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박덩굴 만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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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박덩굴 만나는 날
  • 박성율
  • 승인 2019.03.19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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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박덩굴에 담긴 이야기

노박덩굴 만나는 날

사르륵, 소리 내며 산길을 간다. 낙옆이 추락하는 동안 참았을 비명을 밟으며 간다. 고드름이 여기도 한 번 돌아보라고 날카로운 손을 흔든다. 바람에 묻어오는 박새소리는 칼바람에 시달려도 여전한 깨끗하다. 추울수록 무리지어 서로를 부축하고 서로에게 기댄다.


저만치 노박덩굴이 빨간 입술로 소리친다. 끊어지지 않는 뱀껍질처럼 제 몸을 어루만진다. 어쩌자고 산사태 난 자리에 자리 잡았냐고 뿌리에 달린 눈이 뽀드득 거린다. 할아버진 노박 덩굴이 가려워한다며 봄에 가지 껍질로 노끈을 만들었다. 정말 시원해졌을까? 할머니는 쓴맛이 있지만 찬물에 헹구면 맛있다고 어린순을 나물로 먹었다. 줄기를 남사등(南蛇藤), 뿌리는 남사등근(南蛇藤根), 잎은 남사등엽(南蛇藤葉)이라 하여 각각 약용하는데 거풍습(擧風濕)하고 활혈(活血)하며 소종해독(消腫解毒)하는 효능이 있다. 노박덩굴은 줄기가 벗겨진 쓰라린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 녹색꽃이 지면서 노란열매를 드러낸다. 그리고 눈이 내릴 즈음 빨간 가종피를 드러내며 웃는다. 할아버지는 아셨다. “맛은 맵고 성질은 따듯하지만 많이 먹으면 심장이 멈추니 조심해라” 어린 소년은 알아듣지 못했다. 할머닌 태어나자 마자 죽은 아버지의 형 때문에 달걸이가 불편하면 노박열매를 볶아 먹었다. 소년은 봄이면 뱀껍질(줄기)이 가렵다는 말을 커서도 알아듣지 못했다.

산길을 걷다가 노박덩굴에서 붉어도 뜨겁지 않은 할아버지의 시간을 만났다. 길은 어디까지 이어졌는가? 길이 스스로 듣고 침묵하기 전에 나는 들을 수 있을까? 노박덩굴 사이로 노루가 뛰어간다. 화들짝 놀라 노을의 시간이다. 보고 있지만 깨닫지 못한다. 일상가운데 진리가 담기고 평범한 사건이 비범한 계시가 된다. 뱀껍질이 다리를 휘감기전에 한 줌 열매를 손에 쥐고 걸어 내려온다. 어둠이 내리지만 이미 미래를 보며 과거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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