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 오토 피퍼는 인간이 지닌 두 가지의 위험에 대해 말하기를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을 택하려는 유혹과 참된 생으로 가는 길에 놓인 장애물이 얼마나 지독할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어떤 신학생이 자기 기도를 들어 주신 하느님을 자랑하느라고 한 이야기이다. 자기는 장차 교역에 나설 몸인데 이 길에는 제일 큰 어려움이 경제적 문제라고 생각하여 늘 하느님께 기도하기를 나는 가난해 가지고서는 주의 일을 할 수 없으니, 부잣집 딸에게 장가들게 해달라고 졸랐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 소원이 성취되어 가문 좋고 살림도 짭짤한 집 규수와 연애를 하여, 마침내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호기심을 가지고 듣고 있던 교인들 가운데는 그 기도의 신통력에 감동되어 ‘아멘, 아멘’을 연발하는데 이르러서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은 슈바이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생명을 사랑하고 구하는 일인 것이다. 이것이 무엇보다 귀중하고 또 갈급한 일이었기에 예수께서는 30대의 아까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전능자의 이름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맞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선하고 의로운 일, 생명을 사랑하고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 불가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고 그리스도의 삶을 살겠다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런 기도를 한다면 그 일이 과연 생명을 건 생명구출작전이 될 수 없을 것은 자명하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인 마티아 카라마조프의 입을 통하여 “지하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은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의 경우보다 더 하느님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동되어 자신의 구원을 믿고, 그러기 때문에 그 일에 헌신하고자 할 때 우리들은 가장 적은 저항의 방법을 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그 길을 부잣집 딸이나 얻어 결혼함으로써 쉽게 진척되는 일 정도로 알아서도 안 된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디아고 노인과 그를 따르는 어린 소년과의 대화를 통해 이런 말을 하고 있다. 87일간이나 고기잡이 하다가 허탕을 친 노인의 호주머니 사정이 딱해진 것을 본 어린 소년은 자기에게 있는 적은 돈을 빌려 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 노인은 거절했다. “아마도 나도 꿀 수는 있을 거야. 그렇지만 난 꾸려고 하질 않지. 한 번 빌리게 되면 두 번째 구걸하게 되니까.” 한 번의 위기를 쉽게 요령껏 피하게 되면 그 다음의 위기에도 도전하지 못하고, 또 도피하려는 유혹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는 동안 그 사람은 한 평생 어려움을 극복하는 광야생활, 금욕생활, 갈보리 언덕, 갈멜산의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니체는 “생존에 있어서 최대의 즐거움을 얻는 비결은 위험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신명기 30장에서 모세는 해방된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목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고 말하고 계속하여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고 권고 하였다. 생명과 자유를 얻기 위해 가나안을 향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고, 여리고성을 넘고, 아이성, 가데스고개를 거쳐서 40년 가까운 수난의 역사를 통과하고서야 한 민족사회를 형성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 7:13-14)
오늘도 한 가정의 살림을 꾸려가고, 한 공동체의 운영을 책임지고 수고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겐 무엇보다 위험이 없는 하루가 아쉬울 것이지만, 우리가 진정 영원하고 참된 삶을 찾아서 살고 또 그 길을 걸어올 우리의 자손들을 생각할 때 좁고 험할지라도 그 길이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면 그 것을 향해 두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