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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크리스마스
그 나라 임할 때까지 계시록 상황 아직 진행형
2018년 12월 26일 (수) 11:04:41 김경호 kim17kh@hanmail.net

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는데, 한 여자가 태양을 둘러 걸치고, 달을 그 발 밑에 밟고, 열두 별이 박힌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습니다.

   

2. 이 여자는 임신중이어서,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서 나타났습니다. 머리 일곱 개와 뿔 열 개가 달린 커다란 붉은 용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머리에는 왕관을 일곱 개 쓰고 있었습니다.

4. 그 용은 그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서,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막 해산하려고 하는 그 여자 앞에 서서,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삼켜 버리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5.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리실 분이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나님께로, 곧 그분의 보좌로 이끌려 올라갔고,

6.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 곳은 하나님께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 여자를 먹여 살리시려고 마련해 두신 곳이었습니다. (계 12:1-6)

서남동은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세 종류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고백하는 케류그마(초대교회 사도들이 전한 복음)적 그리스도이고 두 번째는 세속적 그리스도이다. 이는 마태 25장에서 보듯이 목마른자, 배고픈자와 동일시하는 그리스도이다. 현재 우리에게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말한다. 세 번째는 우주적 그리스도인데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맞이할 미래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고 과거, 현재, 미래의 그리스도로 구분했다.

오늘 계시록의 본문은 두 번째 크리스마스,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 말한다. 서남동의 말 대로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도래이고 메시아의 오심이다. 이것은 새 하늘 새 땅,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진정으로 꿈꾸는 그 희망의 표시로 오시는 아기 예수를 말한다. 천상의 크리스마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 그에 대한 징표로 오시는 그리스도이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사도들의 신조를 가져온 근원이 되는 예수가 탄생했고 두 번째 크리스마스는 미래에 새 세상을 가져올 그리스도의 탄생을 말한다.

서구신학은 역사적 예수(지상의 예수)에 주목 하였지만 사실상 초대교회를 비롯해서 오랫동안 고난의 세월을 견디게 한 기독교 신앙은 천상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초대교회 박해 상황에서 그들이 가졌던 묵시적 신앙의 내용은 지상의 예수가 아니고 천상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의로운 통치를 기다리는 신앙이다. 이런 묵시적 신앙은 요한계시록 외에도 부활장(고전 15장)을 비롯해서 서신의 여러 곳에 언급된다.(살전 4:13-18, 고전15:15-51, 고후 5:1-10, 빌 2:21-24, 엡 1:20-23, 고전 7:29-31, 고전 14:18, 고후 12:12)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역사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엡1:20-23).

예수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한다. 이것은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대리자, 대변인을 말한다. 고대 왕실에서 왕의 대변인이 우편에 앉아 통치를 대리하기도 하는 풍습에서 오는 말이다. “저리로서”는 ‘그곳으로부터’라는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인데 천상의 그리스도는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는 뜻이다.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의 권세를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의롭고 평화로운 통치를 시작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가졌던 묵시적 신앙이다.

기독교가 이 묵시적 신앙을 상실함으로서 복음의 영적 해석을 산출했고 하나님은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역할로 축소되었다. 이 세상의 본성과 구조에 대한 구원은 상실된 채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의 오심은 생략되었다. 복음은 단지 개인에게만 강조점을 두게 되었다. 그리스도 사건을 단지 인격의 변화라는 틀에 맞추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주적 승리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미래적 언급은 무시되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박해의 시기를 견뎌온 신앙, 미래의 하나님의 다가오는 통치에 대한 사고는 쇠퇴하였다. 부활도 역사의 종말에 있을 죽은 자의 부활, 고전 15장의 부활은 죽은 자들이 모두가 잠자다가 집단적으로 부활하는 대 역사적 변혁의 부활이다. 그런데 개인이 죽으면 낚시질 하듯이 곧 바로 영혼이 하늘로 오르는 개인적 부활, 희랍의 영혼불멸의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association 모임, 단체, 협회 프랑스 혁명에서 나온 말이다. 혁명의 윤리는 associate, 사회화하다, 함께 하는 것,이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아픔을 밖으로 내 놓고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연대할 때, 사회화할 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개개인의 힘은 약하지만 연대하면 강해진다. 온갖 무장을 하고 있는 제국의 왕조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 교회는 강한 연대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강한 사회화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오늘의 시대를 열어온 역사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사라지고 인격만 남게 되었는데 결국 거짓된 역사를 허용하는 가운데 개인의 인격도 무너지는 결과를 보게 되었다. 윤리학에서 협동과 연대성은 사라지고 내적인 교만과 겸손의 윤리학으로 바뀌었다. 내적인 겸손은 협동과 연대라는 틀 속에서 발휘되는 덕목이지 타인과의 연대라는 틀이 사라지는데 무슨 겸손이 필요한가?

오늘 본문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천상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말씀이다.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는데, 한 여자가 태양을 둘러 걸치고, 달을 그 발밑에 밟고, 열두 별이 박힌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요셉이 해와 달과 별이 절하는 꿈을 꾸었듯이 천하를 제압할 존재가 나타났다는 뜻이다. 여인의 인물됨이 범상치 않다는 말로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 그 여인은 임신 중이며 해산의 진통과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다. 그리고 지금 그 앞에 머리 일곱과 열 개의 뿔을 가진 용이 도사리고 있다. 로마의 전성기 7황제와 주변 위성국 10나라를 의미한다. 여기서 7, 10은 꼭 그 숫자라기보다는 완전 숫자다. 세상의 지배자인 왕권의 횡포가 극심하다는 숫자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아기 예수의 탄생과 함께 두 살 이하의 어린아기들이 학살당하는 아픔 속에 있듯이 두 번째 크리스마스 또한 만만치 않다.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탄의 세력인 용들이 앉아서 그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용은 아기가 태어나면 삼켜 버리기 위해 기다리고 앉아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만만한 것은 없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모든 것이 잘된다고 하면 무언가 수상한 것이다. 문제는 항상 우리 앞에 어려움들이 산적해 있다. 그것이 없는 무균 실은 자연 상태에는 존재치 않는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다가올 때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임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큰일 났구나. 망했구나 생각하면 그 생각대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 고통의 바다 한가운데서 살아가지만 우리의 믿음은 항상 수평선 너머에서 온다. 저 멀리 밖에서 오는 믿음이 우리를 이끄는 힘이다. 오늘의 거센 파도를 헤쳐 나가는 힘은 우리들의 믿음 안에 있다.

마침내 여인이 아들을 출산했다. 그 아기는 “장차 쇠 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릴 분”이었다. 이 아기는 쇠 지팡이로 천하를 다스릴 메시아이다. 모세는 나무 지팡이로 통치했지만 그리스도의 통치는 영원하다는 상징이다. 쇠 지팡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이며, 막대기와 지팡이로 우리를 보호하시던 그 통치를 능가한다. 두 번째 크리스마스로 오시는 분은 첫 번째 오신 그분이 가지셨던 육신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분은 꺾이지 않는 쇠 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릴 분이시다.

그러나 그 아기는 별안간 하나님 계신 보좌로 이끌려 올라갔다. 첫 번째 오신 아기는 이 세상의 무수한 고통을 겪으셨다. 모욕, 버림받음, 수난과 죽음을 겪으셨다. 그러나 두 번째 오시는 아기는 죽음의 세력들이 그를 기다리지만 태어나자마자, 예비하신 손길들에 의해 별안간 하나님 계신 보좌로 이끌려 올라간다. 용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그들의 기다림은 무용지물이었다.

비록 그 완벽한 힘을 가진 용이 눈앞에서 기다렸지만 결국 용은 아무 손도 쓰지 못했고, 아기는 출산하자마자 승천한다. 이것은 천상의 그리스도의 탄생이기에, 지상의 예수의 탄생이야기와는 달리 그의 어린 시절, 수세, 고난. 십자가등이 다 생략되었다. 있을 필요가 없다. 아기는 별안간 승천해서 사라졌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기가 아니다. 주인공은 바로 처음에 범상치 않은 시작으로 막을 연 여인이다.

아기를 낳은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다. 거기는 1260일 동안 그 여인을 먹여 살리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곳이 있었다고 한다. 새아기가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그리스도, 새로운 세상을 가져올 우주적 그리스도라면, 아기를 낳은 여자는 그 미래를 열어갈 주인공이다. 그것은 새 세상을 낳는 우리의 역사적 현실일 수 있고, 당시의 상황으로 들어가면 지금 박해받고 있는 요한 공동체에 대한 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 고난을 받더라도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보호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염려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공동체를 지켜 가신다.

둘째는 그가 고난 받는 날수인데 1260일은 악의 권세 아래 머무는 시간이다. 계시록은 물론 묵시 문학에서 자주 언급된다. 또는 42달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성전의 바깥 뜰은 측량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그것은 이방 사람들에게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나는 내 두 증인에게 예언하는 능력을 줄 것이다. 그들은 천이백육십 일 동안 상복을 입고 예언할 것이다."( 계 11:2-3)

그 짐승은, 큰소리를 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입을 받고, 마흔두 달 동안 활동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계 13:5)

이는 한 때 두 때 반 때(계 12:14, 단 12:7)의 시간이다.

그 용은 자기가 땅으로 내쫓겼음을 알고, 남자 아이를 낳은 그 여자를 쫓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가지고 광야에 있는 자기 은신처로 날아가서, 거기에서 뱀을 피해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부양을 받았습니다. (계12:13-14)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지나야 한다. 거룩한 백성이 받는 핍박이 끝날 때에, 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것이다." (단 12:7)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햇수로는 삼년 반이다. 당시 달력은 일 년이 360일이었고 모자라는 날 수는 윤달을 두어서 해결했다. 그러니 삼년 반은 1260일을 가리키며 달수로는 42달이다.

날마다 드리는 제사가 없어지고, 혐오감을 주는 흉측한 것이 세워질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이 지나갈 것이다. 천삼백삼십오 일이 지나가기까지, 기다리면서 참는 사람은 복이 있을 것이다. (단 12:11-12)

때로는 날 수가 연장되기도 한다. 1290일(단 12:11)이 된다. 이는 윤달이 낀 삼년 반이거나 달 수로 한때가 더해지면 1290일이다. 때로는 기간이 연장되어 1335일(단 12:12)로 나타나는데 이는 삼년반에 달수로 두 때반이 더해진 숫자이다. 정해진 기간을 연장하는 유형인데 이는 이미 날자를 정해서 기다린 사람들의 경험이다. 날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확신을 가지고 기다렸는데 그날이 되도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기간을 연장하는 유형이다. 대개 날자를 세며 기다리는 종교집단에서 나타난다.

다른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다. "밤낮 이천삼백 일이 지나야 성소가 깨끗하게 될 것이다." (단 8:14)

가장 적은 날수는 2300주야(단 8:14)이다. 이는 날 수로는 1150일인데 이는 삼년 반에서 달수로 한때 두때 반 때를 빼면 날 수로 1155일이다. 그런데 기간을 감해주시는 하나님은 짜투리 기간도 빼고 우리들의 고통의 시간을 줄여주신다고 희망했을 것이다.

아무튼 모든 날자들의 확고한 기준은 삼년 반 또는 세 때 반인데 이 시간은 완전 숫자인 일곱을 반으로 꺾은 숫자이다. 7년은 복역의 해이다. 노예된 사람이 해방을 얻는 것도 7년이고, 부채 탕감을 해주는 것도 7년이며, 땅이 쉼을 얻는 것도 7년이다. 새것이 일어나려면 7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삼년 반은 그것을 반으로 접어주신다는 희망이다. 그러니 그 숫자 자체에 무슨 신비함이 깃들여 있는 것은 아니고 기다려야할 때를 다 채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 시간을 꺾으셔서 단축시켜주신다는 의미를 가진다. 고난의 때는 쉬지나고 새날이 임박했다는 자기들 끼리 메시지 전달 방법이다.

여인이 누구냐? 메시야를 낳았으니 마리아이냐? 지상의 예수를 낳은 분은 마리아이지만 천상의 그리스도를 낳는 여인은 12:17에 언급된다. “그래서 그 용은 여자에게 노해서, 그 여자의 남아있는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과 싸우려고 떠났습니다.” 여인은 다른 자손들이 있다. 유일하신 독생자 예수가 아니라 아직 이 땅에 남아있는 자손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기를 삼키려던 용은 그 여인의 다른 자손들과 싸우려고 떠나갔다. 그들은 바로 교회, 지금 고난 받고 있는 성도들, 묵시를 쓰고 있는 교회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당하는 고난이 메시아를 낳고 있다고 이해했다. 그 고난은 천상의 그리스도 정의로운 우주의 통치자를 해산하는 고통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를, 새로운 그리스도 아기를 낳는 고통 속에 있다.

여인의 해산에서 보듯이 무릇 고통은 새 것을 낳는 진통이다. 첫번째 지상의 예수가 겪은 십자가는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우편의 통치, 재림으로 이어지는 오름의 과정을 여는 열쇄이다. 그렇듯이 지금 묵시를 쓰고 있는 고난 받는 교회는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아픔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께서 길을 여시고 첫열매가 되셨듯이 천상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해산의 진통이다.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이 지금 영원히 왕노릇하실 그리스도의 정의로운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메시아를 낳는 고통이고 새시대를 불러오는 십자가이다.

계시록을 초월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신화적 드라마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나간 로마시대의 상징으로만 이해해서 과거의 화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성경을 죽은 책으로 만들어 버리는 잘못된 것이다. 계시록은 그 시대 로마시대에 박해받는 초대교회의 기록이지만 그들이 꿈꾸던 세상, 그리스도께서 모든 정권과 권세위에 정의로운 통치를 하시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촛불혁명이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들은 적폐의 세력 가운데 휩싸여 있다. 아직도 복장 터지는 뉴스들을 보아야 한다.

고공에 올라가 있는 파인텍 노동자들, 우리와 같은 일을 당했던 마포, 아현지구의 철거민 박준경씨는 한강에 투신했다. 마지막 용역들이 들이닥치는 날 박준경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배낭에 중요한 것을 챙기고 날이 추우니 찜질방에 가있으라며 5만원을 건넸다. 그리고 “돈 떨어지면 언제든지 엄마에게 오라”고 문자를 했다. 준경은 어머니도 조심하시라고 문자를 남기고 한강에 가서 투신으로 삶을 마무리 했다. 그는 전단지 뒷면에 쓴 유서에서 “사흘간 추운 겨울을 길에서 보냈고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렵다” “저는 이렇게 가더라도 어머니에겐 임대아파트를 드려 저와 같이 되지 않게 해 주세요”,“어머니에게 힘이 되어야 했는데 짐만 되어 미안하다”라고 썼다.

우리에게 그 나라가 임할 때까지 계시록의 상황은 아직 진행형이다.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도 진행형이며 따라서 천상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통치가 완성되는 것도 진행형이다. 그것이 묵시록 저자들의 성서이해이고 동시에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상황이기도 하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ㅡ로 사십시오.
아기 예수를 바라고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 큰 행복입니다.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이미 당신과 함께 있으며
당신을 만나며 당신을 경험합니다.
주님 오시옵소서, 그리고 그날 까지 우리의 믿음 변치 않고 견디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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