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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눈물겨운 쉬르리얼리슴 바다로
양준호님의 「모던시 읽기」를 접으며
2019년 04월 01일 (월) 09:53:18 양준호 shpt3023@daum.net

「모던시 읽기」를 접으며

오늘은 한강을 건너 합정의 카페거리에서 카푸치노나 한잔 하고 싶다.
2017년 9월초에 시작한 연재가 이제 2019년 4월 초 꽃피는 봄에 대단원의 막을 접는다.
일주일에 詩 3편씩과 그에 따른 작가노트 3편을 메일로 소개하는 작업, 어찌 보면 ‘시인’연작은 詩의 고정관념을 깨는 듯한 시인의 체취로 다가왔고, 그 반응도 좋았다. 처음의 우려를 뒤집는 듯한 반응, 그렇다 그것은 뜨거운 관심이었다.
예전 누군가는 당분간 詩를 잊고 살라던 詩人도 있었다. 연재 중 詩人 연작은 내 詩의 존재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게 했고 스스로의 詩에 대해 많은 자성도 해 보았다.
정말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연재를 끝내며 그전 써 놓았던 양준호의 자작시 해설 「가자, 눈물겨운 쉬르리얼리슴의 바다로」를 보내드린다.

〈자작시 해설〉

가자, 눈물겨운 쉬르리얼리슴의 바다로

-양준호의 시세계 그 일면

⊙ 들어가는 글

필자는 오랫동안 초현실주의(?)의 시에 경도된 바 있다. 여기서는 필자의 뭇 작품 중「강물 속의 해바라기」를 상재할 무렵 (`86~`88)의 몇 작품을 통해 필자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기로 한다.

⊙ 중심 글

우선 `사마귀와 ~`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 중 대부분은 분실되었다.)

   

「사마귀와 내가 느끼는 교감 그 첫 번째 사건」

그만 버릴까
말까
지하의 층계에서 꽃을 가슴에 안고
휴지통 앞을 잠시 서성거렸다
제비는 일직선으로 나의
심장을 향해 진군한다

어떤 벌레의 죽음을 알려주나
꽃가루를 뿌릴까
마이크 소리가
따가운 이 시대의 상류쯤
맹장을 끊어내던 그
무렵부터의 버릇인
아직
맘에 드는 젖을 갖지 못한 밤
아이는 산을 품고 잠든다.

이 작품(어떤 연유에 의해선지 중간에 제목을 바꾸었다)에 대해서는 그 제목이 `사마귀와 내가 느끼는 교감 그 첫 번째 사건` 이었는데 여기서는 사마귀[버마제비]가
혼자서 느낀 교감보다는 시인의 느낌이 작품에 스미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원 제목을 좀 고쳤다. 그리고 이 시의 제목에 대해 여류시인 이병희는 내용은 좋으나 제목이 `거지 같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그건 제목에서 아직 시적 자유(?)를 얻지 못했다는 뜻으로 새겨들었다.
그럼 왜 사마귀가 등장했는가?

1904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살바드로 달리(Dali, Salvador)라는 쉬르리얼리슴의 화가가 있었다. 이 화가는 편집광(-어떤 사물에 집착하여 상식적으로는 판단도 할 수 없는 행동을 예사로 하는 정신병자란 뜻:여기서 부언해 둘 것은 살바도르 달리는 정신병자는 아니고 인간에게는 누구라도 이런 요소를 지층에서 분출구를 찾아 솟구쳐 오르는 용암처럼 가지고 있는데 이성으로 잘 통제하여 이를 막고 있다는 것이다)적인 분석안으로 밀레의 `만종`에 나오는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여인을 사마귀란 곤충으로 연상(연상이란 자유로운 것이 아닌가, 피카소도 일부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한 것이다. 이 사마귀는 교미 후에 수컷을 잡아먹는 험악한 곤충인데 어렸을 적엔 누구라도 싫어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여간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 나름대로의 느낌으로 제목을 그렇게 정했다.

이 시에서는 우선 시인이 문득 한 송이의 꽃을 발견한다. 이어서 그 꽃의 시듬, 죽음을 일깨워 준다. 제비는 일직선으로 시인의 심장으로 날아오고 그 날아듬은 벌레의 죽음[소식]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시에 나오는 시대는 필자가 맹장을 끊어내던 저 60년대의 소년적이고, 그때와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고, 그때 이후 아직 마음에 드는 꽃 아니 어쩌면 그때의 소녀상[모성애의 결핍(?)]을 발견 못한 시대요 어둠 속이지만 아이는 넉넉하게 산을 그리며 산 속의 뭇 짐승들의 고른 숨소리와 함께 잠든다는 뜻이다.

다음 詩를 보기로 한다

「강물 속의 해바라기」

-내가 어느 큰 새의 자궁에서 잠자고 있는 동안 세상은 자주 얼굴을 바꿨다.

해바라기가 피어난 누드의 산비탈쯤
꽃을 감상하기 시작한다.
드러난 입술과
드러나지 않은 입술에서
뜨거운 피의 허망을 느끼며
낮달의 이마를 짚어보고 싶음은
애벌레가 가진 어둠만큼 아직
어린 탓일까
그때 왜일까
고드름처럼 거꾸로 서 있는 것 같은 환상
새는 여전히
강언덕에서 바람처럼 떨고
등 뒤에선
빨간 주검이
비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 詩의 제목에 대해 역시 여류시인 이병희는 해바라기가 종일 그리움으로 해를 바라보다, 온몸이 지쳐, 강물에 몸을 담그고 쉬고 있는 듯한 풍경이 연상된다고 했다.

여기서는 詩人이 어느 큰 새[이 새는 하루에 구만 리(里)나 날아간다는 상상의 큰 새일 수도 있다]의 자궁에서 잠자고 있는데[물론 시적 환상이다] 이는 우주 또는 영원한 모성의 품 안에서 잠들어 있는 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다는 뜻도 되고, 세상살이를 잘 몰랐다는 뜻도 되겠다.(이 부제로 붙인 구절은 시 본문에 나뉘어 들어 갔었다) 이 詩의 주인공인 해바라기는 기다림의 누드로 서 있고 그제야 꽃을 감상하기 시작한다.
그 느낌은 나타남의 미학[즉 입술]과 사라짐의 미학[즉 입술]에서 뜨거운 피의 소멸과 죽어 있는 듯한 낮달을 소생시키고자 함, 즉 죽어가는 것에 대한 소생 의지 아직 애벌레가 가진 어둠[미숙한 사상 부스러기]만큼 어수룩한 것이 아니냐고 독자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따스한 날에 녹아버릴 고드름처럼 허망한 것이지만, 시인의 의지 안에서 새는 두려움에 떨고 주검은 우리의 배후에서 소리 없이 다가온다는 生(삶)의 인식 그 자체일 것이다.

다음 詩를 보기로 한다

「토끼야 산토끼의·3」

항아리 뚜껑을 그만 열까
그곳엔 오랫동안
꽃을 잊은 나비가
죽은 듯 엎드려 있어
그 잔잔한 꽃무늬에게
바람 속 떠도는 풀들의 소원을
아이가 눈가리개 놀이하듯
살짝 귀띰해 줄까

이 詩의 제목은 1981년의 어느 날 (당시 필자는 거의 종일 시에 몰두해 있었다) 세 살 먹은 딸과 그 할머니가 피아노를 치면서 `토끼야 / 토끼야 / 산 속의 토끼야`라는 소절까지를 힘겹게 넘어가고 있었다. 거기에서 받은 느낌을 `토끼야 산토끼의`라는 제목으로 붙였다. 이 작품에서 항아리는 저 먼 역사에서부터 이어온 묵은 역사일 수도 있고, 우리의 고단한 삶으로도 볼 수 있다.
그곳엔 꽃을 잊은 (아름다움을 상실한) 나비, 거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진솔한 삶 (하늘(?)의 의미)을 살아가는 풀들의 소망도 일깨워 준다. 더 나아가 삶을 삶답게, 기쁨을 기쁨답게 해 주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다음 詩를 보기로 한다.

「노을 안에 서서」

그 여자와
내가
새들이 죽어 있는 백사장에서
노란 천에 묶여진 꿈을 꾸었다.
주간지에선
짐승들의 헐떡임이 묻어나던 오후
`네르친스크`가
`비르친스크`로 지구상에 없는 지명으로
오자가 난 것을 교정보던 무렵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밤밀콩빛
그 여자의 얼굴은 없었다
나는 왜
신상 부근을 날아가는 하나의 새처럼
바다를 무서워 해야 하는 것일까
오랜만에 관절을 꺾으며
눈뜨는 풀잎의 설렘을 본다.

이 작품은 어느 여자(이젠 그 여자의 눈망울 마저도 잊었다)를 향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고된 업무[출판사 근무]와 평소의 느낌[물론 가상의 상황에서이다] 등이 복합적으로 짜여진 詩이다. 앞에서도 시의 제목에 대해서 언급했지만 이 시의 제목에 대해서 지금은 고인이 된 詩人 류제하는, `미친 여자인가 노을 안에 서 있게`라는 소리를 한 적이 있다.

이 시는 문명에 오염된 백사장이 그 주무대이다. 그곳에서 내 연상 속의 그 여자와 나는 노란 희망[기원]의 천에 묶여 함께 공존한다. 한편에선 난잡한 주간지의 기사가 어른거리는 나른한 오후였고, 역사적인 `네르친스크`도 `비르친스크`로 오자가 난 어떤 개인사의 위기의식으로 가득한 현대 문명의 오후 [이미 그 여자는 詩를 쓰고 난 후 그 감정은 바로 소멸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의 내면은 거대한 신상(神을 지칭(?)) 부근을 날아가는 한 마리의 작은 새처럼 두려움에 잠긴다. 이는 오랫만에 느끼는(이 작품을 쓸 무렵의 느낌) 감정으로 무료히 관절을 꺽어 본다는 것으로 절망을 되짚어 다시 희망으로서의 어떤 꿈에 부풀어 본다는 것이다.

다음 詩를 보기로 한다

「건반 속에는」

길도 숨고 달도 숨고 유방도 숨고
그런 날이면
피아노 건반 속에는

너의 몸부림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나의 젖꼭지가
무르익은 오디같이
바다를 밝히던
오후.

고양이는 죽어가고 있었다.

이 시에서 피아노의 건반[리듬] 속에는 세상의 길도 숨어 있고 그 길을 비추던 달도 숨어 있고 포근한 누나의 유방 등의 사물들이 저희들끼리 몸부림치고 있다. 어떤 노래[詩]의 멜로디의 근저에는 수시로 어둠을 지워 버리려는 꼬마전구같이 어둠의 바다를 밝히던 누나의 젖꼭지 그 핵심 포인트 즉 오디같이, 반딧불이 같이..... 그 오후의 정지된 것 같은 나른한 오후(그 눈동자가 향기(?)로운)고양이는 죽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 설정이다.

여기서 보면 죽어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존재의 자각]이 짙게 깔려 있다.

⊙ 마침 글

앞에서 본 시편들은 문명사회에서 오염되지 않으려는 순수의지를 지키려는 개인의 저항 의지가 담겨 있다.
개괄적으로 말하자면 필자의 시세계는 존재에 대한 `깨어 있음` 또는 존재에 대한 `망설임`에 많이 근접한 현대시의 이미지시로 어떤 `서러움[망설임-생각은 앞서 가 있다]`또는 어떤 비애의 확산(?) 세계를 나타내려고 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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