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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주일설교문(19. 2. 3) 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
2019년 02월 08일 (금) 15:40:52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일설교문(19. 2. 3) 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
누가 4:21-30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설을 앞두고 반가운 소식이 왔습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70년간의 전쟁과 적대를 끝낼 준비가 돼” 있고 “북한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 정권의 전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말했습니다. 2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북한 체제 안전에 대한 확실한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북한의 비핵화와 미국의 대북관계정상화가 행동 대 행동으로 이루어져서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화해의 봄이 열리고 가을에는 평화가 확고히 자리 잡기를 우리도 마음 모아야 합니다.

   

지난 주 화요일 강정개신교대책위가 모였습니다. 2012년 제주 강정에 있는 천혜의 바위 구럼비 발파 이후, 제주해군기지 반대활동을 위해 개신교에서 만든 단체입니다. 비록 해군기지는 공권력 폭력으로 완공했지만, 강정평화활동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고, 개신교대책위도 정기적으로 강정을 방문해서 평화활동에 연대하고 지킴이들과 교류하고 있습니다. 대책위 회의를 하면 먼저 삶의 근황을 나눕니다. 지난 주 나눈 이야기들은 오늘날 대중이 처한 현실문제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혼자만 담아 두기에는 아까운 이야기여서,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한 사람은 파인텍 노동문제 개신교 대책위에서 실무자로 수고한 목사입니다. 이 목사님이 합의 이후 겪은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파인텍 노사합의가 미진하다는 비판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당사자가 아닌데도 그랬으니 당사자들에게는 더 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사람들이 참 무자비하다는 생각입니다. 무엇보다도 426일을 굴뚝농성한 사람들이 땅으로 내려와서 다행이고, 함께 단식 농성하는 사람들, 또 밑에서 농성자 뒷바라지 하는 사람들 수고가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큰데, 농성자들이 한국의 노동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을 진 것도 아닌데, 그들에게 완벽한 합의를 요구하는 것은 가혹합니다. 그냥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면 족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살다보면 비슷한 상황을 만납니다. 그 때, 경직된 비판보다는 서로를 격려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또 한 사람은 제주 난민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주의 한 교회 장로님이 개인적으로 난민들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는데, 난민들과 함께 생활하는 데서 오는 애로를 들었습니다. 그 장로님 말씀이, 난민들이 진짜 일을 못하고, 밤에 돌아다니고, 시끄럽다고 합니다. 난민들 편인 장로님이 이렇게 말할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요. 이 목사님이 난민들이 왜 그런지에 대해 차근차근 알고 있는 대로 답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일을 못하는 이유는 고국에서 하던 일이 기자, 교사, 사무직 등 지식인들이어서 육체노동이 서툰 것이고, 밤에 돌아다니는 이유는 난민에 대해 부정적인 눈이 많은 까닭에 낮에 돌아다니면 더 눈에 띄이기 때문이고, 또 답답한 숙소를 벗어나서 밤바다라도 쐬고 싶기도 하고, 시끄러운 것은 전화통화하는 소리인데 우리가 못 알아들으니까 시끄럽게 들리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듣는 우리도 아, 그렇겠구나 하고 매우 공감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고양시에 사는데, 그곳 젊은 사람들은 심상정을 지지할 정도로 정치의식은 진보적임에도 불구하고 난민에 대한 잘못된 소문들, 예를 들면 난민들이 성문제를 일으킨다는 오해 때문에 거부감을 표한다면서, 의식과 생활은 많이 다른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은 대학생 선교단체 간사로 일합니다. 학생들의 생각과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학교에서 일하는 청소나 경비 같은 힘든 저임금 비정규노동자들을 학교가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왜 학생들이 나서지 않을까? 안타까운데, 학생들 자신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도울 생각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방학에 수련회를 계획하는데, 학생들이 스펙 쌓아서 취업 준비해야 하는데 한가하게 동아리 수련회나 가서 되나 하는 생각으로 적극 참여를 안 해서 고민이라고 합니다. 간사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 사회가 청년들에게 일찍부터 기성사회에 순응하도록 준비시키는 것 같아서 덩달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임보라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신학대학 학생들은 학교에 경건활동 실천보고서를 냅니다. 그런데 장신대 학부 학생이 보고서에 섬돌향린교회에 다닌다고 했더니 경건활동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봉사활동 80시간을 이수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앨라이라는 말 들어보았는지요? 앨라이(ally)는 성소수자 차별에 대해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그 차별을 반대한다는 뜻에서 서로에 대한 연대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요즘 동성애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가 앨라이에게까지 번졌습니다. 그런 적대적인 태도 때문에 성소수자들을 지지하는 섬돌향린교회 출석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더욱 폐쇄적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네 가지 사례를 들은 소감이 어떤가요? 공중권세 잡은, 악한 영에 포획된 시대 기운에 눌려서 많은 대중들이 옴짝달싹 못합니다.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고, 다양한 선택을 권장하는 대신에 어떤 한 가지 이념이나 질서에 순응하도록 강제합니다. 이 질서를 따르지 않으면 제재를 가하고 신상에 불이익을 줍니다. ‘예’나 ‘아니오’ 둘 중 한 가지만 강요하는 건 전체주의 사회입니다.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는 ‘예’ 할 때가 많지만 때로는 ‘아니요’ 라고 용기를 발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 정의평화사랑진실생명평등이 침해당하면 아니오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양함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다양함을 부인하고 어느 일방을 강요하는 건 그렇게 창조한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환영하고 이해하고 지지하고 공감하는 것은 개인과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힘써 유지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에도 대중이 등장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입니다. 슬프게도 이들은 예수를 격렬하게 거부합니다.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28-29절)

왜 이들은 격하게 예수를 거부합니까? 왜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하나요? 문제가 무엇인가요? 일은 안식일, 회당에서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두루마리 말씀을 읽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탈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특별함이 이들을 자극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기를,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아가 제국의 폭력에 눌려서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자신들을 구원한다는 희망 가득한 말씀이 드디어 오늘 이루어졌다고 예수가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고향사람들 심사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네 아버지도 알고, 선대도 알고, 네 모친 마리아도 알고, 형제도 알고, 네 어릴 적 모습도 기억하는데... 한마디로 네 가문 별 볼일 없잖아? 그런데 네가 우리에게 해방을 선사한다고? 사람들의 인식은 얼마나 고루한지, 어찌나 기존질서에 매여 있는지!

예수는 사람들의 태도에 실망했습니다.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인가? 요셉의 아들은 진리와는 아무 연관없는 말 아닌가!” 예수가 깨친 진리는 무엇인가요? 예수는 태어나서부터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말이 있습니다. “너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야. 너는 천사 가브리엘이 점지했어. 그 뒤에 네가 태어났어. 너는 하나님의 특별한 아이야, 너의 출생에 사람은 아무 연관없어.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로 당당하게 살아야 해” 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장성해서 세례받고 기도할 때, 하늘로부터 직접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이런 과정을 겪은지라,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태어날 때부터 유전인자로 갖고 있습니다. 예수에게 사람의 가문, 집안, 연고, 인맥, 배경은 하나님나라와는 무관한 장식물일 뿐입니다. 실망한 예수는 자신도 모르게 어조가 높아졌습니다. 고향사람에 대한 반가움, 설렘이 싹 가셨습니다. 여기서 요셉의 아들이 왜 나오나? 그냥 ‘아멘’하고 받으면 되지... 그들의 갇혀 있는 안목, 질투심, 용납 못하는 불신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완고한 태도를 공박합니다. 고향사람들의 태도가 예언자를 박해하던 이스라엘 사람과 같다고 힐난합니다. 조상이나 너희나 똑같다고 고발합니다.

예수가 말씀한 두 예언자 이야기의 줄거리 핵심은 무엇입니까? 엘리야 시대 삼 년 육 개월 동안 기근이 심한데 그 와중에 이스라엘 과부는 한 사람도 구휼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돈의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만 구휼을 얻었습니다. 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아무도 고침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침 받았습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본토 이스라엘 사람은 외면하고 이방인만 구원했다는 점입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이 말을 듣자마자 화가 뻗쳤습니다. 왜인가요? 너희도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철저하게 버림받을 것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적개심으로 그를 산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신의 뜻이나 욕망이 훼방당할 때 느끼는 분노, 적개심이 큽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아주 신비하게 서술함으로 하나님이 배후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여러분, 거룩한 자의식을 갖는 것은 너무너무 소중합니다. 내가 누구냐는 자의식은 나의 삶을 결정합니다. 거룩한 자의식이 없으면 인간적인 수단을 의지합니다. 아무개 집안 아닌가 하는 잣대에 구속당합니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비인간화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그 속에 자기는 없습니다. 예서 아빠가 모친에게 반항하며 토로하는 말, “어머니 말대로 살다보니 나는 없다”는 절규가 단지 스카이캐슬만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의 자녀라는 건 엄연한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세상을 구원했습니다. 또한 예수의 자의식은 민중과 한편이 됐습니다. 민중 역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민중에게 해방을 선사하기 위해 지배세력과의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피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민중을 위해 투신했습니다. 왜 이것이 특별한가요? 자신이 민중이면서 민중임을 애써 외면하고 민중 아닌 척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리고 삶이 비뚤어지더라도 욕망실현을 위해 자기 계급을 배신하는 길로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예수는 한 번도 민중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거룩한 자의식의 생생한 예입니다. 15살에 위안부로 끌려가서 1947년 23살에 귀향한 후, 누구도 할머니의 위안부 삶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 66세 때, 정부에 위안부피해신고를 하면서 자신의 과거가 알려졌습니다. 딸이 거기 갔다 온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평생을 가슴앓이를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큰 언니는 신고하지 말라고 극구 말렸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자기를 찾기 위해서 누구 집안이라는 울타리를 넘었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찾은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언니들, 조카들이 다 떠났습니다. 졸지에 할머니는 외톨이가 됐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할머니의 삶은 평화인권운동가로 변신했습니다. 떠난 가족 대신 혈육 이상 가는 동지들을 얻었습니다. 일본은 할머니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허다한 사람들이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할머니가 못다 이룬 일을 이어받겠다고 결의했습니다. 여러분, 거룩한 자의식으로 내면을 채우십시오. 하나님의 딸, 아들이라는 의식으로 세상을 사십시오. 그 의식으로 하나님나라를 열어 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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