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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축제이어라
심오한 신학자 요한
2019년 01월 21일 (월) 16:06:35 조헌정 choshalom@gmail.com

[삶은 축제이어라]
사 62:1-5; 요 2:1-11

한자어 복(福)의 기원을 설명하는 설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넓게 보는(示) 것이라는 해설입니다. 이는 반대어인 화(禍)를 보면 더욱 분명해지는데, 화는 허물(過)을 본다는(示) 뜻입니다. 곧 복이란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세상과 이웃을 넓게 보는 일이요, 화란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과 이웃을 좁게 보는 일로 대비시킨 이 해석은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죄인들이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야훼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이를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는 사상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 조헌정님 사진은 한둔님의 페북에서

요즘은 복이라는 말보다는 행복(幸福)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합니다. 행복이라는 제목이나 이를 주제로 다루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행복지상주의 시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행복의 행은 다행 행입니다. 다행이다라는 말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같은 사건이 어떤 사람에게는 불행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된다는 말입니다. 언어의 쓰임새를 본다면 복은 받는다라고 말하지만 행복은 받는다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얻는다라고 말합니다. 복은 피동적이지만, 행복에는 주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복은 물질적인 영역에 국한되지만, 행복은 이를 넘어서는 정신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물/포도주 이야기의 본 뜻]

요한복음 2장의 물로 포도주로 만든 기적 이야기는 논란의 소재도 많고 참으로 독특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이야기는 복음서에서 유일한 이야기입니다만, 정말 이상한 것은 요한은 이 이야기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1장에서 예수님이야 말로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는 신학적으로 말하면 로고스 선재설이라는 매우 웅장한 어조로 말문을 연 다음, 이 로고스(말씀, 이성) 하느님이 인간의 살(sarx)을 입은 육신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셨다고 하는 거룩한 화육(化肉)을 선포하고, 이어 세례 요한의 입을 빌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 인류 속죄론을 설파하고 나서, 인간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 놓으신 ‘신/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이 겨우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입니다. 이게 도대체 로고스 우주선재론과 신화육과 십자가 대속과는 무슨 관계가 있기래, 이 얘기부터 써내려간 것일까?

하고 많은 기적 중에 하필이면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게 하는 술 얘기부터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술도 조금 만든게 아니잖아요. 100리터 이상이 들어가는 큰 여섯 개의 독에 물을 가득 채워 엄청난 양의 포도주를 만들어서, 그것도 이미 결혼식 잔치 집에서 준비한 포도주와 각자가 가져온 포도주를 다 소비하여 취할만큼 취한 이 하객들에게 아예 인사불성이 될 만큼의 포도주를 만들어 주는 이야기가 뭐 그리 중요한 것일까?

저도 포도주를 좋아합니다만, 이 물로 포도주 만드는 얘기로 시험에 드는 교인도 있지만, 이를 빙자하여 마음껏 마시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세계 교회에서 술 먹고 담배 피는 일을 구원에 관련시키는 교회는 남한교회가 거의 유일하다고 보지만, 사회로 본다면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서 술 담배의 규제가 너무 약해 술은 어딜 가나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길에서는 마음대로 담배 피고 담배꽁초 쉽게 버리는 나라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한 술과 담배에 제일 관대한 나라가 남한입니다. 그런데 이는 북쪽도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통일이 되면 서로 다른 이념으로 문제가 심각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둘 다 술을 너무나도 잘 먹으니 한 자리에 앉아 형님 아우 한번 부르고 어깨동무하고 노래 한번 부르면 그놈의 이념의 벽은 쉽게 허물어질지도 모릅니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서의 가장 큰 차이: 표징과 성전 파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헬라어 단어 하나는 요한은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기적(dynamis) 단어를 쓰는 대신에 표적(seme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어로는 sign 간판입니다. 간판은 그 가게 안에 무슨 물건이 들어 있는지를 말해주는 일종의 안내 표지판입니다. 요한이 세메이온을 쓰는 이유는 예수의 이적들은 그 자체가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너무 현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에 집중해야지 포도주에 한 눈 팔지 말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semeion이라는 단어가 17번 나오는데, 주어는 언제나 예수입니다.

또,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신학적으로 다른 것 하나는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성전 숙청에 대한 해석입니다. 시기로 본다면 공관복음서는 모두 이 성전 숙청 사건은 예수님 생애 맨 마지막 주간 첫날에 일어나고 이로 인해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이 일어났다고 하는 관점을 갖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예수 공생애 초반에 일어난 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 사건이야 말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사역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용으로 본다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서와 같이 단지 성전을 정화하는 일에서 그치질 않고,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성전 파괴를 요구함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하는 새로운 예수부활공동체를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관복음서가 유대교의 개혁을 말한다면 요한은 개혁이 아닌 혁명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 부활의 몸으로서의 성전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예루살렘 성전은 사람이 찾아가야만 하는 움직일 수 없는 성전으로 이 성전은 가난한 자와 병자들과 장애인들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몸으로서의 성전은 이러한 죄인들과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찾아가서 함께 거하는 움직이는 성전입니다. 우리는 광야 40년의 본래 성전이 백성들과 함께 움직이는 장막 성전이었음을 기억합니다.

[표징 이야기 속의 또 다른 표징들]

1. 사흘째 되던 날- 오늘 본문은 ‘이런 일이 있은 지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성전 파괴 이야기 속에서도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선언하셨듯이 사흘은 예수 부활을 상징하는 역사 변혁의 시간입니다. 물량적 시간인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닌, 하늘의 능력이 땅에 꽂이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말합니다. 십자가 죽음 이후 부활의 몸으로 민중들 가운데 함께 하심으로 민중 주체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곧 예수의 영광이 드러나는 때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예수에게 표징을 구할 때에 예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한다며 요나의 표징 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셨는데, 이때 요나의 표징 또한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있었다는 점이 아니라, 사흘간 있었다고 역사 변혁의 ‘카이로스의 때’를 말합니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달리 ‘때(ora)’라는 단어를 매우 즐겨하는 '때의 신학자'입니다. '영광의 때,'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 '올 때,' '고난 받을 때,' 등등.

또 하나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앞서 일어난 일들을 날짜별로 정리해 보면 1장 19절 이하의 세례요한의 증언이 있었던 날이 첫째 날이요, 29절의 ‘다음 날’이 둘째 날이요, 35절의 '다음 날'이 셋째 날이요, 그리고 43절의 '그 이튿날'이 넷째 날입니다. 그렇다면 넷째 날에 이은 사흘째가 되는 날은 일곱째가 되는 날입니다. 일곱이란 숫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사람들이 하늘을 보았을 때,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의 숫자였습니다. 이는 일주일을 구성하는 해와 달 그리고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는 7일간에 걸쳐 완성이 된다. 요한은 예수를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로고스)라 말합니다. 따라서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는 단순한 잔치이야기가 아니라 예수에 의한 새로운 창조사건을 설명하는 상징 이야기입니다.

요한은 일곱이라는 숫자에 매혹당한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복음서 안에는 표적이야기가 모두 일곱 개가 있으며, “나는 생명의 떡이다”와 같은 “나는 00이다.”라는 특수한 언어가 모두 일곱 개가 등장합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서술어가 아닌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요 히브리어로는 ‘야훼’라고 발음되는 신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신적 선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가나 혼인잔치 이야기는 제2의 창조사건의 완성의 날이 되는 날이며 요한의 예수 이해에 대한 핵심이 담겨 있는 이야기입니다.

2. 혼인잔치의 상징성 - 제1성서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관계는 자주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로 얘기된다. 오늘 읽은 이사야 본문에서도 하느님은 남편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받은 아내로 말해진다. 곧 가나의 혼인잔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 그 백성간에 새로운 언약이 맺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3. 돌 항아리 여섯
요한에게 있어 숫자는 신앙의 상징 의미가 숨어 있다. 베데스다 연못간의 38년 된 병자, 야이로의 딸 12세 소녀, 베드로의 그물에 잡힌 물고기 숫자 153은 다 그냥 숫자가 아니다. 요한은 매우 영적으로 심오한 신학자이다. 우선 돌 항아리는 정결예식을 위한 물 항아리입니다. 모세 율법에 따라 밖에 나갔다 집으로 들어오면 첫 번째로 행해야 할 일이 손과 발을 씻는 일이었다. 돌 항아리는 모세 율법을 상징한다. 이 항아리가 여섯 개였다는 말은 일곱이라는 완전 숫자에서 하나가 부족함을 뜻한다. 곧 모세의 율법은 불완전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결과로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고 만 것이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생긴 것인데 이는 그 본질상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에 의해 새 포도주가 만들어져 나오고 잔치의 흥은 더 올라간다.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함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인게 이 좋은 포도주가 아직까지 있으니 웬 일이오!’하고 감탄하는 이 잔치 맡은 자의 발언은 술 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후발 주자인 예수의 복음이 선두 주자인 모세의 능력을 능가하고 있음을 말한다.

[협력의 목회]

또 하나 생각해야 할 신학적 주제는 협력 목회이다. 물/포도주 사건을 일으키신 분은 예수이지만, 그러나 그 사건을 작동하게 한 사람은 어머니이다. 어머니가 예수께 말합니다. ‘아들아, 술이 떨어졌단다.’ 예수님의 첫 반응은 ‘어머니,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제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직 제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 답변에 매이지 않고,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로 말한다. 여기서 예수는 어머님의 말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예수는 하인들에게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히 채워라.’ 하고 말하자 하인들이 물을 채운다. 그러자 ‘이제는 퍼서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어라.’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인들이 빈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물을 퍼다 포도주를 기다리고 있는 잔치 맡은 이에게 가져다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일이 잘못된 경우 물벼락을 맞는 사람은 예수가 아닌 그들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인들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에게 피해가 오는 부당한 요구는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는 처음 본 하객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 말은 그들은 포도주로 변한 사실을 알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물이 포도주로 변했을까요? 하인들이 우물가에 가서 물을 떴을 때? 그렇다면 오는 도중에 흘릴 수도 있었고, 미리 맛을 볼 수도 있었겠지요. 아니면 돌 항아리에 부었을 때? 아니면 손님들에게 갖다 주라는 말에 순종하여 물을 돌 항아리에서 포도주 병으로 옮기는 순간에 변화했을까요? 저는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그 해답은 여기 하인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종이나 노예가 아닌 diakonois 우리말로 하면 섬기는 사람, 봉사자입니다. deacon 교회 집사 일종의 사역자를 말합니다. 여기 하인은 단순한 일꾼이 아닙니다. 신학적인 해석이 가미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요한은 가나 혼인잔치의 얘기를 통해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모세 율법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예수 복음의 시대가 임했다는 것, 그리고 그 운동은 술 떨어진 혼인잔치에서와 같은 밋밋한 율법 지키기가 아닌 삶은 곧 축제라고 하는 흥겨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예수 혼자서 하는 변혁운동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힘을 합쳐 이루어가는 일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2019년은 그냥 지나가는 또 하나의 한해가 아니라 삶의 기쁨과 감격을 잃어버린 오늘의 세상 속에서 예수와 더불어 기쁨과 행복을 창조해내는 카이로스의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보냄의 말씀]
편한 삶을 위해 간구하지 마십시오.
더욱 강건해지도록 기도하십시오.
당신이 가진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마시고,
당신 앞에 놓인 일을 해 낼 수 있는 만큼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당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받아 해낸다면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당신 자신이 기적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당신 자신을 보고서 하느님의 은혜로
어떻게 풍성한 삶이 임했는지 확인하고 놀라야 합니다.

2019년 1월 20일 주현절 두 번째 주일(부산믿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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