑.
이 비유의 주인공은 단연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새로운 ‘소명’을 발견하게 된 헨리 나웬은 아버지의 자비에서 소명을 깨닫게 되었고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을 떠나 중증장애인 공동체 ‘라르쉬’에 들어가 평생을 헌신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헨리 나웬은 탕자의 귀향을 통해 구경꾼으로 살아온 사람이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며 회개를 가르치던 자리에서 회개하는 죄인의 자리로 내려와 소중한 존재로 사랑받는 인간이 되는 과정을 그려냅니다.
이 비유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존재는 아버지입니다. 영원한 아버지의 품입니다. 작은 아들도 큰 아들도 받아주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존재의 근원,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아버지의 품은 그냥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탕자는 전 재산을 잃고서야 비로소 인간 존재의 근원인 아버지를 발견하게 되었고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을 비유하는 아버지는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며 내 인생 여정의 종착점이며 마지막 안식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큰 아들은 평생을 아버지와 함께 살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큰 아들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존재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보아야합니다. 그 사랑을 알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정말 불행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 내 인생에 가장 큰 축복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취급하고 회당을 관리하였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성인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자신을 위해 지으셨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는 진정한 만족과 평안함은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공부를 잘 해서 출세를 하고 유명인사가 되어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배운 것이 부족하고 번 돈이 몇 푼 안 되어도 몸이 아파도 하나님을 만나고 그를 믿는 다면 그는 세상에 전부를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아시겠습니까?

▪ 아버지의 마중
헨리 나웬은 아버지의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당해야할 사명은 아버지의 역할입니다. 품어주고 기다려주고 또 품어주는 하나님. 단죄하기보다는 용서하고 꾸짖기 보다는 자상하게 설득하고 측은히 여기는 하나님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언젠가 소개했던 제 이야기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로 생각됩니다. 저는 중등부 임원이었고 매주 토요일 저녁 학생회 예배가 있었고 예배를 마치면 임원회의가 있어 혼자서 오리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오리 길이 도개비가 나오고 여우가 나오는 참 무섭고 으스스한 길이었습니다. 혼자서 그 길을 통과하려면 찬송을 부르면서 무장을 단단히 해야 합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작은 숲길을 걷는데 저 멀리서 시커먼 그림자가 다가옵니다. 사람의 그림자였습니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매 한가지입니다. 어느 정도 가까이 오더니 내 이름을 부릅니다.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두려움과 공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평온함이 찾아왔습니다. 나에겐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늘 아버지의 마중을 나갔었는데 그날은 아버지가 아들 마중을 나온 것입니다. 난 아버지의 마중을 통해 하나님의 마중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늘 우리가 당신에게 돌아오도록 마중을 나오십니다. 하나님의 마중입니다. 오늘 탕자의 귀향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아버지의 마중입니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간 우린 탕자의 자리에서 혹은 큰 아들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오십시오. 돌아가야 할 고향이 있다는 것은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에겐 놀라운 축복입니다. 당신의 것을 당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으시고 냉큼 내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돌아올 것을 아시고 마중을 나오는 자애로운 아버지입니다. 지체하지 말고 돌아가십시오. 여러분의 문제를 이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가정도 직장도 건강도 다양한 삶의 문제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즐거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찬미하십시오. 어려운 일을 만나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누군가가 여러분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 기꺼이 그를 도와주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사명이며 축복을 쌓는 길입니다.
우리에겐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탕자의 귀향은 바로 우리의 귀향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 귀향을 통해 만난 아버지의 마중. 내 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며 행복입니다. 우리를 마중 나오신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우리를 향해 내민 하나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더 이상 그분을 기다리게 하지 마십시오. 그 아버지를 경험한 사람은 아버지를 떠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언제나 저와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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