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에 합당한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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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에 합당한 열매
  • 양재성
  • 승인 2018.12.1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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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자신 전부 건 사람들 때문에 온 것

회개에 합당한 열매
스바냐 3장 14~20, 누가복음 3장 7~18.

▪ 기업 살인
국회 앞에서 카카오 택시를 거부한다며 자신의 택시에 신나를 붓고 자신의 몸에도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지른 분신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아현동 재개발지역에서 쫓겨나 찜찔방을 전전하던 박준경님이 투신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또 24살의 젊은이가 사업장에서 일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아니 죽임 당했습니다. 지난 9월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하여 2인 1조로 운영되어야 할 일자리에서 혼자 일하다가 죽임 당했습니다. 기계에 문제가 생기면 한 사람은 빨리 움직여 기계를 꺼야했는데 혼자서 일하다 당했으니 끌 수가 없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2인 1조 근무를 지켜달라고 요구하였지만 회사는 비용 문제로 이를 무시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혼자서 일하다가 몸이 두동간난 채 외롭게 죽어갔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그는 죽어서도 한 참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사람의 목숨보다도 돈이 우선하는 이 시대 우리들의 일글어진 민낯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 사건은 엄연한 기업 살인입니다. 노동자도 일함에 있어 충분히 안전을 보장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서부전력공사는 이를 무시하였습니다. 어려운 일은 하청을 주었고 하청업체들은 열악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곳에서만 여러 차례의 사건이 발생하였지만 서부전력은 무재해 사업장으로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아 수십에서 수백억 원의 세금 감면 혜택도 받았습니다. 그 비밀은 사고가 하청업체에서 발생하였기에 자신들의 사고 기록엔 없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대한 기업들이 눈감고 아웅하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니 기가 막힙니다. 이 사망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그 책임자를 처벌하고 노동권과 노동안전권을 다시 정립해야합니다.


▪ 진상규명
13일 저녁, 세월호 광장에선 영하 15도가 넘는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도 고, 김용균님의 추모집회가 열렸습니다. 김용균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고 카드에 글을 써서 걸고는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분향하였습니다. 고, 김용균님의 어머니의 말씀이 가슴을 매이게 합니다.

“우리 아들은 어려서부터 속 썩인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저희 부부는 아들만 보고 살아왔습니다. 아이가 늦둥이로 하나뿐입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소리에 저희도 같이 죽었습니다. 아이가 죽었는데, 저희가 무슨 희망으로 살겠습니까? 이 자리에 나온 건, 우리 아들 억울하게 죽은 거 진상 규명 하고 싶어서입니다.”

어머니의 절규입니다. 그렇게 착하고 성실한 아이가 왜 죽었는지 그 진상을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세월호유가족들이 생때같은 아이들을 잃고 울부짖었던 그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우린 세월호의 늪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 이곳저곳이 다 세월호입니다. 이는 세월호 사태를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사태의 진상을 규명하고, 그 책임자를 처벌하고, 전방위적인 안전사회를 구축하라는 시대적 책무를 이행했더라면 이런 사고는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 살인병기가 된 일터
어머니의 절규는 계속되었습니다. “아이 일하던 곳을 갔었습니다. 너무 많은 작업량과 너무 열악한 환경이, 얼마나 저를 힘들게 했는지 말문이 막혔습니다. 내가 이런 곳에 우리 아들을 맡기다니. 아무리 일자리 없어도, 놀고먹는 한이 있어도, 이런 덴 보내지 말 걸 하고 후회하였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살인병기에 내몰겠습니까. 저는 아이가 일하는 데 처음부터 끝까지 가보고 싶었습니다. 왕복 6km를 하루에 세 번 다닌다고 하니 18km를 걸으며 하는 일이었습니다. 밀폐된 공간으로 먼지가 너무 많이 날려서 후레시를 켜도 잘 보이지 않고 어두웠습니다. 컨베이어벨트가 중간에 있었습니다. 그게 위력도 세고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위험한 곳에 머리를 집어넣었고 맞은편을 살폈다니, 기가 막혔습니다. 옛날에 우리 지하탄광보다 열악한 게 지금 시대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일하던 곳은 정부가 운영하는 공기업입니다. 정부가 이런 곳을 운영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에게 빨리 나가라고, 더 죽는 거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아들 하나면 됐지, 아들 같은 아이들이 죽는 걸 더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를 바꾸고 싶습니다. 아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습니다. 아들의 죽음, 그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겁니다. 아이가 취업한다고 수 십군데 이력서 넣었는데, 마지막에 구한 곳이 여기였습니다. 그러니 더 기가 막히고 가슴이 터집니다.”

어머니의 절규는 당연한 탄식이었습니다. 일반적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현장상황입니다. 하지만 정부와 기업은 일터를 살인병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일자리를 보장하겠다고 한 정부는 한 젊은이를 사지에 몰아넣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기업은 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차단하고 노동자를 죽였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몇 시간을 방치하였고 공장은 아랑곳없이 돌아갔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고, 김용균님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빌며 그의 부모님께도 하나님의 위로를 빕니다.

▪ 심판과 구원
오늘 성서일과는 스바냐서 3장의 말씀입니다. 스바냐는 유다왕 요시야 시대의 왕족으로 예언활동을 하였습니다. 요시야 왕은 우상을 부수고 악정을 제거함으로 종교개혁을 통한 사회개혁을 이룬 왕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다윗의 영화가 다시 찾아올 것으로 민족의 미래를 낙관했지만 예레미야와 스바냐는 날카롭게 질타하였습니다. 조용한 때에 패망을 예언하니 사람들은 그들을 비난하였습니다. 하지만 스바냐처럼 격렬하게 분노를 말한 예언자는 없었고 그의 소리는 사랑과 정의의 소리였습니다. 그리고 가혹한 심판을 이야기하지만 이렇듯 명확하게 희망을 전한 예언자도 없었습니다. 스바냐는 왕족들의 사치와 타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임박한 주님의 심판이 왕궁으로부터 임한다고 일갈합니다. 제일 먼저 백성의 고혈을 짜는 왕족과 귀족이 처벌을 받는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관리(공무원)들 노동자들의 것을 빼앗아 부자가 된 기업가들에게 심판이 임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 사회의 불신과 불의함, 가짜뉴스와 음흉함을 조장하는 배후조정자들을 백주에 끌어내어 처벌할 것임을 선포하였습니다.

하지만 심판의 날은 구원의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합니다. 결국 스바냐의 예언은 멸망을 선포한 것이 아니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여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게 함으로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 구원의 하나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 온 우주를 신성한 빛으로 지으시고 이끄시는 분입니다. 모든 존재 안에는 신성한 빛이 있습니다. 창조성입니다. 그 창조성은 모든 존재를 하나님의 공동창조자로 세웁니다. 이는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세워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모든 존재는 그 삶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참이시기에 하나님 안에는 거짓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선입니다.

이 하나님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당신의 백성들을 귀히 여기시고 환대하십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들의 삶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반기시며 사랑하십니다. 그들이 더 이상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두려움과 슬픔을 거두어 가십니다. 오히려 그들을 억누르는 자들을 벌하시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며 영예와 칭송을 받게 하신답니다. 이는 후대에 유다가 바벨론에게 패망하고 포로로 잡혀가 겁나게 고생할 때에야 예언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는 길에 진정한 희망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 창조세계의 창문
12월 12일, 이른 아침 서울을 떠나 음성 농촌선교훈련원으로 행했습니다. 얼마 전, 감리회햇빛조합에서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하였고 오늘 그 준공식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2시간 좀 더 걸려 음성에 도착하였습니다. 89년 이 곳에 자리 잡은 농촌선교훈련원은 그간 감리교회 농촌목회 정책을 담당해왔습니다. 햇빛발전소는 야외 생태화장실 위에 세워졌습니다. 아담하게 세워진 햇빛발전소는 새로운 길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전력 소비자에서 전력 생산자로 만들었고 에너지 중앙 집중형에서 지역 분산형으로의 출발을 갖게 하였습니다. 3kw의 발전소는 하루 12kw의 전력을 생산할 것이고 한 달에 360kw의 전력을 생산하게 됩니다. 한 달에 7만원, 연 80여만원의 전기료를 절감하게 될 겁니다. 이사장인 권종호 목사는 사람을 흙으로 지었다는 것은 자연의 일부로 지었다는 것이며 인간과 자연은 공동운명체로 지구를 지키고 보전할 책임이 주어졌다고 강조하곤 창조질서보전의 일환으로 햇빛발전소를 짓고 운영하는 일은 너무나 소중한 신앙운동이라고 격려했습니다.

감리회 햇빛발전소는 두 개소를 지었지만 내년엔 30개 교회, 감리교도 1000 가구에 설치할 예정입니다. 발전소엔 예쁘게 현판도 달아주었습니다. 이렇게 작지만 차분히 희망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 회개와 합당한 열매
복음서의 성서일과는 누가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3장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장면은 광야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요한에게 찾아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리들도 군인들도 찾아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세례가 아니라 세례에 합당한 열매였습니다. 이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그 열매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나눠줘라. 정해 준 것 보다 더 받지 말라. 아무에게도 협박하고 속이고 거짓 고소하여 억지로 빼앗지 말고 지금 받은 것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세례를 받기 위한 회개의 합당한 열매란 일상을 뛰어넘는 어떤 비상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나누는 삶, 정직한 삶, 자족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듯 열매는 그저 신념이나 고백만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삶으로 이어져야합니다. 초대교회 세례의 증표로 고백과 십일조와 금식기도 등으로 표현되었지만 실제로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 열매의 삶
사람들은 요한에게서 하나님의 강렬한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가 메시야일 수도 있다는 사인입니다. 그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온 것도 알고 보면 그 생각이 깔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고 밝힙니다. 다만 자신은 메시야가 올 터인데 그분이 올 때까지 그분의 길을 닦는 심부름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선 그분의 신발 끈도 풀고 멜 자격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아주 겸손한 요한의 신앙고백입니다.
요즘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메시야라고 하나님이 보내신 특별한 사도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100% 가짜입니다. 진짜는 요한처럼 대답합니다. 통일교도 신천지도 가짜이듯이 초대형 교회들이 마치 자신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도로 지칭하고 대접하게 하는 것은 껍데기입니다. 어쩌면 통일교나 신천지보다 더 사악한 자들입니다.

작은 갈채와 찬사에도 중심이 흔들리는 사람의 성정으로 볼 때,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중심이 굳건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진 사람, 겸손하고 정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 그렇게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닦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 열매를 찾으시는 하나님
예수께서 제자들과 길을 걷다가 무화과나무를 보시고선 열매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무화과의 철이 아니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가질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자 예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그리고선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로부터 무화과나무는 뿌리부터 말라 죽었습니다. 결국 영원히 열매를 맺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농부는 열매를 구하는 자입니다. 꽃을 보려고 농사를 짓지는 않습니다. 아니 화해 농사는 꽃을 가꾸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농사는 열매를 얻으려고 농사를 짓습니다. 열매도 충실해야합니다. 여물다말면 다음에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열매를 알곡과 쭉정이로 나누어 알곡은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아궁이에 태우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심부름꾼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언자들이 잠잠하니 이미 길거리에서 돌들이 일어나 소리치고 있습니다. 고, 김용균님의 어머니의 고백에서 우린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요단강가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미 기독교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이 없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멈춘 적이 없으니까요? 아니 멈추어서는 안 되니까요? 신앙은 자신의 전부를 바친 자들의 길입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일부를 보험에 가입하듯 해서는 어떤 역사도 만들 수 없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전부를 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일이라면 자신은 머슴을 살아도 괜찮았습니다. 제사장 체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평화의 왕이 오시면 되었습니다.

▪ 전부를 건 사람들
요한이 당혹스러운 것은 나사렛 사람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친척이었고 찢어지게 가난한 민중이었습니다. 변변한 학교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정을 부양했기에 탁월한 목수였으며 농사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당신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예수의 자세와 삶을 보고선 그 속에 하나님의 숨은 계획이 들어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예수는 당신의 삶 전부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참 삶을 위한 민중들의 해방을 위해 바치셨습니다.

이렇듯 처음부터 구원은 하나님 저 혼자서 이루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파트너가 되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전부를 걸 수 있는 사람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요한과 예수였습니다. 요한은 어용 정권인 헤롯에게 목이 잘려 죽었고 예수는 헤롯과 종교권력 가야바 거기에 제국 빌라도의 합작품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구원은 그렇게 자신의 전부를 걸고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 때문에 온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전부를 걸고 하나님의 뜻에 참여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그런 방식으로 이 시대의 구원의 길을 열어 가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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