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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교회 출발은 참여적이고 민주적이다
2019년 03월 03일 (일) 22:30:51 김경호 kim17kh@naver.com

교회(에클레시아)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에베소서 1:20-23)

교회는 희랍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인데 본래 희랍의 정치를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여기서 에크(ek)는 ‘밖에’, ‘밖으로’라는 뜻이고 클레시아(klesia)의 원형은 ‘클레오’라는 동사이다. 클레오는 두가지 뜻으로 쓰이는데 “부른다”, “모으다”는 뜻이다. 즉 “불러 모으다”는 뜻이다. 문자적 뜻은 “밖에 회중을 불러 모으는 것”을 가리킨다. 헬라식 민주주의에서 광장(아고라)에 모인 시민들의 총회 공의회 또는 민회라고 부르는 통치기관이 에클레시아이다.

불레라고 부르는 입법회의(의회)도 있지만 최고의 권력기관은 광장에 모인 회중 ‘민회’(에클레시아)이다. 모든 자유민으로 구성된 도시의 시민들은 광장에 모인 공의회에서 그들이 시민의 대표를 선거하고, 대사를 선출하고 전쟁과 화의 여부를 결정하고 동맹을 체결하기도 한다. 또한 재판의 집행과 법률제정에 있어서 최후 결정권을 가진다. 에클레시아는 최고의 권력기관이며 그 일원이 되는 시민들의 영광을 나타내는 말이다. 로마 공화정 체제하에서 로마의 시민과 민회는 궁극적인 주권의 원천이었다. 집정관이나 원로원이 의견은 제출하지만 최고의 권한은 에클레시아가 갖는다.

이렇게 그리이스와 로마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전통은 이들의 정치체계의 중심이었고 자랑이었다. 이들이 작은 도시국가가 강성해져서 페르시아, 마케도니아등 강력한 제국을 물리치고 세계의 맹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가진 에클레시아 민주주의에 대한 긍지였다.


우리는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노래를 아스팔트 위에서 불렀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이미 주전 509년에 공화정(Res Publica)이 시작되었다.

공화정을 시작하면서 공화정을 책임진 최초의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브루투스는 자신의 두 아들이 왕정을 복구하려는 세력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시민들은 이에 아들들의 처벌을 원했고, 루키우스 브루투스는 시민들이 모인 광장에서 자기 손으로 두 아들을 처형하는 아픔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공화정을 수호하려는 강한 의지로 인해 로마의 공화정은 유지될 수 있었다.

시대가 한참 지난 후에 그 가문의 아들 브루투스가 줄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ar)가 내전을 종식하고 명칭을 임페라톨(Imperator, 명령자)이라 부르며 독재자가 되려하자 공화정의 복원을 외치며 시이저를 암살했다. 그러나 결국은 시이저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고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잡았다. 이 때 사실 공화정은 무너지고 제정으로 넘어갔지만 황제는 공화정을 가장했고 로마인의 긍지인 민주정의 흔적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당시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Imperator의 칭호를 받았으나 황제 스스로가 Augustus(존엄자)라고 불렀고 자신을 제1의 시민(princeps civitatis)라 부르고, 호민관이라 호칭했다. 로마에서 호민관은 시민을 대변하는 직책이기에 임기 후에라도 귀족들이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평생토록 권력을 갖는 권한을 부여했는데 황제는 호민관의 신성불가침권을 자신에게 영구적으로 적용했다. 황제는 에클레시아에서 대표들을 선출하던 것을 폐지하고 자신이 그 권한을 행사했다. 황제에게 삼권이 집중되었으며 황제숭배를 시도하였다. 그는 형식상 로마인이 긍지로 삼는 에클레시아 정치를 완성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처신했다. 그는 에클레시아의 머리인 체 했다.

로마의 국내정치는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는 부흥기였으며 문화적인 개화기였다. 그들은 로마의 평화시대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로마의 평화는 매우 허구적인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기간에 투기장에서 격투를 했던 검객이 1만명이고, 이 기간에 맹수들과의 싸움을 26회 개최했는데 이것으로 3,50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또한 실전과 똑같은 해전을 즐기기 위해서 로마시 교외에 인공호수를 만들었다. 그 위에 30척의 전함을 띄워놓고 3,000명의 포로를 동원하여 죽기 살기의 싸움을 관전하며 즐겼다고 한다

그들은 식민지 도시에서도 이런 검투의 경기를 개최했다. 이는 승리의 축제, 시가행진, 육상 및 검투의 경기등으로 이어졌다. 적의 장수를 모욕하기위한 경기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행해졌는데 이는 로마인과 식민지 상류 계층의 지배를 확고하게 만들어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시민의 오락을 위하여 희생되었다. 이것이 로마의 평화가 구가되었던 그 중심부에서 자행된 일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로마의 시민들에게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확실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단지 로마 시민이라는 이유로 부자가 되었다. 로마는 자기 시민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전 세계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매일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빵을 제공하고 실전에 방불하는 오락거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로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불되는 희생에는 무관심하였다. ‘로마의 평화시대’는 지배당하던 민족에게는 무자비한 군사적 탄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민중의 희생 위에선 경제적 부흥이었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는 피와 눈물로 얼룩진 평화였다. 잔인하고 전시적인 십자형의 공포와 학살 위에 소위 “로마의 평화”라고 일컫는 쥐 죽은 듯 고요한 죽음의 평화, 로마의 군사적 정복으로 얻은 평화, 아무도 이견을 말하지 못하도록 강요된 평화가 있다. 평화를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평화가 된다.

로마 시민의 막강한 특권- 모든 것이 보장되는 특혜-로마의 시민이라는 자체로 모든 것을 누리고 막강한 부를 누린다. 트럼프는 그렇지 않아도 지금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인데 미국 시민을 당시 로마 시민의 버금가는 지위에 올리려고 전 세계를 쥐어 짜려고 노력한다.

로마의 시민권은 먼저 일정한 재산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로마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도 기준 이상의 재산이 있어야 시민권이 주어졌다. 무산자(플로레타리)는 배제했다. 그들이 긍지로 여기는 도시의 시민은 자유인, 로마인, 남자, 성인에 국한 된다.

그들이 전 세계 주민을 자기들의 노예와 놀이감으로 전락시켜 얻는 것이 로마의 시민적 특권이다. 그들에게는 천국이지만 지배받는 민족에게는 모욕이고 고통이었다. 반면에 하나님의 교회가 추구하는 정치방식은 다르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 거룩한 시민은 가난한 자가 주인이 되는 나라이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다”(누가 6:20). 그리고 이 나라는 지금 굶주리는 사람, 슬피 우는 사람이 주인으로 초대된다(누가 6:21-22). 또한 희랍에서 제외되었던 종, 여자, 이방인도 포함되며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그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고 하신다. 교회는 로마의 시민에 맞서서 이 새로운 구성체를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불렀다.

이에 비해 교회는 세계의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범세계적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투쟁이었다. 교회의 출발은 가장 정치적이며 동시에 가장 거룩하고 숭고한 종교적 신앙의 발로이고 이는 가장 민주적이고 가장 참여적인 출발이었다.

교회는 희랍의 최고기관인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그대로 교회를 표현하는 말로 받아왔다. 그들의 민주정치는 자기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로마시민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되고 있는 가난한 자, 이방인, 종, 여자, 어린아이도 포함하여 모든 고난 받는 인류를 품는다.

로마의 황제는 자신이 평화를 열고 자신이 에클레시아의 머리임을 과시한다. 여기에 대해 새로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평화이며 에클레시아의 머리시라고 외친다. 교회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모두를 초청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근본적으로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존중되는 새로운 세상의 지체들이며 그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그들이 꿈꾼 교회의 출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에클레시아의 머리라는 선언은 그리스도의 주권이 교회나 종교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체제, 제국과 맞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로 세상을 세우겠다는 강력한 의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역사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에배소서 1:20-22).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는 말을 특정 종교, 기독교의 교회 안에서 예수가 최고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본문은 예수를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굴복시키시고”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왕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 에수 그리스도야 말로 당시 로마가 긍지로 삼지만 어긋나간 진정한 에클레시아의 머리라는 말이다. 이것은 예수를 교회 안으로 축소하는 말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에클레시아(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시다”는 말은 참다운 시민권에 대한 선언이며 새로운 국가 설립을 희망하는 함축적인 구호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시다.”라는 말을 교회 안의 일로 생각하면 아무런 감동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세워야할 새로운 나라의 제일 강령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헬라인이나 유대인, 주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구별이 없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모든 갈라진 것을 하나되게 하신다.’고 선언한다.

노예의 노동을 근거로 서있는 거대한 제국, 로마에서 노예나 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한 혁명이 어디 있겠는가? 교회는 모든 인간의 일체의 자별을 배제하는 토대에서 시작되었다. 초대교회 신도들이 순교까지 해 가면서 지키고자 했던 신앙은 종교적 열광주의라서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로마의 시민은 차별을 유지하기 위해 싸웠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순교한다.

오로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맞게 생활하십시오(폴리테우오마이). (빌립보서 1:27)

여기서 하늘의 시민권은 당시 로마의 시민권과 상대적인 개념이다. ‘생활을 하다’는 말 “폴리테우오마이”는 직역하면 “시민으로 지내다. 시민권을 행사하다. 시민으로 정치하다. 시민으로 살아가다”는 말이다. 그러니 복음에 맞게 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그 나라의 시민답게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가난한 자, 여성, 노예, 어린이가 주인이 되는 ‘기쁜 소식’을 말하는 것이지, 복음이란 것이 아무런 구체적인 내용없이, 어디 하늘에 솜사탕 몽실몽실 떠다니는 막연한 사탕발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출발은 가장 참여적이고 가장 민주적이었다. 로마가 긍지로 삼지만 또한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인 로마의 시민권 정책을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으로 대체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출발이었다. 기독교는 로마가 긍지로 삼는 에클레시아로 자기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시나고그(Synagogue)라고 했으나 이를 배제하고 자신들을 진정한 에클레시아로 불렀다. 로마인들이 배제했던 사람들을 교회의 주인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초청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거대한 인류 공동체 가족을 생각한 것이다. 이런 초대교회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교회들이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무엇을 참회할지, 교회가 어떻게 해야할지를 명백하게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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